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영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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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내무부 장관
윤치영
尹致暎 | Yun Chi-young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898년 2월 10일
한성부 북부 안국방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사망'''
1996년 2월 9일 (97세)[1]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
(現 서울아산병원)
'''본관'''
해평 윤씨[2]
'''호'''
동산(東山)
'''재임기간'''
초대 내무부 장관
1948년 7월 27일 ~ 1948년 12월 24일
초대 국회부의장
1949년 7월 4일 ~ 1950년 5월 30일
제2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1952년 7월 10일 ~ 1954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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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윤영렬, 어머니 한진숙
'''형제자매'''
형 윤치오, 윤치소, 윤치성, 윤치병, 윤치명
누나 윤활란, 윤정숙
'''배우자'''
홍진순 (사별)
전주 이씨 (사별)
이병영 (사별)
이은혜 (사혼)
'''자녀'''
슬하 3남 2녀
'''친인척'''
조부 윤취동
큰아버지 윤웅렬
조카 윤영선, 윤보선
사촌형 윤치호, 윤치왕
'''학력'''
교동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 YMCA 영어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법학과 / 졸업)
하와이 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
헤이스팅스 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 (법학 /석사)
엘리자베스시티 주립대 대학원 (법학 / 석사)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 / 석사)
아메리칸 대학교 (사회학과 / 석사)
중앙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건국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
고든 대학교 (문학 / 명예박사)
'''종교'''
개신교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1''', '''2''', '''3''', '''6''', '''7'''
'''약력'''
중앙학교 학생야구부 감독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조사부장
외교부 차장
민주의원 비서국 국장
초대 내무부 장관
제헌 국회의원(서울 중구)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제2대 국회의원(충남 공주군 을)
제2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제2대 민주공화당 당의장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회장
고황재단, 경희대학교 이사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기
2.2. 해방 이전
2.3. 해방 이후
2.4. 말년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5. 저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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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가, 관료, [3]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해방 후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대통령 비서실장, 초대 내무부장관, 국회부의장 등을 지냈다. 3공 때는 박정희의 참모로 활동했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 국회의원, 공화당 의장, 서울시장 등을 지냈으며 1980년에 정계를 은퇴했다.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보선 전 대통령과 최초의 한국인 의학박사인 윤일선 제6대 서울대학교 총장의 삼촌(다만 두 조카보다 오히려 더 어리다.), 사학자 두계 이병도의 매제이다. 그리고 딸 윤성선이 고려중앙학원의 설립자 겸 초대 이사장인 인촌 김성수부통령의 아들 김상석과 결혼하여 인촌과 사돈 관계이기도 하다. 또한 국회사무처 서기관을 지낸 차남 윤인선의 장남이 KBS 아나운서윤인구이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해평 윤씨 윤영렬[4]과 한진숙의 7남 3녀, 서모의 자녀까지 합치면 10남 5녀 중 여섯째 아들로, 둘째 형 윤치소의 아들이 윤보선이다.[5] 윤보선, 윤일선은 그의 조카이지만 윤보선은 그보다 1살이 더 많고, 윤일선은 두살이 더 많다. 더 후덜덜한 사실은 큰형인 윤치오는 윤치영과 30살이나 나이차이가 난다는 사실.
한성부 북부 안국방에서 태어난 뒤 아버지 윤영렬의 부임지로 이동했다. 어렸을 때는 조카 윤보선의 말동무이자 친구였으나 성장한 뒤에는[6]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중앙학교로 전학했다. 중앙학교를 다니며 야간에는 중앙기독청년회학교 중학부를 다녔는데, 여기서 이상재, 이승만의 밑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수주 변영로 등을 친구로 사귀었고, 선배로는 안재홍과 친하게 지냈다.[7] 변영로와는 자주 기방에도 출입했는데, 이때 이상재변영로에게 변정상씨 라고 부른 일화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고....
유명한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의 여동생 이병영과 결혼, 아들 윤기성을 얻었으나 일찍 요절하고 이병영도 곧 병으로 사망했다.[8] 그뒤 기독교 장로 이서린의 셋째 딸 이은혜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더 두었다.
중앙중학교 재학 당시에는 야구부와 축구부에 참여했고, 졸업후에는 모교의 야구부 코치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1923년 하와이 교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한일전에서는 참패하기도 했다.

2.2. 해방 이전


원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교 유학 후 미국에 가서 이승만의 사무를 돕다가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젊은이들과 격의없이 어울리기 좋아했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축구와 야구를 즐겨 하던 그의 주변에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할수 있었다. 이런 정보수집능력으로 그는 이승만에게 발탁되었다. 1920년대에는 태평양잡지에서도 일했다.
컬럼비아, 프린스턴 대학교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귀국했는데 흥업구락부 간사로 연루되어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일본 순사들과 '조용한 면담'을 했다. 그 면담과정을 목격한 언론인 동아일보서정억 기자가 '면담 과정'을 항의하다가 현장에서 구타당했고, 기자가 구타당했다 하여 조선을 벌집 쑤시듯 이슈거리를 제공했다. 서정억은 일본 기자협회에 사실을 말했고, 기자들과 일본내 기독교인들을 분노케 했다. 결국 사태는 사촌형인 윤치호조선총독부에 가서 신원보증을 서주는 바람에 겨우겨우 풀려났다. 윤치영은 이때 물고문, 매달은 뒤에 나무 판으로 팔, 다리를 깎지끼우는 고문 등을 당했다고 기록하였다.
그 이후 1940년대 초반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였다. 예를 들어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을 팔기 위해 채권 친일단체에 협력했다든가 여러번 친일담화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하였다. 이로서 윤치영은 명예에 치명타를 입었는데, 일제강점기의 말기에는 일제가 거의 모든 분야에 발악하고 있었고 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로 수많은 변절자들이 나타나던 시기였고, 윤치영 역시 여기에 휘말려 들어갔다.[9]
한편 일부에서는 윤치영이 이러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것을 두고서 옹호하고 있다. 윤치영이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 것은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되었던 당시 일제로부터 받은 가혹한 고문과 강압에 의해서라는 것이다.[10][11] 이러한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친일파가 되긴했지만 그 후에도 이승만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하였다.[12] 또한 그가 임시정부와 미국의 소리에서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에 따라서 일부에서는 친일파라고 단정짓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고 실제로 전원책 변호사 등의 보수인사들은 윤치영이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그가 친일단체에 협력하거나 친일담화를 발표하는 것은 사실이므로, 이처럼 상충되는 기록들의 해석에 관해서는 심층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2.3. 해방 이후


1945년 광복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지만[13] 이승만이 귀국하자 이승만의 비서로 돈암장, 이화장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귀족출신이고 고급스러운 덕에 프란체스카가 부리기가 어렵자, 프란체스카는 자신에게 싹싹했던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를 가까이 하게 되면서, 윤치영 역시 자연스럽게 이승만의 주변에서 밀려나게 된다.[14]
윤치영은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는데, 국회 제헌헌법을 제정할 때 유진오인민이라는 단어를 고집하자 "인민이라는 단어는 공산당이나 쓰는 단어라 쓰면 안된다" 는, 이데올로기 공격을 가해 인민국민으로 바꾸도록 압박했다.[15]
1948년 12월 부터는 신익희와 함께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운영했다.[16] 대한국민당 해산 후 일시적으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17] 그 뒤 내무장관과 유엔파견대사 등의 여러 직책을 지냈다. 1949년에 반민특위 해체에 일조를 한 부분이 있어 이 부분에 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있다.
해방 직후에는 이기붕과 사이좋게 이승만의 비서일을 보았지만 나중에는 이기붕을 미워하여 이기붕을 떨어뜨리겠다고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18] 이기붕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부통령으로 출마한 것은 이윤영도 마찬가지.[19] 이 일로 이기붕에게 갈 표가 많이 갈라져서 이기붕은 3대, 4대 부통령 선거에서 번번히 떨어진다.
1950년대의 경우는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한 것으로 KBS 드라마 무풍지대 등에서 묘사되었다.
제2공화국 때는 장면과 사이가 안좋아서 야당으로 생활하다 5.16 군사정변박정희에게 협조해서 민주공화당 의장과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5대, 6대 대선에서 박정희공산주의자로 몰렸는데,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몰고간 사람 중엔 그의 조카인 윤보선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구정치인이 다시 집권하면 쿠데타를 일으킬 거라고 협박을 했더라는 일이 있다.[20]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할 때 서울을 아름답게 정비하면 지방의 인구가 서울특별시로 더 몰려들어 도시 과밀화 문제를 부추길 것이라는 생각에 도시 개발에 소극적이었다. 이 때 유명한 발언이 '''"서울의 과밀화를 억제시키기 위해 지방민들이 서울로 전입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이다.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경질되었고, 후임으로는 '''원조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한 김현옥이 들어오게 된다.
박정희단군 이래의 최고의 지도자 라고 칭찬했다가 야당인사들로부터 단군 이래 최대의 아부꾼 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고.[21] 68년 겨울부터는 유신의 정당성을 역설하였고 강력한 영도력이 필요하다며 3선 개헌을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22]

2.4. 말년


1980년 전두환 집권 후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으며 1982년 외교 독립운동 및 국내 흥업구락부 관련하여 독립운동에 일부 기여한 공으로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제5공화국 시기 동안 국정원로로서 독재정권의 자문위원 노릇을 했다. 타고난 체력이 건강한 덕에 축구, 야구를 즐겨하여 몸이 단련되었는가는 모르겠지만, 그 밖에 안중근의사숭모회 초대/3대 이사장(1963~1977/1983~1993)을 비롯해 1976년 우남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장, 국회의원동우회장(1983~1988), 건국청년협의회 11~13대 이사장(1984~1989), 서울시우회 초대~5대 회장(1986~1994),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7대 총재(1987~1989) 등을 역임하기도 했고, 골프나 친목 활동에도 수시로 다녔다.
1988년에 구순기념 논문을 세계국제법협회 한국본부에 봉정했고, 1993년 2월에 미국 유학시절부터 모아온 책 3,118권 및 기념물 121점을 국회도서관기증했다.
1996년 2월 9일 오후 5시 17분에 서울중앙병원에서 98세에 숙환으로 눈을 감았다.

3. 기타


일제 말기 전향 후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불의한 권력에 아첨과 협조로 일관하여 그 점이 관련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위에서도 설명되었지만, 이병도 집안과 자기 집안이 3중 사돈으로 맺어졌었거나 맺어진 것이라 역사학계가 윤두수 문제에 언론매체 등을 통해, 알려지는 것을 껄끄럽게 여기는 지도 모른다는 음모론 비스무리한 것도 나올만한 떡밥이다.
2010년 12월 10일, 국가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 서훈 취소 결정을 내렸다. 유족들이 소송하였으나 2015년 1월 서울고법에서 취소 판결을 받았다.

4. 대중매체에서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배우 김용건이 맡았다.
  • 1985년작 KBS 대하드라마 <새벽>에선 배우 이동주가 연기했다.
  • 1989년작 KBS2 미니시리즈 <무풍지대>에선 배우 김재건이 연기했다.
  • 1991년작 KBS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선 배우 안대용이 연기했다.
  • 1993년작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선 성우 김수일이 연기했다.
  • 1995년작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선 배우 박종관이 연기했다.
  •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단역으로 등장한 바 있는데, 배우 이필훈이 연기했다.

5. 저서



6. 둘러보기




[1] 98세 생일을 불과 하루 앞두고 사망하였다.[2] 21세 치(致) 항렬.[3] 2015년 서울고등법원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취소 판결로 취소선 처리함.[4] 아버지 윤영렬(1854년생)은 큰아버지 윤웅렬(1840년생)보다 사촌형인 윤치호(1864년생)와 연배가 더 가깝다. [5] 윤치영이 한진숙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뒷바침을 하는 증거로 윤영렬은 1854년생, 한진숙은 1851년생인데, 윤치영은 이들의 손자 뻘인 1898년생이라는 것. 현대에도 그렇지만 그 시절엔 더욱 46살의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흔치 않았다. [6] 정확하게는 1948년 이후 윤치영은 이승만의 측근을 지켰고, 윤보선은 한민당-민국당-민주당으로 나가게 된다.[7] 윤치영은 안재홍을 말할때 '안재홍 형은 싱거운 사람'이라고 추억했다.[8] 이병도의 형 이병묵의 아들이 그의 둘째형 윤치소의 딸, 윤보선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이중 사돈이 됐다. 게다가 그의 둘째 누나 윤노덕은 이미 이병도의 6촌 형 이병림과 결혼하여 이병도 가문과는 이중, 삼중으로 사돈관계로 얽혀 있다.[9] 그 당시를 설명하자면 일제강점기 말쯤에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흑역사 그 자체였다.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는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끌려갔으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당하고 처형당한 시기였고, 좌우 할 것 없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변절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독립운동단체였던 경성콤그룹이나, 건국동맹 등 독립운동 단체를 제외하면 거의 전멸한 정도였다. 광복 이전 국내에서 박헌영이나 여운형 같이 목숨을 걸고 독립을 외친 것이나 지하비밀운동을 한 것은 의미가 컸던 시기였다.[10] 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30-133페이지[11]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365-366페이지[12]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역, 역사비평사, 2001) 452페이지[13]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한민당과 멀어져갔다. 결국 그는 대한국민당을 창당해서 활동하다가 국민당이 해산되자, 제2공화국 때 박정희에게 협력하여 민주공화당에 입당한다.[14] 동시에 프란체스카는 임영신이 이승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의심해 임영신도 출입금지시켰다. 참고로 임영신중앙대학교의 초대 이사장으로 서울 흑석동 캠퍼스 뒤편에 무덤이 있다.[15] 훗날 유진오는 회고록에서 좋은 단어를 공산당에게 빼앗겼다며 한탄했는데, 사실 민주주의 이념에서 보통 사람(people)을 지칭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인민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국민당 측이나 공산당 측이나 '인민'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16] 1949년 11월에 신익희, 지청천 등이 탈당하지만 그런대로 1958년까지 원내 제3당으로 당을 유지해 나갔다.[17] 이기붕 세력의 견제를 받기도 했을 것이다.[18] 자서전 윤치영의 20세기 참고[19] 이윤영 자서전인 백사회고록 참고.[20] 덕분에 숙질간의 싸움이라는 뒷말도 많이 나왔다.[21] 한민당으로 정계 입문했으면서 한민당 인사들을 노골적으로 까다가 야당에게 제대로 미운털 박혔다.[22] 윤치영의 행태에 대해 당시 신민당의 중진 의원인 김대중은 효창공원 연설에서 매우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공화당의 윤치영 씨라는 사람이 이런 말 했어, '박정희 대통령은 단군 이래의 위인이다.' 이랬다 말이여! 단군 이래의 위인이니까 신라김유신, 고려태조 왕건, 이조세종대왕, 이순신 장군보다 더 위대하다 이거여! 그런데 이 사람 대통령 갈릴 때마다 똑같은 소리를 한다 말이여. 과거 이 박사 사사오입 개헌 때도 ‘이 박사는 개국 이래의 위인이다.’ 그랬다고! 우리가 결혼식장에를 가면 옛날엔 축사를 많이 했는데, 축사하는 사람마다 똑같은 소리여. 신랑은 대학을 졸업한 모범 청년이고 신부는 가정에서 부덕을 닦은 요조숙녀라고. 아마 이 양반 대통령에 대한 아첨을 무슨 결혼식의 축사로 착각을 한 모양이여. 이번에, 이번에 아폴로 11호가 달세계 떠 가는데, '''제발 안 됐지만 이런 양반 좀 실어다 거기다 두었으면 대한민국이 편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