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누마 이네지로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사회주의자, 정치인. 일본사회당의 제3대 위원장을 맡았지만 도쿄 찌르기 사건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2. 생애
2.1. 유년기
1898년 미야케촌에서 영주의 아들로 유복한 생활을 보냈다. 도립 료코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대 최고의 명문대였던 와세다대학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원했는데 이네지로가 정치경제학부를 택하는 바람에 잠시 의절을 당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때 친구의 문구 회사에서 만년필 만드는 작업을 하며 입에 풀칠을 했다. 운동에 출중한 재능을 보여 스모부로 꼽히기도 했고, 조정부에도 소속되었다.
2.2. 정계 활동
그가 대학을 다니던 1910년대 말 ~ 1920년대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로, 그 역시 좌파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놀랍게도 농지 대부호의 아들이면서 '''소작쟁의'''운동을 벌였는데, 이는 입시를 가지고 달달 볶았던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발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군부에 대한 협력을 강조했던 와세다대학 군사연구단에 반발하여 반대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와세다대 연구소 사건이라고 불리는 집단 린치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사회주의 운동권 생활을 이어나간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에도 군국주의 반대 연설을 하다가 황급히 도쿄로 돌아왔지만 병사들에게 잡혀 구속되었고, 이치가야 감옥에 갇혀 간수들에게 태도가 불량하다면서 폭행을 당했다. 1923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1925년 일본 최초의 단일 무산정당 '노동농민당'을 결성해 26세의 젊은 나이로 서기장에 오른다. 그러나 이 당은 당시 우경화로 폭주하던 일본 정부에 의해 1시간만에 해체되고 만다.
1926년 노동농민당이 재창당되었지만 좌우분열로 3개로 정당이 분열되는데,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이중 중도파였던 노농당에 들어갔다. 노농당과 다른 좌파 정당이 규합한 사회대중당이 1932년 결성되자 아사누마도 여기에 참여했다. 사회대중당 서기장이었던 아소 히사시의 인품에 감명을 받아 아소의 지지자가 되었으며, 아소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 사회주의 체제를 주장하자 아사누마도 마찬가지로 국가사회주의 성향이 되었다. 더 나아가서 아사누마는 중일전쟁에 찬성했으며, 조선과 대만의 독립을 반대하는 외교적 극우 성향으로 치닫게 된다. 1933년 군부의 지지를 받아 처음으로 도쿄도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3년 뒤인 1936년에는 중의원에도 당선된다. 1940년 모든 정당이 대정익찬회로 통합되자 아사누마 이네지로 역시 대정익찬회에 가입, 임시선거제도 조사부 부부장에 취임해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부역했다. 심지어 1940년에는 중일전쟁에 반대했던 같은 당의 중의원 제명에도 찬성했다.
한편 1940년 아소 히사시가 급사하자 아사누마는 실의에 빠져 정치에 회의감을 갖게 된다. 더군다나 대정익찬회가 아사누마의 경제적인 노선과 많이 다른 국가자본주의 노선을 취하자 아사누마는 1942년 공직을 그만두고 대정익찬회를 탈당했다. 이는 후일 아사누마가 전후 재판을 피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그에게 있어서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다. 만약 계속 남아 있었다면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을 것이다.
2.3. 일본사회당 시절
1945년 일본 사회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사회당 중도파였던 가와카미 조타로와 미와 도시나가의 친군부 활동으로 공직 생활이 끝장나자 자연스레 아사누마는 사회당 중도파의 거두로 자리잡았다. 1947년 서기장이었던 니시오 스에히로가 가타야마 데쓰 내각에 입각하자 서기장 대리가 되었고, 이듬해인 1948년에는 정식 서기장이 되었다. 1949년 사회당 위원장이었던 가타야마 데쓰가 낙선하자 사회당 총리 지명 투표에서 아사누마가 대신 사회당의 총리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요시다 시게루에 말려 낙선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의 찬반을 두고 사회당 좌우파가 대립하자 절충안으로 갈등을 봉합하려 했으나 막지 못했고, 이후 분당된 사회당우파 정당의 서기장이 되었다.
1955년 사회당 우파와 사회당 좌파가 다시 합당하면서 통일사회당의 서기장직에 복귀했다. 위원장직에 오를 수 있는 그였지만 배후에서 조용히 갈등을 봉합하는 조정자 역할을 해 '영원한 서기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1959년 방중하였을때 '미국은 중국과 일본의 공통된 적'이라고 주장하며 하나의 중국에 찬성하는 친중반미의 성향을 보였다. 그가 15년전까지만해도 중일전쟁에 찬성했다는 점을 보면 급속도로 성향이 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있는데, 일본이 예전에 싸웠던 상대는 중국 국민당 정권이고, 중국 공산당 정권과는 좌파정당으로써 교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사누마의 견지라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강한 반미성향과 일본이 아시아 중시 외교를 해야한다는 입장은 실제로 그대로였고, 생각이 바뀐 것은 일본이 주도국일 필요는 없다 정도. 하여튼 때문에 당시 일본 대사였던 더글러스 맥아더 2세에게 항의를 받기도 하였으며, 이 점은 후일 아사누마가 백색테러를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60년 당내 우파가 갈등에 못이겨 민사당을 창당하자 제2대 위원장이었던 니시오 스에히로가 사퇴했고, 마땅한 인물이 없자 아사누마가 위원장직에 오르게 된다. 아사누마 위원장은 안보투쟁 전략으로 기시 노부스케 내각을 총사퇴시키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좌파 야당의 분열로 인해 사회당이 선거에서 부진하였다. 더군다나 민사당 측에서 아사누마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소 히사시의 아들 아소 요시타카를 아사누마의 지역구인 도쿄도 제1구에 출마시킴에 따라 아사누마 위원장은 위기에 몰렸다.
2.4. 테러를 당하다
[image]아사누마 이네지로... 당신은 일본의 적화를 도모하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나, 사회당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자로서의 책임과 방중을 즈음한 폭언과 국회 난입의 직접적인 선동자로서의 책임을 물어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 '''여기에 있어 나는 당신에게 천벌을 내린다.'''
범인 야마구치 오토야(山口 二矢), 범행 전의 수필에서
야마구치 오토야가 아사누마 위원장을 한번 찌르고 다시 찌르는 순간을 담은 사진. 이 사진을 찍은 기자는 비(非)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1960년 10월 아사누마는 미일협정을 비판하는 요지의 연설을 하던 도중 대일본애국당 소속이었던 극우 성향의 청년 야마구치 오토야에게 코등이가 없는 긴 일본도인 와키자시에 복부를 2번 찔렸고, 병원에 이송되는 도중 과다 출혈로 사망하고 만다. 향년 61세. 자세한 것은 도쿄 찌르기 사건 참조.
2.5. 사후
사후 사회당은 아사누마의 동정표로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자유민주당의 빠른 대처로 자유민주당의 지지율이 올라갔고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 자유민주당이 선거에서 압승했다. 다만 사회당의 지분을 두고 경쟁했던 민사당의 의석은 유탄을 맞아 40석에서 17석으로 줄어들었다. 사회당은 145석으로 의석을 그나마 늘리기는 했지만, 지난 중원선에 비해서는 적은 의석을 획득하는데 그쳤다.
아사누마의 사후 중원선에서 아사누마의 아내인 아사누마 교코가 중의원에 출마, 당선되었지만 그 다음 선거에서는 후보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3. 소속 정당
4. 기타
- 고향 미야케에는 그를 기리는 공원이 만들어져있다. 그러나 2000년 오야마 화산 폭발로 인한 유독가스로 인해 그의 동상 상반신 부분은 변색되었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다고 하니, 찾아가볼 사람은 유의할것.
- 사회민주당은 아사누마의 동상을 세웠는데 2013년 당사를 옮길 당시 2t이나 되는 크기를 감당하지 못해, 받침대 부분을 깎고 재질을 바꿔 우여곡절 끝에 4개월만에 동상을 옮겼다고 한다.
- 조선과 대만의 식민 통치를 옹호했고, 대정익찬회에도 참여했으며 한때 전체주의를 옹호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 오래 살았다면 사회당이 자민당보다도 우경화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 외에도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고 친북 성향을 보였던 등, 한국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반갑지 않은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