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로코솝스키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Рокоссо́вский'''
''' 이름 '''
Konstanty Rokossowski (폴란드어)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1] Рокоссо́вский (러시아어)
Konstantin Konstantinovich Rokossovsky (영어)
''' 출생 '''
1896년 12월 21일,
러시아 제국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 바르샤바
''' 사망 '''
1968년 8월 3일,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복무 '''
제정 러시아군(1914–1917)
소련군(1917–1949, 1956–1968)
폴란드군 (1949–1956)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
''' 주요 입력 '''
폴란드 국방장관
''' 주요 참전 '''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전투
''' 주요 서훈 '''
소비에트연방영웅 2회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2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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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1943년 8월 23일자 타임지 표지.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폴란드 출신 소련군 육군 장군이다. 최종 계급은 원수이다.
독소전쟁의 중요한 전투마다 선봉을 맡아 대활약한 소련맹장이지만 정작 출생지인 폴란드에서는 소련의 앞잡이로 욕을 먹는 비운의 장군이다. 그리고 소련에서도 처음에 폴란드인으로서 차별을 받았다.[2] 그럼에도 전쟁 영웅으로서 사후에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생애



2.1. 성장기


로코솝스키는 폴란드계 러시아인 귀족의 후손이지만 몰락하여 철도 노동자를 하고 있던 아버지 크사베리 보이치에흐 로코소프스키[3](Ksawery Wojciech Rokossowski)와 벨라루스인이었던 어머니 안타니나 아우샨니카바(Антаніна Аўсяннікава)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코솝스키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알려진 기록이 없다. 바르샤바에서 출생했다는 말도 있고 후일 로코솝스키가가 이주한 프스코프주의 벨리키예루키(Великие Луки)에서 출생했다는 말도 있다. 그의 아버지는 1902년, 어머니는 1911년에 세상을 떠나 로코솝스키는 14살이란 어린 나이부터 여동생과 노동을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채석장과 직물 공장 등에서 힘들게 일하던 로코솝스키는 16살에 반정부 시위에 휘말려 투옥 생활도 경험했다.

2.2. 군인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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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부사관 시절의 로코솝스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로코솝스키는 군에 입대, 부사관으로 훈련받은 후 제5기병연대에 입대하여 용맹을 발휘, 4개의 게오르기 십자 훈장을 획득했다(게오르기 주코프의 경력와 비슷하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로코솝스키는 소련 공산당과 신생 소련군에 입대하였고 폴란드인 출신 지원병들을 모집해 소련군에 입대시켰으며,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제30기병사단 소속 연대를 이끌고 백군과 싸웠다. 나무랄 데 없는 활약을 한 로코솝스키는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해 엘리트 장교가 되는 교육을 받았지만 소련군 내에서 암암리에 벌어진 폴란드 출신에 대한 차별 때문에 승진이 더딘 편이었다.
그런데 1922년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터지자 제27기병연대장인 로코솝스키는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참전, 동족인 폴란드인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그의 충성심이 인정되어 로코솝스키는 군부 내에서 입지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다. 1929년에는 중화민국 봉천군벌의 수장인 장쉐량이 소련의 관할이었던 북만주 중국 동부 철도를 회수한 것(중동로 사건)을 계기로 봉소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때 만주 침공군을 지휘한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의 휘하에서 참전하기도 하였다. 이후 제7, 제15기병사단장이 되고 제5기병군단장으로 승진하는 등 군인으로서의 로코솝스키의 미래는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2차 세계 대전 중 라이벌 격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와의 첫 만남은 1930년대 초반 이루어졌다. 이 당시 로코솝스키는 제7사마라(쿠이비셰프) 기병사단장을 맡고 있었고, 주코프는 그 휘하의 여단장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주코프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엄격함. 자신의 욕구에 쉽게 만족하지 않고 집요함. 다소 불손하고 충분히 호감이 가지는 않음. 다소 고집스러움. 자부심에 가득 차 있음. 전문적인 면에서 잘 훈련되어 있음. 지휘관으로서 폭넓은 경험을 갖고 있음."'''

로코솝스키는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주창한 종심 전투 교리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붉은 군대 내의 보수적인 지휘관들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2.3. 대숙청


1937년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군부 내에도 대숙청의 피바람을 몰고 왔고 로코솝스키는 그 피바람에 휘말리고 말았다. 로코솝스키는 주요 숙청 대상인 투하쳅스키와 마찬가지인 폴란드계 소련인이라 의심을 받았고, 매사에 간섭하는 정치장교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켜 당성에 의심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군단장으로 근무하던 로코솝스키에게 난데없이 NKVD 요원들이 나타나 로코솝스키가 폴란드 스파이이며 일본과 폴란드에 기밀 정보를 팔았다는 황당한 명목으로 그를 체포했다. 끌려간 로코솝스키는 NKVD가 내세운 말도 안되는 증거 자료들에 항변했지만 돌아온 것은 끔찍한 고문이었다. 로코솝스키는 9개의 이와 3개의 늑골이 부러지고 시도때도 없이 손가락과 발가락이 '''망치질'''당해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될 지경에까지 이르는 고문을 받았다. 로코솝스키는 이후 맞춤형 구두를 신고서야 절뚝거리며 걸을 수 있었다. 결국 로코솝스키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레닌그라드에 있는 크레스티 형무소에 수감됐다.

2.4. 독소전쟁에서의 활약



2.4.1. 스몰렌스크 공방전


겨울전쟁에서 대숙청으로 인한 유능한 장교의 부족이 붉은 군대에게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 드러나자 1940년에 총참모장으로 임명된 게오르기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숙청되어 수용소에 갇힌 지휘관들을 전선에 복귀시키자고 강력히 주장했고 스탈린은 마지못해 승인했다. 시베리아에서 끔찍한 나날을 보내던 로코솝스키는 이에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를 포함해서 일체의 해명 없이 석방되었고, 크림 반도에서 잠시 요양한 후 스탈린과의 면담 뒤 제9기계화군단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4][5]
1941년,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로 마침내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로코솝스키는 주코프가 지휘하던 서부전선군의 우익인 제16소총군의 사령관이 되어 스몰렌스크를 방어하게 됐다. 이때 스몰렌스크는 독일의 두 명장인 하인츠 구데리안헤르만 호트가 각각 지휘하는 제2기갑집단과 제3기갑집단의 우회 포위 기동으로 포위되어 소련군의 4개 야전군이 사라졌지만 로코솝스키의 16군은 간신히 외곽으로 탈출하여 독일군의 후속 진격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독소전쟁 초기에 소련군이 보여준 몇 안 되는 성공적인 기동이었다.

2.4.2. 모스크바 공방전


모스크바 공방전이 시작되자 로코솝스키는 제16소총군을 이끌고 모스크바 외곽의 클린을 방어해 내는 데 성공했고, 이 덕분에 소련군은 전투를 한결 수월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승리에 고무된 스탈린은 무리한 계획인 동계 공세를 시작했는데 로코솝스키는 르제프 돌출부를 공격, 제1차 르제프 전투로 알려진 대규모 전투에서 르제프 돌출부의 독일 9군과 제4기갑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지만 1월 중순에 해임된 9군 사령관 아돌프 슈트라우스의 후임으로 임명된 발터 모델의 공세적 방어에 패배하고 만다.

2.4.3.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지자 로코솝스키는 돈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독일군에게 패배한 여러 야전군들을 추스르고 볼가 강을 통해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제62소총군에게 보급 물자를 전달했다. 그때 '천왕성 작전'이 시작되자 주코프는 남서 전선군과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이 역포위망을 완성하면 돈 전선군이 포위망을 이어받을 것을 로코솝스키에게 명령했고 로코솝스키는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는데 성공했다. 완벽한 포위망을 구사한 로코솝스키는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고 결국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항복을 직접 받아 명성을 얻었다.

2.4.4.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그러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중부전선군 사령관이 된 로코솝스키는 하르코프에 대한 무리한 공격 계획과 동시에 실행되는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한 공격 계획인 '별 작전'에 참여하게 됐다. 로코솝스키는 너무 공격 일정이 빡빡하다고 불만을 터트렸지만 결국 공격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승리로 이끔에 따라 별 활약도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다행히 포포프 기갑군 같은 궤멸은 면했고 작전이 무리했다는 사실을 스탈린이 인정해 책임은 받지 않게 됐다. 사실 이 작전은 후에 소련군 교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이후 소련군은 공세종말점을 벗어난 무리한 공격은 자제하고 일단 정지했다가 재편성 후 다시 진격하는 식으로 전술을 바꾸게 되었다.[6]

2.4.5. 쿠르스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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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중장 시절
이후 쿠르스크 전투에서 로코솝스키의 중부전선군은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을 맡아 독일 중부집단군과 그 선봉인 발터 모델의 9군과 맞서게 되었다. 상황은 1차 르제프 전투와는 달리 로코솝스키와 모델의 입장은 뒤바뀐 상태였다. 로코솝스키는 결국 모델의 돌파를 막아 내고 9군은 결국 포니리 마을에서 진격을 멈춤으로써 쿠르스크 전투 승리에 일익을 담당했고 쿠르스크 북쪽에서 진행된 쿠투조프 작전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격전으로 인한 피해도 엄청나서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 동안, 독일군 49만 2천 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만 2천 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8만 6,064명,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만 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오룔은 소련군의 손에 재탈환되었으나 9군과 2기갑군은 무사히 퇴각하였고 여기서 소련군의 전략 예비대가 워낙 큰 피해를 입었기에 바실리 소콜롭스키의 서부전선군과 함께 진행한 중부집단군에 대한 공세 작전인 수보로프 작전에서 다시금 모델의 방어에 막혀 고배를 맛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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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바그라티온 작전


로코솝스키는 이후 중부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을 통합한 벨라루스 전선군의 사령관에 취임해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선봉에 서서 민스크를 포위해 9군을 섬멸하고 독일 제4군과 제1기갑군을 괴멸시켜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키고 폴란드바르샤바 목전인 비스와 강까지 진격했으나 이번에도 도중에 중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된 발터 모델의 파쇄 공격에 진격 한계점을 넘어버린 선두 부대가 궤멸당하면서 바르샤바를 눈앞에 두고 소련군은 진격을 멈추어야만 했다.
바그라티온 작전에서의 공로로 로코솝스키는 원수로 승진했다. 이 작전에서 스탈린은 늪지대가 많은 벨라루스에 기갑부대가 들어갔다가 모두 빠져버릴까봐 걱정해서 빠른 진격을 말렸으나, 로코솝스키는 나무로 가교를 만들고 탱크를 움직이는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여 전광석화같은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로코솝스키는 소련군 계획에 맞춰 독일군 전선을 한 개의 돌파구로 뚫으라는 스탈린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했다. 로코솝스키는 두 개의 돌파구가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스탈린은 "가서 다시 생각해보라."고 세 번이나 얘기했지만, 그는 언제나 돌아와서 "스탈린 동지, 두 개의 돌파구가 필요합니다."라는 자신의 의견만 반복했다. 세 번째에 스탈린은 침묵을 지켰지만, 로코솝스키에게 걸어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긴장된 순간 작전실에서는 스탈린이 로코솝스키의 견장을 뜯어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신 스탈린은 '''"타당한 판단이 자네의 자신감을 받쳐주는 거겠지."'''라고 말했고, 로코솝스키의 의견을 따랐다.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로코솝스키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2.4.7. 바르샤바 봉기


그런데 여기서 로코솝스키를 두고두고 구설수에 오르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소련군이 바르샤바 근처까지 진격하자 바르샤바 시민들은 영국에 망명한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시에 따라 바르샤바 봉기로 알려진 대봉기를 일으켜 독일군과 맞섰다. 그러나 폴란드를 공산화해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던 스탈린은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받는 폴란드 망명 정부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로코솝스키에게 바르샤바로의 진격을 멈추고 폴란드 시민군을 도와주지 말 것을 명령했다.[7][8]
로코솝스키가 아마 심한 갈등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는 있지만 결국 로코솝스키는 폴란드 시민들을 '''도와주지 않았고'''[9] 바르샤바 봉기는 2달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후 강 건너편에서 머물고 있던 소련군은 재정비를 완료했고 그제서야 로코솝스키는 진격을 재개하여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2.4.8. 베를린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벨라루스 전선군은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1벨라루스 전선군과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제2벨라루스 전선군으로 갈라졌다. 여기에 이반 코네프가 지휘하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합류해 유럽 전선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던 베를린 전투가 시작되었고, 공격 축선의 북익을 맡은 로코솝스키는 페르디난트 쇠르너의 중부집단군과 고트하르트 하인리치의 비스툴라 집단군을 상대해 다소 지지부진한 진격을 보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제1벨라루스 전선군과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하도록 했고 제2벨라루스 전선군에게는 동프로이센단치히를 제압하고 독일 중부집단군을 붕괴시켜 북부 폴란드와 오데르 강 유역을 점령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이런 명령의 이면에는 폴란드인인 로코솝스키에게 베를린 함락의 영광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어찌됐건 로코솝스키는 명령을 수행해 베를린 함락에 도움을 주었고, 엘베 강으로 진격해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의 영국군과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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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7월 12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조우한 연합군 수뇌부. 오른쪽에 키 큰 소련군 장군이 로코솝스키이다. 가운데 있는 소련군 장군은 게오르기 주코프, 베레모를 쓰고 카메라를 등지고 있는 장군은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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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마를 탄 장군이 로코솝스키, 왼쪽 백마를 탄 장군이 주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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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전 후 승전 기념식에서의 로코솝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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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6월 군 예복을 입은 로코솝스키
스탈린은 로코솝스키를 모스크바에서 열린 승전 기념식에서 주코프의 옆자리에서 말을 타고 사열식을 지휘하게 해 주었다. 대숙청 당시 주코프가 그의 석방에 앞장서고, 개선식에서도 그의 옆에 서게 배려해 준 것을 보면 한때 주코프도 옛 상관이었던 로코솝스키에 대한 호감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 사열식 지휘는 로코솝스키가 인정하는 '''인생 최고의 영광'''이었다.

2.5. 전후: 소련의 대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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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군 원수 당시 사진.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되었는데, 로코솝스키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신생 폴란드 정부의 국방장관이자 폴란드군 원수에 취임했고 뒤이어 내각 수반인 각료의회 의장 자리까지 차지했다. 로코솝스키는 말이 국방장관이지 사실상 소련의 대리인이며 폴란드의 감시자가 된 것이다. 그래도 나름 폴란드군을 모양새 있게 갖추는데는 기여한 모양이다. 로코솝스키뿐만 아니라 소련군에 있던 여러 폴란드계 소련인들이 폴란드군에 들어와서 지휘관이나 부사관을 역임하였다.
로코솝스키는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살아 폴란드어가 무척 어눌한 데다가[10] 폴란드 국민들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바르샤바 봉기에서 로코솝스키가 한 역할 때문에 로코솝스키를 소련의 하수인이자 러시아에서 온 이방인으로 생각하여 싫어하고 불신했다.[11] 이에 로코솝스키는 "러시아에서는 나를 폴란드인이라고 했는데, 폴란드에서는 나를 러시아인이라고 한다."[12]며 나름 씁쓸한 감정을 나타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자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에서는 반소 자유화 운동이 발생하였다. 로코솝스키는 이를 잔인하게 탄압하는데 앞장섰고 비밀경찰, 고문과 강제 수용소를 동원해 소련에 반대하는 수많은 인사들을 잡아들였다. '''이는 로코솝스키 자신이 소련에서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이었다.''' 1956년 포즈난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에는 '''1만 명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를 동원'''해 군중에게 발포까지 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켜 74명의 사상자를 냈다. 로코솝스키의 잔혹한 방법은 큰 비난을 받았고 폴란드 내에서의 로코솝스키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같은 년도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13]가 집권하자 로코솝스키는 해임되어 소련으로 쫓겨났다. 로코솝스키는 흐루쇼프에게 폴란드를 '''무력으로 응징'''할 것을 주장했다. 이쯤 되면 폴란드에 대한 애정은 다 사라졌다고 봐도 될 듯. 흐루쇼프는 로코솝스키의 청을 받아주지 않았고 대신 폴란드의 지도자였던 고무우카와 협상하여 로코솝스키를 다시 폴란드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로코솝스키에게는 폴란드 귀화 이전 소련 직위를 다시 내리며 달랬다.

2.6. 최후


로코솝스키는 이후 소련에서 전쟁 영웅으로 숭상받았다. 국방차관 서리 및 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국방차관으로 역임하는 등 소련 군부의 핵심에 있었으며, 1968년에 사망한 후 우리나라의 현충원이라 할 수 있는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혔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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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학자들은 로코솝스키가 독소전쟁의 분수령에서 항상 선봉을 자처하여 날카롭고 뚝심 있게 승리를 이끌어 낸 전형적인 맹장이자 소련 승리의 큰 공신으로 평가한다. 에르빈 롬멜이나 조지 S. 패튼에 비교되는 인물. 소련군 내에서도 독소전쟁에 활약한 일선 야전 사령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불린다. 군인으로서의 로코솝스키는 흠 잡을 데 없는 인물로 부하들은 그를 정직하며 겸손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은 동유럽 점령지에서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고 평가받는다. 현재도 러시아에서는 로코솝스키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모스크바에는 로코솝스키 거리가 있다.
반면 로코솝스키의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소련의 앞잡이이자 매국노'''로 지금도 온갖 욕을 듣고 있으며 그의 개입 기간을 흑역사 취급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스스로 폴란드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던 그를 폴란드계란 이유로 폴란드에 앉힌 스탈린의 잘못이긴 하다.[14] 민주 정부가 세워진 현재도 그렇지만, 그 전에 1950년대 후반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집권했을 때부터 이미 흑역사 취급을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아이러니...라고 말하기에는 로코솝스키가 폴란드에서 한 짓이 꽤 컸다. 쉬운 말로, 소련의 눈치를 봐야 했던 공산주의 통치자들조차 이 사람을 비난한 것을 보면 그만큼 그가 폴란드에서 한 행동은 폴란드인들 입장에서 용서받을 수 없었다.
로코솝스키의 어머니의 나라인 벨라루스의 경우 대통령인 알략산드르 루카셴카를 포함한 친러 진영에서는 평가가 매우 좋은 반면, 벨라루스 민족주의자로 대표되는 반러 진영에서는 나치 독일을 물리친 업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별개로 친러 진영만큼의 호평은 못 받는 상황이다. 일단 벨라루스가 냉전 시절에 소련의 구성국이었고 벨라루스인들도 나치 독일의 침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만큼 벨라루스의 입장에서도 구국영웅이라고 볼 수 있지만, 말이 다민족국가지 사실상 러시아계 국가로 여겨지는 소련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다는 점에서 반러 성향 벨라루스인들의 입장에서는 대놓고 좋게 평가하기가 껄끄럽기 때문이다. 애초에 로코솝스키 본인은 벨라루스에 대해서도 폴란드만큼 박하게 대하지 않았을 뿐 딱히 애착을 보여준 적이 없었고...

4. 기타


  • 로코솝스키 휘하의 군의관이었던 예프로시냐 그리고리예브나 브레우스는 동프로이센에서 벌어진 한 전투에서 같은 부대에 있던 남편을 잃었다. 전사자들은 거대한 공동묘지에 한데 묻는 게 원칙이었으나 예프로시냐에게는 집은 물론이고 자식, 사진 등 그를 추억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기에, 그녀는 규정을 어기고 남편을 추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써 고향에 그의 무덤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예프로시냐의 이러한 요청은 당연히 무시당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총사령관이었던 로코솝스키를 두 번이나 찾아가서 사정했다. 로코솝스키는 처음에는 전쟁 중에 무슨 헛소리냐며 불허했고 두 번째 만남에서도 그럴 기세였으나, 총사령관님은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느냐는 예프로시냐의 질문을 받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곤 예프로시냐와 그녀의 남편의 시신이 고향으로 갈 수 있도록 자신의 전용기를 내주었다고 한다.[15]
  • 자서전으로 '군인의 의무'가 있다.
  • 폴란드인이면서도 외국의 명장이란 점에서 나폴레옹 밑에서 활약한 포니아토프스키와 비슷하지만 오늘날 폴란드에서 영웅으로 존경받는[16] 포니아토프스키와는 달리 로코솝스키는 바르샤바 봉기의 외면[17]과 폴란드군 원수 시절 반소 봉기의 무력 진압으로 인해 소련의 국익만 생각한 소련인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5. 서훈 목록



[1] 본래 부칭(父稱)은 폴란드어식인 크사베리예비치(Ксаве́рьевич)였지만 1917년에 콘스탄티노비치(Константи́нович)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2] 2차 대전 이전부터 폴란드와 소련은 적국으로 유명한 사이였고, 폴란드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소련 영토를 많이 빼앗았다. 이로 인해 폴란드계 소련인들은 엄청난 차별을 받게 된다. 유명한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도 나치 독일 및 폴란드 간첩이라는 조작된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폴란드가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폴란드계에 대한 차별은 없어진 듯하다.[3] 국립국어원의 러시아어 표기법을 따르면 '로코솝스키'지만, 폴란드어 표기법을 따르면 '로코소프스키'이다.[4] 이때 석방 통지서에 유무죄 여부의 언급이 전혀 없었던 탓에 한때 로코솝스키가 사형수 신분으로 석방되었다는 루머가 꾸준히 돌았으나 사실은 다르다. 비슷한 방식으로 석방/복직된 지휘관이 꽤 많았으며, 이는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의 졸전과 함께 나치 독일과의 개전 가능성이 조금씩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경험 있는 지휘관의 숫자가 부족하다는 점이 부각된 결과였다. 로코솝스키만 특혜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단지 장성급 숙청 대상자로서 복직된 사람들 중 가장 큰 활약을 했기 때문에 주목을 끌었을 뿐이다.[5] 로코솝스키는 주코프와의 인맥도 있었고 여러모로 운도 좋았다. 주코프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지 못했다가 개전직후 이송되지 못하고 집단처형당한 장성들도 많다. 연방영웅 칭호를 2번이나 받고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공군을 지휘했던 스무쉬케비치 공군소장조차도 독소전쟁 개전 2주전 체포되어 재판과 증거 없이 4개월 후 총살당하기도 했다.[6] 그 이전까지는 소련군에게 공세종말점이란 개념이 희박했다. 소련군은 큰 틀을 짜놓으면 세부적인 전술 차원에서 작전목표를 정하고 움직이기보단, T-34를 위시한 소련 기갑부대의 특출난 기동성을 바탕으로 전략적 차원의 목표를 보고 진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 지휘관은 정말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진격을 멈출 수 없었다. 당시 소련군 교리는 한번 공세를 개시하면 맨 앞에서 선봉으로 진격하던 부대가 재편성이 필요한 경우, 그 부대는 재편성을 위해 놔두고 뒤따라오던 후속부대들이 계속 진격한다. 그리고 그 후속부대가 재편성이 필요하면 그 뒤에 따라오는 부대가 진격을 속행하는 식으로 한순간의 지체없이 목표지점까지 최대한 단시간에 도달할 수 있도록 전법을 수립해놓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조달이나 보급선 유지는 오로지 해당 지휘관의 몫이었으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군법회의에 회부될 수도 있었다.'''[7] 이와 관련해서, 실제로 소련군 스스로도 바르샤바까지 진격할 여력이 소진되었고, 독일군의 방어 역시 맹렬해졌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로코솝스키가 돕고 싶었고 스탈린 역시 돕고 싶었다 해도 도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고립된 폴란드 봉기군에 대한 공수보급 및 항공 지원 문제에 있어서는 소련의 비협조가 두드러졌으므로 '''그다지 돕고 싶지 않았던 것'''까지 부정하기는 어렵다.[8] 다만 최근에는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에서의 극심한 인적, 물적 소모로 인하여 이 시점에서는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여, 도와주고 싶었어도 지상에서의 적극적인 작전은 무리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중론이다.[9] 아주 돕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자기 휘하에 있던 공산당계 폴란드 인민군 4개 사단을 바르샤바 포위망 돌파에 투입했다. 독일군에게 처절하게 털리고 쫓겨나서 그렇지만. 참고로 폴란드 공산당에서는 포위망 돌파에 실패했다고 사단장들을 해임시켰다고...[10] 폴란드어러시아어외국어치고는 슬라브어파로 꽤 가까운 편이라서 서로 60-70%는 통한다. 그런데도 로코솝스키는 폴란드를 떠날 때까지 공개 석상에서도 폴란드어로 연설하기 힘들어서 러시아어를 썼다고 한다. 이렇게 이 사람은 폴란드인이라는 생각을 스스로도 전혀 하지 않았다.[11] 사실 카틴 학살과 바르샤바에서 한 짓을 생각하면 로코솝스키 본인이나,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의 "소련 앞잡이"들은 폴란드 민중 입장에서 불신 정도가 아니라 때려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12] 원문은 다음과 같다. "Ot, Cymbarewicz, ironia losu, w Rosji ja był Polakiem, a w Polsce Ruskim(이봐, 침바레비치, 운명의 아이러니야. 러시아에서 나는 폴란드인이었는데, 폴란드에서는 러시아인이라고)." 1956년에 폴란드를 떠나면서 이 말을 남겼다. 프란치셰크 침바레비치(Franciszek Cymbarewicz)는 로코솝스키처럼 소련군에서 복무하다가 폴란드 인민군으로 발령받은 케이스인데, 로코솝스키와 달리 그는 끝까지 폴란드에 남았고 2000년 5월 27일 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13] 정작 이 사람도 나중에 어영부영한 정책 집행으로 인민들에게 실망감을 주어 1970년 노동자 투쟁 때 책임을 지고 사실상 지도자 자리에서 쫓겨났다.[14] 차라리 폴란드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을 이용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로코솝스키와 달리 폴란드인으로서의 자각이 강하면서도 소련의 입장에서 그다지 크게 거슬리지 않는 같은 공산주의자니까.[15] 출처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400~402p[16] 포니아토프스키나폴레옹 밑에 들어간 것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로 인해 갈라져 점령되어 버린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였다.[17] 소련군의 전력 소진이라는 나름의 사정도 있었고 인민군 4개 사단을 보냈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도와주진 않은 것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