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샤 빈트 아비 바크르

 

1. 개요
2. 예언자의 아내로서
3. 대우


1. 개요


'''아이샤'''(아랍어: عائشة‎)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3번째 아내이자 애처이다. 풀네임은 아이샤 빈트 아비 바크르(아랍어: عائشة بنت أبي بكر, ‘Ā’ishah bint Abī Bakr)이다. 이름의 의미는 "아부 바크르의 딸 아이샤"란 뜻이다. AD 613년/614년에서 678년까지 살았다.

2. 예언자의 아내로서


무함마드의 조력자이자 친구인 아부 바크르의 딸이다. 무함마드가 첫 아내 하디자가 죽은 지 얼마 안 된 619년, 혹은 620년에 아이샤에게 한눈에 반해서 청혼했다고 전해지는데, 결혼 당시 무함마드는 53세, 아이샤는 6세였다. 실제 성관계는 9살일 때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히 몇 살에 첫 성관계를 했는지는 본인들이 아니고는 알 수 없다. 무함마드가 한눈에 반한 처녀 사랑 어쩌고 저쩌고라는 요새 기준으로 보면 FBI가 셋트로 몰려올 빨간 딱지 붙은 러브스토리 같지만 사실 무함마드가 메카의 귀족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서 정략결혼을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무함마드 사후 아부 바크르는 첫 번째 칼리프가 되기도 했다. 아이샤가 결혼한 나이를 들어 지금도 일부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조혼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물론 정략결혼의 성격이 있다고 추정되기는 하지만 6살 여아와 결혼함은 7세기 아랍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빨랐다. 무함마드와 카디자 사이에서 얻은 딸들조차도 훨씬 나이가 든 뒤에 결혼하였다. 무함마드와 아이샤의 결혼은 이후 아랍과 무슬림들에게 미성년자 조혼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반 이슬람주의자들이 무함마드를 비판하는 빌미가 되었다. 아무튼 아이샤는 첫째 부인 카디자를 제외하면, 무함마드와 결혼한 모든 여자들 사이에서도 그 위치가 특별하였다.
아이샤가 무함마드와 결혼 후 얼마 안 된 시점에, 순례 도중 무함마드가 선물한 목걸이를 잃어버려 이를 찾기 위해 상단 행렬을 이탈한 적이 있었다. 이 당시 아이샤가 길을 잃었는데, 이슬람 군인인 싸프완 빈 무아딸이 아이샤를 발견하고 일행에 무사히 복귀시킨 일이 있었다. 그동안 둘이 서로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이 쫙 퍼졌고, 무함마드의 교우들은 아이샤를 투석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이 당시 중동에서는 바람 피는 현장을 네 명이 직접 목격해야 증거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알리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나이가 어려 죽이면 안 되지만, 그래도 결혼한 여자가 외간남자랑 밤을 같이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샤의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므로, 이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이샤는 이 사건 이후로 알리를 싫어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사건은 무함마드가 '''"내가 알라께 계시를 받았는데 아니랬음."'''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음해자들에게 채찍형 80대를 선고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다면 해봐야 10살일 텐데 바람을 피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이가 나이라 이슬람을 까는 데 중요한 소재가 되며 무함마드를 '악마 씌인 페도필리아 변태'로 까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지어 당시 아랍 기준으로도 어렸으니... 물론 진짜로 어린 나이에 성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증거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저 허공에 붕 떴다. 그러나 이러한 조혼떄문에 이후 이슬람 사회 국가에서는 "성인께서도 어린 애랑 결혼했는데 우리도 해도 되는 거 아님?"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21세기가 된 이슬람 국가에서는 지금도 조혼 풍습이 유지해오고 있다.
무함마드가 권력자가 된 다음에 취한 여자들이 몽땅 성숙한 여자에 유부녀였으므로, 무함마드의 성적 취향이 페도필리아는 아니었던 듯하다. 오히려 요새 식으로 표현하자면 MILF 취향이었던 듯하다. 오히려 아이샤가 무함마드의 여성편력에서는 예외적인 경우였던 듯. 〈무함마드 평전〉을 쓴 하마드 압델 사마드는 저서나 강의에서 무함마드의 성적 취향에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어머니를 일찍 잃어버린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이샤는 무함마드에게 '잃어버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상할 수 있는' 상징적인 대체제였을 거라고...
비록 나이차가 많이 나는 결혼이었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굉장히 돈독하였다. 무함마드가 친족이 반대하는 결혼이라도 자기가 하는 결혼이라면 정당화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자, 아이샤가 '''"당신의 신은 당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가 보군요!"라고 일침하였는데''' 무함마드는 화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고 한다. 교우들은 이에 대해 아이샤가 너무 버릇없다고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무함마드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에 대해 남이 이래라 저래라하지 말라며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았다. 아이샤는 기억력과 통찰력이 뛰어나, 무함마드가 아이샤에게 이슬람학에 대해서 가르쳐줌으로써 아내임과 동시에 신학적인 동료이기도 하였다.
무함마드와 결혼을 해도 10대 초반이라 인형을 가지고 놀았으며 무함마드는 그녀와 "영혼의 놀이"(game of spirit)을 하며 심신의 위안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같이 인형놀이를 했단 말인지 붕가를 했단 말인지 알 수 없다. 결혼식 당일도 친구들과 놀던 아이샤를 어머니가 데려다가 단장시켰다고. 전승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굉장히 자상한 남편이었다고 하는데, 같이 장난감을 들고 놀아줬다고 한다.

3. 대우


수니파에서는 '''신자들의 어머니, 믿는 자들의 어머니(Mother of the Believers) 등으로 떠받들며,'''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에서 아이샤가 자주 등장한다. 아이샤가 발언했다는 하디스가 무려 '''2,400여''' 편에 달한다고 하는 판. 무함마드는 632년에 아이샤의 무릎을 베고 죽었으며 아이샤는 그 후 재혼하지 않고 살았다. 가톨릭성모 마리아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후에 메카의 귀족 세력들과 함께 4대 칼리프 알리에게 대항하여 이라크 남부 바스라시 외곽에서 군대를 일으킨다. 이게 무슬림이 무슬림을 학살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런데 아이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우마이야 가 등 알리와 적대하는 세력의 편을 든 이유는 개인적으로도 알리와 불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말이 있다.
아이샤의 처녀성이 초기 이슬람 역사가들에게 엄청난 논쟁거리가 되었는데 이전의 무함마드의 아내들은 모두 과부를 무함마드가 거둬들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샤는 무함마드를 위해 준비된 성스러운...어쩌고 저쩌고로 포장이 되기 때문에 아까 말한 Mother of Belivers(umm-al-mu'minīn)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무함마드의 13번의 결혼 중 그녀만이 처녀였다. 나머진 이혼녀라든지 과부라든지. 심지어 무함마드에게 잘 보이려고 자기 부인을 반강제로 보낸 경우도 있다.
아이샤의 처녀성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아이샤의 아버지 아부 바크르가 이슬람으로 개종할 무렵에 이미 아이샤에겐 약혼자가 있어서이다. 근데 약혼자는 무슬림이 아니었고 에티오피아에 일이 있어서 갔다오니 그 사이에 무함마드와 결혼했기 때문에 원래의 약혼자에게 처녀성을 잃지 않았나...하는 식이다. 하지만 6살 이전에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3대 칼리프 우스만 이븐 아판의 죽음에 손을 썼다는 말도 있는 등 이래저래 풍운의 여성.
무함마드가 병에 걸려 죽어갈 때 그의 마지막을 지킨 사람이기도 하며, 무함마드는 아이샤의 무릎을 베고 있던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남편의 마지막을 사람들에게 얘기해준다.
무함마드가 그녀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어릴 적부터 이슬람 신학에 대해서 교육하였기 때문에, 당대의 여성들 중 신학에 대해서 가장 해박하였으며 하디스의 가장 권위있는 전승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다. (하디스의 2300여 편이 그녀에게서 나옴) 그녀는 동시에 이슬람 여성의 대표자임을 자처하였으며, 당시의 반 여성적인 분위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던 인물이었다. 여성의 교육권을 주장하였으며, 이슬람교 최초의 여성 신학교를 건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의 울타리 내에서 여성인권을 개혁하려는 무슬림 페미니스트의 롤모델로 추앙받기도 한다.
656년 낙타전투(Battle of Bassorah, Battle of the Camel)에서 알리에게 깨진 후 사로잡혔지만 알리는 아이샤를 정중히 대했으며 메디나로 돌려보내 군대의 감시하에 있게 했다. 이때 알리가 아이샤를 죽이지 않음이 일종의 불문율이 돼 무슬림은 여성을 죽이지 않는다는 풍습(?)이 생겼다. 이때 군대의 지휘자는 아이샤의 오빠 무함마드 이븐 아비 바크르. 아이샤는 이 이후로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후학을 교육하였지만, 습관은 버리지 못한 탓인지 지나가는 이슬람 신학자를 붙잡고 논쟁하기를 즐겨했으며, 당시에 점점 형성되기 시작하는 이슬람 율법에 무함마드의 본뜻이 조금이라도 진실되게 반영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그후 678년의 65세의 나이로 라마단 첫 달에 조용히 사망했다.
수니파 이슬람 여성들의 롤 모델이자 학자이면서 여성 권력자이자 신자들의 어머니로 지금도 존경받기도 하고, 욕을 먹기도 하며 무함마드를 변태 소아성애자로 모는 데 한몫하고 있기까지 한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다. 무함마드와 더불어 무슬림 앞에서 까면 안 될 인물. 물론 시아파에서는 좋지 않은 취급을 받으며 심지어 무함마드를 독살한 범인이라고 까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