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예고로프
1. 개요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군인. 최종 계급은 원수였다.
2. 일생
2.1. 초기
1901년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했는데, 1905년 장교가 되기 위해 카잔 보병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1905-07년에는 노동자의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캅카스로 파견되었다.
1차대전에도 참전했으며, 용맹을 떨치고 능력을 보여서 대령까지 승진했다. 전쟁 기간 중 5번이나 중상을 입었을 정도였고 두 번이나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왕당파는 아니었는지, 2월 혁명이 벌어지자 좌익 정당 중 하나였던 사회혁명당에 입당했다가,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자 그쪽으로 가담하고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2]
2.2. 적백내전
장교출신이 적었던 붉은 군대에서 제국군 대령 출신이었던 그는 두각을 나타내어 고속 승진했으며, 러시아 내전 당시에는 최고위 야전사령관급이었다. 또한 세묜 부됸니와 매우 친하게 되었다. 이후 붉은 군대 출세코스였던 장제스 정권의 군사고문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이어 당직으로도 계속 승진하였고, 1934년에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까지 올랐다.
1935년에 계급이 부활하자 5명의 원수 중 한명이 되었다.
2.3. 숙청과 최후
1937년부터 대숙청이 벌어졌고, 사실 그는 같이 숙청된 투하쳅스키, 블류헤르와는 달리 스탈린과 친했기 때문에 숙청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결국 체포되었다.
그 이유는 일부 독빠들이 주장하듯이 유능한 원수를 숙청하려는 스탈린의 질투가 아니라 여러 다른 이유가 있었다. 먼저 볼셰비키 참여 이전에 제국군 장교로 캅카스에서 노동자 반란을 진압했던데다가 (볼셰비키는 노동자 정당임을 공언하고 있었다) 10월 혁명 후 레닌에 의해 불법화된 사회혁명당 경력이 문제가 되었고, 게다가 프룬제 아카데미의 교수나 참모부의 고위 장교들이 그의 지휘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NKVD에 체포된 여러 장교들이 고문에 못이겨 상관도 반역행위를 했다고 허위자백을 했는데, 여기에 예고로프가 오른 것도 치명적이었다.
가장 결정적으로 예고로프가 숙청대상이 된 이유는 1930년 회고록 문제다. 레프 트로츠키 숙청 이후에도 트로츠키가 초대 국방인민위원이자 붉은 군대 창설자인 만큼 군부내에는 트로츠키파 잔당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예고로프는 자꾸 스탈린-남러시아파를 공격하는 투하쳅스키와 트로츠키 잔당-우크라이나파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잘못한 일을 적은 회고록을 썼다. 예고로프는 우선 같은 스탈린 파벌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에게 보여줬는데, 보로실로프는 우리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책을 쓰는건 국가통합에 저해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예고로프는 회고록을 출판했고 스탈린에게 바치는 헌사를 썼다. 그리고 대단위 지휘는 못해도 정치적 감각은 있는 보로실로프가 예상했듯 해묵은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당시 스탈린은 때가 아니라 여기고 가만 있었지만 8년 뒤 '불만이 있으면 중앙위에 나와서 공식적인 절차로 제기해야지 마음에 안든다고 멋대로 갈등을 조장하고 분란을 일으켜선 안된다'고 비판했다.#
예고로프는 처형이 아니라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고문 후유증일 가능성이 높다. 계속 목숨을 부지했었으면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처럼 나중에 복권되어 독소전쟁에 투입됐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대숙청 희생자들이 그렇듯이 니키타 흐루쇼프 시절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