제3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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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6년 5월 15일에 있었던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로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 '''무소속'''의 '''조봉암''' 후보,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가 맞붙었다. 유권자 9,606,870명 중 9,067,063명 선거 참여(투표율 '''94.4%''')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초대 대통령의 3선이라는 기록까지 세우게 되었다. 덤으로 최초로 TV를 통해 보도된 선거이기도 하다.[1]'''"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지는구나."'''
- 조봉암 후보가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탄식하는 발언을 하면서. 후술할 부정선거 문단 참조.
제4대 부통령 선거도 동시에 치러졌다.
2. 배경
이 선거를 위해서 이승만 대통령은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을 하게 되는데 그 건에 관해서는 본 문서를 찾아가 보도록 하자. 대충 골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제한을 철폐한 것이다.
3. 과정
당시의 민주당은 '''사사오입 개헌''' 직후 이승만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한국민주당, 흥사단계 등 반이승만 진영을 통합한 '''최초의 거대 야당'''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거두인 신익희는 유력후보로 떠올랐으며, 이승만의 2파전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신익희가 전남지역 유세를 위해 기차로 이동하던 중 심장마비로 급서했고 그 이후 이승만의 승리로 끝났다.[2][3]
4. 결과
보면 알겠지만 1,856,818표, '''전체 투표수의 20.5%는 무효표'''다. 이승만에 대한 반대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면엔 민주당의 반공정서가 존재해있다. 민주당은 사사오입헌법 개정과 잦은 선거 방해 공작에 이승만에게 질릴대로 질려버렸지만 조봉암같은 진보 인사에게 표를 내줄 생각은 없었다. 선거 전에 민주당와 진보당간의 후보 단일화 협상이 있었지만,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반대했던 이유도 이것이다. (단 부통령 후보는 진보당의 양보로 장면으로 단일화되었다.)[4] 민주당은 신익희가 선거유세도중 사망하자 당 차원에서 유권자들에게 신익희는 죽었으나 추모표를 던져서 조봉암에게 표를 주지 말라고 요구했다.[5]
반면, 이승만에 의해 야당이 강세였던 서울특별시[6] 는 대통령 선거 유효투표 비율이 '''53.8%'''밖에 되지 않았다. 같은 날 치뤄진 부통령 선거에서의 서울 유효투표 비율이 96.4%에 이른 것과 비교해보자.
한편 진보계열 유력 정치인으로 떠오르던 조봉암은 신익희의 사망으로 갈곳 잃은 표 일부를 흡수[7] 하면서 약 220만 표를 얻는 선전을 거두었다. 이 때의 선전을 기반으로 조봉암은 최초의 진보계열 정당인 진보당을 조직하고 의욕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자유당에서 그를 간첩으로 몰아가기 전까지.'''
여담이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투표율과 이승만 득표율에 있어서 그야말로 진기록이 세워졌다. 예를 들면 강원도 정선에서는 이승만 후보가 25,230표(무효표 포함) 중 25,122표'''(99.57%, 무효표 제외시 99.86%)'''를 득표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정선군에서는 투표율 또한 '''99.65%'''를 기록했다. [8]
4.1. 지역별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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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일부 지역에서 조봉암 후보는 승리를 거두었다. 구체적으로는 대구광역시 일대[9] 와 경주 일대[10] , 진주시 일대[11] , 울릉도에서 그러하였다. 또한 지역별 투표율에서 대구경북이 가장 많은 지지세를 보여줬다. 이렇게 당시 경북 일대에서 높은 지지세를 보여준 이유는 이 지역은 당시 조선의 모스크바라 할 정도로 사회주의 성향이 강하였으며, 6.25 전쟁에서 상대적으로 타 지역에 비해 피해를 덜 입어서 북한에 대한 적대감도 다른 도에 비해 약했다는 점도 상대적 우세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6.25 때 격전지였던 경북 북부, 포항 일대는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12]
반대로 강원도 일대에서 이승만 후보가 가장 많은 압승을 거두었는데 그 이유는 6.25 전쟁으로 인해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타 지역에 비해 강했기 때문이다.
아래는 부통령 선거 지역별 결과
5. 부정선거
여기도 심각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증언들이 있다.'''"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지는구나."'''
- 조봉암 후보가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탄식하는 발언을 하면서.
강화문화원 이사를 지낸 조석묵 씨는 당시 조봉암의 표가 무더기로 이승만으로 바뀌었다고 증언했다. "강화군청의 비밀장소에서 공무원 1명이 밤을 새서 '이승만 대통령란'에 기표하는 방식으로 2만 표를 바꿔치기 했다"는 것이다.[13] 이 증언이야 개인증언이니 신뢰성을 부족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엔 중요한 증언도 있다. 바로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최인규의 증언이다.'''
이 시절 심각한 부정선거가 있었던 건 사실로 추정된다.「5.15 선거 후 정부는 조봉암 씨와 진보당 간부들을 형법의 간첩조항 및 국가보안법으로 구속기소하고 진보당을 반국가단체로 해산명령하였다. 나는 진보당의 강령 정책을 열독하지 않았으므로 자세한 것을 모르겠으나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으로서 진보당은 합법적 정당으로 인정 등록케 한 것 자체가 우유부단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후환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익희씨 서거 후에도 경찰은 전면적 선거 간섭을 게속하였다. 경찰의 선거 간섭을 불행한 일이나 당시 벌써 고질별처럼 되었다. 경찰간섭이 있으면 국민은 더 반발하는 법이다. 그러나 정부 여당은 경찰 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게 되었었다. 5.15 당시 분위기로서는 대중소 도시에는 자유당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농촌에서도 힘을 쓰는 것은 경찰분이었다. 경찰 아닌 일반 공무원들은 공공연하게 반정부 반여당직이었다. 신익희 씨 생존시에는 경찰간부들도 대부분 민주당과 선을 대고 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서울을 위시하여 각 도청 소재지의 일반 공무원들은 대개 민주당으로 기울어지고 전주의 도청직원들은 신익희씨가 열차중에서 급서하셨다는 말을 듣고 통곡을 하고 근무까지 거부한 일이 있었다.
나는 3.15 선거시 공무원을 선거운동시켰다고 기소되었다. 나는 사실 그렇게 했다. 그것은 상기와 같은 5.15 선거 때 자극을 받은 것이 원인이었다. 물론 공무원이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공무원법 위반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이것이 국가 민족적인 죄악이라고 보지 않는다(...).
5.15 투표가 완료되었다. 밤 9시부터 서울 개표가 먼저 시작되었다. 나는 현재 각 도 혹은 각 개표구의 표수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서울 개표결과는 대통령표에 조봉암씨의 표와 신익희씨의 추모 투표 수가 이박사의 표보다 2배에 가깝고 이기붕 씨는 장면씨에게 40만표 리드당하였다. 강원도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에 자유당 표가 90% 이상 나온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것은 실제 그렇게 나온 것은 아니다. 당시 강원도는 유권자의 대부분이 군인이었다. 군인들의 투표결과는 조봉암 씨가 70% 이상이었다고 한다.
'''… 5.15 선거 당시 강원도에서 있었던 일은 불행한 일이다. 실제의 투표결과는 전국이 대부분 대동소이하였을 것이다. 내 말을 믿기 어려우면 아직도 보관되어 있는 투표용지를 다시 검표하여 보면 될 것이다. 가공할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이 박사의 자유당이 실정을 한 데 기인한다고 일소해버릴 수 있을 것인가. 민주당이 또는 혁명정부가 집권하면 절대로 이런 일이 없을까.
한국의 반공을 논하고 민주주의를 논하는 사람이라면……[14]
아니 다소의 애국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그런 경우에 내무장관은 어떻게 하고 도지사, 경찰국장, 경찰서장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물론, 법적으로 내무장관은 선거기간 중 치안과 질서유지 책임 외에 없다. 투표와 개표는 전적으로 각급 선거위원회의 책임이다. 그러면 5.15 선거 당시 내무장관은 전국적인 투표의 결과가 압도적으로 조봉암씨가 우세할 경우 당선을 선포하도록 묵인할 수 있는가.
…… 내가 내무장관 당시 1959년 11월 말경부터 군수서장을 내무장관실에 소환하여 강조한 것은 위와 같은 5.15 선거 때의 위험하고 쓰라린 경험을 상기시켜 그들로 하여금 반공국가의 일선 공무원으로 정신무장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최인규, 『崔仁圭 獄中 自敍傳』, 中央日報社, 1984, 196-198
6. 영향
비록 선거는 비교적 싱겁게 끝났지만, 부통령 선거에서는[15] 민주당 후보 '''장면'''이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꺾으면서 당선되었다. 1956년 당시 이승만이 한국나이로 81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임기 중 사망할 확률이 높았으며, 이승만이 죽을 경우 당시 현행법상 부통령인 '''장면'''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기 때문에 '''민주당에게 정권이 넘어갈 판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자유당에서는 '''부통령 자리를 공석으로 만드려고 하는가 하면''' 다음 선거에서는 아예 '''부통령도 어거지로 당선시키려고 희대의 병크를 저지른다.'''
7. 창작물 에서
- 야인시대 112회, 113회 - 개표가 진행되자 장면 후보가 앞서나가는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낀 이기붕은 대구 지역 개표가 늦어지자 소동을 일으켜 개표를 중단 시키고 투표용지를 바꿔치기하는 방법으로 투표결과를 조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아예 동대문파를 투입시켜 투표함을 불태우고 이를 빌미로 부정선거로 몰아 선거결과를 무효화시켜 재선거를 실시할 계획을 꾸민다. 워낙 엄청난 발상이라 시키는데로 따르던 화랑영화사 식구들 마저 역사에 개입하는것 같아 꺼림직하다고 할 지경이었다. 민주당 당원들이 투표함을 지키고 있자 동대문파는 막걸리를 먹여 혼란스런 와중에 휘발유를 이용해[16] 투표함에 방화를 하려고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나서 개표 지연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개표 재개를 명령, 장면 후보의 부통령 당선을 공언해 방화시도는 미수에 그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