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찌르기 사건

 



1. 개요
2. 피해자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누구인가?
3. 범인 야마구치 오토야는 누구인가?
4. 후폭풍
5.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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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浅沼稲次郎暗殺事件(あさぬまいねじろうあんさつじけん)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Tokyo Stabbing / Tokyo Stabbing Incident / Inejiro Asanuma Assassination
1960년, 일본의 정치인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가 TV 연설회 도중 극우파 소년에게 살해당한 사건.
이때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 나가오 야스시(長尾 靖)가 절묘한 순간에 찍은 사진이 영문 제목인 Tokyo Stabbing으로 유명해지면서 나가오 야스시는 이 사진으로 미국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초로 196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사진뿐만 아니라 영상도 고스란히 TV를 통해 방송되면서 사상 최악의 방송사고 중 하나가 되었다.[2] 찔렀을 때의 충격이 강했던지 순식간에 피의자와 피해자의 안경까지 동시에 날아갔다.

2. 피해자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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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누마는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 노선 중에서도 비교적 온건한 중도적 정치인이었으나 중공에서 '''미국중국일본의 공통된 적'''이라는 요지의 반미좌파 노선에 충실한 연설 등을 하던 정치인이었다. 복잡한 정치 행보 끝에 1960년 일본사회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 도쿄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일본 자민당, 일본 민사당[3], 일본사회당 "3당 당수 연설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당일 미국과 일본의 협정을 비난하는 아사누마의 연설 도중 일본의 일부 급진파들은 야유와 협박을 했지만 아사누마는 계속 연설을 이어갔는데, 갑자기 17세 극우파 청년 야마구치 오토야가 연단으로 달려와 순식간에 아사누마의 옆구리를 긴 칼(코등이 없는 와키자시, 일명 시라사야)로 찔렀다. 아사누마는 병원으로 이송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만 61세였다.

3. 범인 야마구치 오토야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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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오토야( 山口二矢, 1943년 2월 22일 - 1960년 11월 2일)
1959년 16세의 나이로 대일본애국당[4]의 아카오 빈[5]의 연설을 듣고 감회 받아, 대일본애국당에 입당해서 청년 본부 위원이 되었다.
이후 좌익 정치인의 연설에 난입해 난동을 부리는가 하면, 아카오 빈의 연설을 비난하는 사람을 두들겨 패는, 일종의 자발적 정치깡패 노릇을 하게 된다. 입당한지 반년 만에 대일본애국당을 탈당했다. 이유는 '''"더 과격한 활동을 하게 될 텐데, 이대로는 아카오 빈 선생과 당에 폐가 될 거 같아서"'''. 1960년 7월 1일, 동지들과 함께 전아시아반공연맹을 결성한다.[6]
1960년 10월 4일, 그는 집에서 우연히 와키자시를 찾아냈다. 그는 즉시 메이지 신궁을 참배한 후, 고바야시 다케시 일본 교원 노동조합 위원장과 노사카 산조 일본공산당 의장에게 전화를 건다. "대학의 학생위원인데 가르침을 받고 싶다"며 면담을 요청하지만 고바야시 다케시는 이사갔고 노사카 산조는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10월 12일. 문제의 사건이 터진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당신은 일본의 적화를 도모하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나, 사회당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자로서의 책임과 방중을 즈음한 폭언과 국회 난입의 직접적인 선동자로서의 책임을 물어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 여기에 있어 나는 당신에게 천벌을 내린다. 황기 2620년(1960년) 10월 12일 [7]

살인범 야마구치는 그해 11월 2일 도쿄 소년감별소 동쪽 건물 2층 2호실에서 '''七生報国、 天皇陛下万歲(칠생보국[8], 천황폐하만세)''' 라는 내용의 치약으로 쓰인 유서사세구를 남긴 후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당시 17세였다.
참고로 소설가 사와키 고타로에 따르면 자민당 실력자인 고노 이치로[9]와 그 외 다른 정치인도 야마구치의 테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태평양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언설을 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황족도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좌익 세력을 아니꼽게 보고 있던 우익들은 천벌을 받았다며 그의 행동을 찬양하면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는 등 선전용으로 잘 이용해 먹었다. 지금도 그가 세상을 떠난 11월 2일에는 우익 단체에 의해 추모식이 열린다. 추모제의 이름은 山口二矢烈士墓前祭[10]로, 구글에 검색하면 이미지가 많이 나온다. 사족으로 야마구치가 청년본부원으로 있던 대일본애국당 당총본부 내의 제단에는 야마구치의 데스마스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야마구치 오토야의 아버지는 육상자위대 소속 장교로 1959년에 1등육좌(대령)였다. 아들이 저지른 일로 인해 사건 발생 3일 후인 10월 15일에 자위대에서 부담을 느껴 전역해야 했다[11].

4. 후폭풍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자민당이 패배할 것 같았으나[12]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아사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민당은 압승을 거두었으며(296석/467석 57.4%), 민사당이 유탄을 맞아 의석 수가 40석에서 17석으로 줄어들어 참패했고 사회당은 의석 수를 122석에서 145석으로 늘리기는 했으나 1958년 총선 때보다 의석 수가 적었다.
참고로 아사누마가 암살당한 뒤 사회당에서는 그의 부인인 아사누마 쿄코(浅沼享子)가 후보로 선정되었으며,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무난히 당선되었지만 3년 후 실시된 선거에서는 입후보하지 않고 사퇴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전 일본이 어린이들에게 "날붙이 추방 운동"을 실시하면서, 규제에서 제외 대상이었던 히고노카미[13]와 연필깎이 칼[14] 등을 1963년 4월 5일 총도법 개정안에 추가로 적용시켰다.
일본 래퍼 NORIKIYO의 노래인 仕事しよう의 뮤직비디오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5. 기타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데 2007년 벌어진 아르메니아터키 언론인 흐란트 딩크 암살사건이다. 범인인 사마스트 오군은 1990년생으로 야마구치랑 똑같은 17살이었다. 터키 우파인 오군은 아르메니아 학살을 연이어 보도하던 딩크를 살해했으며 잡혀가는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다음은 오르한 파묵 차례다! 라고 외치는 통에 오르한 파묵은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가야 했다.
[1] 이 사진은 소년이 아사누마를 막 찌르려는 순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사누마 이네지로의 왼편에서 달려오면서 칼로 그를 찌른 뒤, 다시 오른쪽으로 밀쳐진 장면이다. (아래 영상 21초)[2] 대한뉴스에서도 이 사건이 다뤄졌으며, 그 당시 장면이 그대로 방영되었다.[3] 니시오 스에히로 등 사회당 일부 계파가 사회당을 탈당해 만든 정당. 1994년 신진당에 합류하면서 해산했다.[4] 전쟁 전부터 활동하던 반공주의자들이 모여 만든 정당.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전부터 사실상 국가적으로 반공을 선언했다.[5] 과거에는 사회주의자였으나, 고등경찰에 끌려가서 한번 코렁탕을 먹고 나서는 "천황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반공, 반소련 주의자였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6] 이 단체는 훗날 방공정신대라는 정신나간 이름의 단체로 발전하는데, 이들은 스스로 "임협우익"을 자처하며 행동대(를 자처하는 깡패)로 활동한다. 원래 이들은 1955년 결성된 방공신문사의 "방공신문사 청년봉사단"으로 결성되었으나, 1960년의 안보 투쟁 이후 고다마 요시오와 점점 더 친하게 지내면서 과격화 되었다. 이후 방공신문사에서 파문당하고 난 잔여 멤버들이 전아시아반공연맹과 합세하여 방공정신대가 된다. 트럭에 확성기를 올려놓고 거리에서 시끄럽게 연설하며 다니는 "가선 스타일"의 원조라고 자처하고 있다. 현재 이들은 주주총회의 총회꾼 짓이나 어린 폭주족들을 꼬드겨서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일로 유명하다고 한다.[7] 원문은 다음과 같다. 汝、浅沼稲次郎は日本赤化を図っている。自分は、汝個人に恨みは無いが、社会党の指導的立場にいる者としての責任と、訪中に際しての暴言と、国会乱入の直接の扇動者としての責任からして、汝を許して置く事は出来ない。茲に於て我、汝に対し天誅を下す。 皇紀二千六百二十年十月十二日 山口二矢。[8] "일곱 번 거듭 태어나도 역적을 주살해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의미다. 남북조시대의 남조 측 근황파 무장 쿠스노키 마사시게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패해 자결하면서 남긴 사세구로 알려져 있는데, 왜 하필 일곱 번인가 하면 불교에서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 가장 많은 횟수라고 한다. 의미가 의미인 만큼 일본 제국 시절 군국주의 교육에도 쓰였고, 카미카제 대원들의 하치마키(머리띠)에도 쓰였다.[9] '''고노 요헤이의 아버지이자 고노 다로의 할아버지'''[10] 의미를 풀면, 야마구치 오토야 열사의 묘 앞에서 하는 제사란 뜻이다.[11] 과거 일본군 만행 때문에 그 교훈을 삼아 자위대는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12] 물론 사회당이 낸 후보자 수가 196명 정도라 정권교체 될 가능성은 적었다.[13] 肥後守. 일본의 접이식 칼. 작명이 이즈미노카미 카네사다무츠노카미 요시유키같이 이름이 알려진 일본도와 유사하다. 어촌마을에서의 그물 끊기나 그외 날붙이가 필요한 잡다한 일에 만능칼로서 널리 쓰였으며, 일제시대에 한반도에도 들어와서 쓰이다가 해방 이후에는 한국의 신성공업사란 기업에서 히고노카미를 간략화(크기의 소형화, 플리퍼 오픈장치의 삭제)시키고 공장에서 대량생산할수 있게 만들어 생산성을 높인 버전이 '신성특급도'(이하 신성칼)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현재까지도 생산되고 있다. 일본의 히고노카미도 여전히 생산되고 있지만, 대부분이 장인이 하나하나 손으로 만드는 수제작품이라 가격도 신성칼의 10배 이상 비싸고 열처리나 칼날 형태도 균일하지 않다. 그래도 신성칼에는 없는 칼날 오픈장치가 남아있고 크기도 훨씬 큰것들도 있어서 특성은 바래지 않은 편.[14] 안전 칼집이 있고, 날이 기요틴 날처럼 비스듬한 날을 가진 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