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이 히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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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No.77
아라이 히로마사 (新井宏昌)[1]
'''생년월일'''
1952년 4월 26일
'''국적'''
일본
'''출신지'''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
'''학력'''
PL학원고등학교 - 호세이대학
'''포지션'''
외야수, 1루수
'''투타'''
우투좌타
'''신장'''
174cm, 69kg
'''프로입단'''
1974년 드래프트 2위
'''소속팀'''
난카이 호크스 (1975~1985)
긴테츠 버팔로즈 (1986~1992)
'''지도자'''
오릭스 블루웨이브 1군 타격코치 (1994~1997)
오릭스 블루웨이브 1군 종합코치 (1998~1999)
오릭스 블루웨이브 2군 감독·타격코치 (2000~2001)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군 타격코치 (2003~2004)
오릭스 버팔로즈 1군 치프·타격코치 (2005~2006)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타격코치 (2007~2008)
오릭스 버팔로즈 2군 감독 (2010~2011)
오릭스 버팔로즈 1군 타격코치 (2012)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타격코치 (2013~2015)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군 타격코치 (2019~)
'''1987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1986년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오리온즈)
.360

'''아라이 히로마사'''
'''(킨테츠 버팔로즈)'''
'''.366'''

1988년
타카자와 히데아키
(롯데 오리온즈)
.327
1. 소개
2. 현역 시절
3. 지도자 경력
4. 여담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선수. 현재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군타격코치로 일하는 중이다.
재일교포 3세 출신의 프로야구 선수로, 현역 시절 교묘한 배트 컨트롤로 게임 상황에 맞는 배팅을 선보이며 2000안타, 300희생타를 기록한 명선수이다. 당연히 명구회에도 회원가입. 은퇴 후 여러 프로팀에서 코치로 일하며 이치로 등의 명선수들을 길러냈다.
한국 이름은 '''박종률(朴鐘律)'''[2]이다. 고교-대학 선수 시절과 프로 지명 당시의 이름은 한국명인 '''종률'''을 훈독한 '''아라이 카네노리(新井鐘律)'''였으며, 현역 시절과 1991년 일본으로 귀화한 후엔 현재의 이름을 쓰고 있다.

2. 현역 시절


PL학원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70년 주장으로써 팀을 최초로 코시엔 결승으로 이끌고, 가을에 열린 국민체육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여러모로 활약했다. 이후 PL은 키요하라 카즈히로, 쿠와타 마스미 등을 배출한, 20세기 말을 대표하는 야구 명문고로 거듭난다.
그 후 그 해 드래프트에서 긴테츠 버팔로즈의 9위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을 거부하고 호세이대학으로 진학하게 된다.
호세이 시절에도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면서 2차례 리그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고, 대학야구 베스트나인에도 1번 선출된 바 있으며, 1974년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대회에도 선수단으로 뽑혀 출장한 바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프로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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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카이 호크스 시절.
당초 아라이는 체구가 작아서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당시 난카이의 플레잉 매니저였던 노무라 카츠야가 TV로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대회 경기를 관전하던 중 그의 뛰어난 배팅센스에 주목, 그해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난카이 호크스의 2위 지명을 받고 입단하였다.
입단 2년차인 1975년부터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기 시작한 아라이는 이후 3할 타율을 3번,[3] 두 자릿수 도루를 8번, 두 자릿수 타점을 매년[4] 찍는 등 맹활약하며 3번의 베스트나인을 수상, 난카이 호크스 최후의 황금기와 기나긴 암흑기를 지탱했다. 다만 파워와 장타력은 별로였는지라 난카이 시절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적은 1번도 없었다(...)
그러나 1985년 시즌오프, 성적 부진에 빠지면서 '''"지킬 만한 곳도 없고, 체력적으로도 슬슬 한계"''' 란 이유로 긴테츠 버팔로즈로 트레이드된다. 그러나 거기서 나카니시 후토시 코치를 만나 그의 지도를 받으며 뛰어난 타격실력이 다시 날개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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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테츠 버팔로즈 시절.
아라이는 긴테츠에서도 또다시 맹활약하면서 1986~87년 2년 연속으로 생애 처음 두 자릿수 홈런을 치기도 했으며[5] 1987년에 '''타율 .366/184안타'''를 기록하며 본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위타자, 최다안타 기록[6]을 차지하였다. 참고로 이 최다안타 기록은 당시의 퍼시픽 리그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이었으며,[7] 2004년 긴테츠가 해체되면서 영원히 남게 된 긴테츠의 개인타자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이기도 하다. 또 이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골든글러브(NPB)를 수상했고 생애 마지막으로 베스트나인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9년 일본시리즈에서 23타수 9안타(타율 0.391)를 기록하며 감투상[8]을 수상했다. 난카이 시절엔 1번도 나가지 못한 올스타전에도 4번이나 출장했다.[9]
이렇게 긴테츠에서도 활약하던 아라이였으나 90년대 들어 슬슬 기량이 쇠퇴. 1992년 대망의 통산 2000안타, 300희생타를 달성하며 명구회에 가입했지만 성적 부진에 시달리면서 결국 이 시즌을 끝으로 전력외통보를 받으며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통산 성적은 '''2076시합 7963타석 2038안타 88홈런 680타점 165도루 300희생타 67희생플라이 타율 .291'''
'''골든글러브 1회, 베스트나인 4회 수상.'''
특히나 저 300희생타는 NPB 통산 5위의 대기록이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해설가/평론가로 활동하다가 1994년, 당시 감독이자 긴테츠 시절의 은사 오기 아키라의 부탁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타격 코치로 취임했고, 후에 종합 코치와 2군 감독을 맡았다. 오릭스 선수였던 사토 가즈히로와 스즈키 이치로의 등록명을 "펀치"와 "이치로"로 각각 변경하도록 고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치로의 타격 지도를 맡으면서 이치로가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타자로 우뚝서는데 기여했고 1995년과 1996년의 리그 우승, 1996년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오기와 함께했다. 그 후 오기가 2001년 성적부진으로 물러나면서 같이 오릭스를 떠나게 된다.
그 후 2003년부터 2년간 오 사다하루 감독이 이끌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타격 코치를 맡아 2003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다이에에 있으면서 이구치 타다히토, 마츠나카 노부히코, 조지마 겐지, 페드로 발데스의 '''100타점 4인방'''이 이끄는 '다이하드 타선'을 완성했으며, 2003년 다이에의 '''팀타율 .297'''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 기록으로 남았다.
2005년 오기 아키라 감독을 따라 오릭스 버팔로즈의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로 오릭스에 복귀했지만, 2006년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2007년과 2008년에는 다시 호크스로 돌아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타격 코치를 맡았지만, 2년간 타선의 타격성적이 저조하면서 해임되었다. 이후 2010년부터는 오릭스에서 2군 감독을 역임(2012년에는 타격코치도 겸임)했다.
2013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타격코치로 이적하여, 마루 요시히로, 기쿠치 료스케 등의 신진 강타자들을 육성했다. 하지만 2015년 팀 타선과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코치직에서 물러난 이후엔 방송 야구 해설자나 신문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다시 2020년에 친정팀인 호크스로 복귀하여 현재 2군타격코치로 재임중이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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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미인이다. 장녀는 2011년 미스 일본 미스 기모노에 선정되었으며, 3녀는 2012년 미스 일본 그랑프리에 선정되었다. 두 명 모두 모델로 활약.

[1] 한국명은 박종률(朴鐘律). 개명 전 일본명은 한국명인 종률을 음독한 아라이 카네노리(新井鐘律).[2] 1980년대 한국 야구계 에서는 일본 이름을 한자로 읽은 박굉창(朴宏昌)으로 통했었다.[3] 입단 첫해에도 3할 타율을 찍었지만 규정타석 미달이었다.[4] 데뷔해인 1974년도 포함.[5] 다만 두 자릿 수 홈런은 이때가 전부.[6] 최다안타가 타이틀로 지정된 것은 1994년부터이다. 따라서 상단에도 미표기.[7] 이는 1994년 스즈키 이치로가 210안타를 때리면서 센트럴 리그 기록이던 후지무라 후미오의 191안타 까지 같이 경신했다.[8] 일본시리즈 준우승팀의 우수한 성적을 거둔 선수에게 주는 상.[9] 다만 4번 다 팬투표로 뽑힌 게 아니라 감독 지명으로 나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