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묜 부됸니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 '''
'''Семён Миха́йлович Будённый '''

'''이름'''
러시아어 : Семён Миха́йлович Будённый
영어 : Semyon Mikhailovich Budyonny
한국어 :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
'''출생'''
1883년 4월 25일, 러시아 제국
'''사망'''
1973년 10월 26일, 소련 모스크바
'''복무'''
러시아 제국군(1903년 ~ 1917년)
소련군(1922년 ~ 1973년)
'''최종 계급'''
육군 원수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독소전쟁
'''주요 서훈'''
소비에트연방영웅 3회
레닌훈장 8회
1. 개요
2. 이름 표기
3. 생애
3.1. 젊은 시절
3.3. 전간기
3.4. 키예프에서의 실책
4. 평가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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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 내전, 독소전쟁까지 활약한 소련군 군인이다. 초기 소련군의 대표적인 보수파로 알려져 있으며 독소전쟁 초반에 남부전선군 사령관을 맡았다가 키예프 포위전에서 대패하였다.

2. 이름 표기


모음 약화가 반영된 러시아어 발음은 '[sʲɪˈmʲɵn mʲɪˈxajləvʲɪt͡ɕ bʊˈdʲɵnːɨj\](시묜 미하일러비치 부됸느이)'에 가까우며, 국립국어원러시아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이다. ([ɯj\], [ɰi\])는 현대 한국어에서 발음이 불안정해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채택되지 않으며, 어미의 겹모음 'ый'를 장모음 취급하여 '이'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어의 ё[jɵ\]는 부호가 생략된 е로 쓰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에'로 옮겨 부데니로 잘못 표기하기도 하였다.

3. 생애



3.1. 젊은 시절


기마 민족인 카자크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진짜 카자크는 아니고 그냥 카자크 마을에서 자랐다고 한다. 스무 살 때까지는 농부로 일했지만, 을 굉장히 좋아해 잘 부리고 잘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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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적기훈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닌 듯하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에 징집되어 기병으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군에 남아 있었고, 1907년에는 뛰어난 기마술 덕분에 병사에서 부사관으로 올라갔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기병학교를 졸업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는 정예 용기병 연대상사였으며, 서부전선[1]에서 카자크들로 이뤄진 기병을 이끌고 독일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 이후 캅카스 전선에 파견되어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도 용맹을 보여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용맹했을 뿐만 아니라 인품도 훌륭해서 병사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런데 병사에게 가혹행위를 하던 선임 부사관과 언쟁을 벌이다가 화를 못 참아 병사들 앞에서 싸웠고, 이후 상관에게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 병사들은 부됸니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지만 부됸니는 결국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부됸니에 대한 징계는 이 훈장 박탈로 끝났고, 상관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군법회의에 회부하지는 않았다.
이후의 전투에서도 용맹을 떨쳐 다시 성 게오르기 훈장을 급수별(1~4급)로 4개 더 받았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러시아군은 독일군에게 연패해 거의 그로기 상태였고, 결국 지휘 계통이 무너지자 병사들은 스스로 소비에트(평의회)를 구성하고 투표로 지휘관을 선임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던 그는 당장 지휘관에 선임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좌경화되어 공산주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9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으며 이 때 스탈린, 보로실로프와 친구가 되었는데, 이것이 훗날 정치적 출세와 보신의 지름길이 되었다.

3.2. 러시아 내전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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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크 기병 삘이 나는 사진. 붉은 군대 초창기 때 촬영된 모습이다. 오른쪽부터 보로실로프, 부됸니, 티모셴코.
부됸니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새롭게 구성된 붉은 군대에 가담하여 제1기병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곧 내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이 때 폴란드가 막장크리를 타고 있던 러시아를 쳐서 영토를 넓히려고 침공하자, 부됸니의 부대는 이에 맞서 싸웠다. 부됸니는 처음에는 승기를 타고 폴란드군을 격파하면서 폴란드 영내까지 진입했지만, 크라쿠프에서 대패하고[2] 다시 소련 영내로 후퇴하였다. 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대체로 기병으로 승부가 갈렸으며, 이 때문에 양국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기병에 집착하게 되는 나쁜 영향을 끼쳤다. 부됸니도 소련이 공업화를 이루고[3] 전차를 생산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도 기병을 고집하며 투하쳅스키의 군 기계화를 강하게 반대했다.
어쨌든 부됸니가 이끄는 붉은 군대 제1기병군의 명성은 당시 신화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하일 숄로호프가 쓴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소설 '고요한 돈강'에도 잘 묘사된다. 그리고 부됸니를 우상화하는 군가들이 작곡되기도 했고, 붉은 군대가 쓰던 뾰족모자는 그의 이름이 붙어 부됸노프카라고 불렸다.

3.3. 전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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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병영에서.
내전이 끝나자 부됸니는 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을 시작으로 여러 군관구들의 사령관을 역임했다. 기병 전문가답게 그는 기병에 관련된 여러가지 장비나 말의 종자 개선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1924년부터는 기병총감을 맡아서 전반적인 기병을 감독하였다. 이렇게 기병에 큰 공을 들이는건 좋았는데, 문제는 기병이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붉은 군대에는 기병 대신 기갑부대가 전장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기계화를 추진한 선견적인 이론가들이 많았지만 부됸니는 이를 크게 반대해 수시로 제동을 걸었고 결국 소련군 현대화의 장애물이 되었다.
1935년 붉은 군대에 다시 계급제도가 도입되자 부됸니는 보로실로프, 투하쳅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와 함께 소련 원수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들 중 투하쳅스키와 예고로프, 블류헤르는 1937~1938년의 대숙청 기간 중 처형되었고, 부됸니와 보로실로프만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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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 11일 촬영.
사실 부됸니도 대숙청을 총지휘했던 NKVD 부장 니콜라이 예조프의 마수에 걸려 숙청 대상에 올랐지만 NKVD 요원들이 사무실을 덮치자 이들과 '''완력으로 맞섰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그리고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잽싸게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스탈린이 '''"아, 그건 오해다."'''라며 간단히 그 자리에서 혐의를 풀어줘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3.4. 키예프에서의 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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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예복을 입은 사진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독일 남부집단군에 맞서는 소련 남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세 군데에서 독소의 '원수 대 원수의 빅매치'가 펼쳐졌는데, 북부에서는 '''레프 대 보로실로프''', 중부에서는 '''보크 대 티모셴코''', 남부에서는 '''룬트슈테트 대 부됸니'''였다.
부됸니는 남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의 상급제대인 남서방면군을 지휘하였는데, 두 전선군 가운데서 가장 독일군을 상대로 선전한 남서전선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독일군 남부집단군의 전진 속도를 늦추는 등 대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부됸니가 잘 했다기 보다는 남서전선군의 사령관이었던 키르포노스가 정열적이고 공격적으로 지휘한 것과 키예프 군관구 전임 사령관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가 독일군의 침공을 내다보고 엄격한 훈련으로 좋은 부대를 많이 양성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독일 남부집단군은 계속 전진하면서도 다른 집단군들에 비해 큰 피해를 입었고, 룬트슈테트는 이후 이 때의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다.
히틀러는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 보다는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스크바보다도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키예프를 먼저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모스크바를 목전에 두고 있던 중부집단군의 전진을 정지시키고 산하 부대의 일부를 남부집단군에 보냈다. 여기에 대해서 전후에 살아남은 독일군 장군들은 히틀러의 오판이라고 주장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만약 그렇게 전진했을 경우 독일군의 우측면이 소련군의 남부집단군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지적하며, 특히 데이비드 글랜츠는 자신의 스몰렌스크 전투 2부작에서 중부집단군이 옐냐 전투와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곤경에 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앙 러시아에서 공세를 중지하고 대신 측방을 무너뜨려서 모스크바 공세의 기반을 다진 히틀러의 판단에 손을 들어주고 구데리안보크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1941년 9월 독일 육군 사령부는 기동의 대가인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을 중부집단군에서 빼내 남부집단군으로 임시 전속시켰고,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집단과 큰 반원을 그리며 키예프를 포위하도록 했다. 부됸니는 비록 현대전에는 무지했으나 전황추이와 적 진격의 속도를 보고 기민한 판단력으로 포위의 위험을 알아차려 스탈린에게 철수를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전선 유지에 집착하여 이를 거부하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개전 후 상급 지휘관들 목이 십수개씩 날아간 상황이라 부됸니가 이 명령을 거부하거나 따질 정치적 상황은 못 되었고, 결국 독일 기갑군의 고속기동에 손을 놓아야 했다. 당시 소련군의 병력이 60만이었고, 독일군이 50만이었음을 감안하면 더 많은 병력에도 당한 어처구니 없는 경우였다.
부됸니는 포위되어 절망적인 상황이 되자 9월 13일 스탈린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전화를 걸었고 스탈린은 화를 내면서 그를 파면했다. 부됸니는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도망쳤고, 뒤에 남겨진 부대는 남서전선군 사령관 미하일 키르포노스 상장이 지휘했다. 하지만 키르포노스는 포위망을 뚫고 부대를 탈출시키려다가 9월 20일 전사했고,[4] 이후 남겨진 부대는 지휘관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독일군에게 섬멸당해 60만의 포로를 남기며 대패했다.
스탈린은 당시 민스크 근방에서 비슷한 규모의 패배를 당한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총살형에 처한 것과 달리 이 옛 친구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됸니는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썼으며 다시는 제1선에 나서는 일이 없었다.

1966년 군복 예장 촬영 때.
이후 부됸니는 남은 전쟁 기간을 후방에서 상징적인 직위만 가지고 보내다가 종전을 맞았다. 이후 농업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고, 이 때도 새로운 말의 종자 개선에 큰 힘을 쏟았다. 꽤 장수하여 90살까지 살았고, 다섯 권이나 되는 회고록을 남겼다. 회고록의 대부분은 러시아 내전을 다루고 있다.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3번이나 수훈했지만 3번 다 종전 이후 수훈했다. 2차대전 당시야 그렇다 치더라도, 어쨌든 이 시기 정도 가면 기껏해야 동네 먹물들이 빼돌린 총폭탄 몇개 들고 일어난 걸로 시작하여 세계를 양분하는 붉은 군대의 살아 있는 역사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큰 명예와 함께 살아 있는 군사사 박물관으로 대접받았다. 물론 '''명예만''' 많았다는 점은 일단 제껴두고.

4. 평가


보로실로프와 함께 근대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스탈린과의 친분만으로 승진한 무능한 소련군 수뇌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키예프에서의 일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덮을 수가 없는 사례. 대표적인 표현이 바로 '''"말 엉덩이만 아는 사람"'''. 그나마 보로실로프에 비하면 무척 나은 편으로, 보로실로프는 아예 '아무 쓸모도 없는 자'라고 까였다. 그리고 부됸니 입장에서는 사실 이런 비교 자체가 억울한게, '''기병이라는 자신의 전공 분야 안에서는 부됸니는 확실히 세계구급의 전문가였다'''. 군사적 능력은 아무 것도 없었던 보로실로프와 달리 부됸니는 원래 자기 위치 안에서는 밥값을 확실하게 하면서 성장한 인물이고, 그의 비극은 기병이라는 그 전공 분야 자체가 도태되었던 것인데 이건 그걸 알면서도 그를 중용한 스탈린의 책임이다. 키예프에서의 패배도, 후퇴도 부대 이동도 인정 않고 현지 사수만 명령한 스탈린의 잘못이 크다. 유능한 기병장교인 세묜 부됸니가 우회기동의 무서움을 모를 리도 없다. 그게 기갑이 생기기 전부터 기병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는 전차가 기병보다 속도가 빠르다는것을 간파하고 있었고 부대가 포위섬멸당하기 전에 군대를 철수시키려 했으나 스탈린의 대숙청 때문에 그것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일설에 따르면 스탈린도 사실 상술한 사정도 있고,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무엇보다 대숙청 이후 당이나 나라 전반으로 그렇지만 무엇보다 붉은 군대 내에 막상 소련 초기 혁명기부터 전공을 쌓아 올려 군의 전통과 역사를 상징할만한 인물이 마땅히 없어서 실책에도 불구하고 부됸니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게다가 러시아 내전에서 세운 전공으로써 소련을 건국하는 큰 기여가 어디 간 것도 아니므로 부됸니는 이런 큰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소련의 국가적 영웅으로 남아 있었다.[5] [6]운동선수라고 치면 전형적인 국내용.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3회 수훈했지만 3회 모두 보로실로프처럼 스탈린 사후 수여받은 것이다.
후배 원수이자, 실질적으로 독소전쟁의 승리를 이끈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의 회고록에서 부됸니에 대한 평가는 대개 부정적이다. 그래도 코네프는 부됸니가 전혀 발전이 없었다고 완전 혹평을 한데 반해서, 주코프는 그래도 그의 근무 태도나 성실성에는 후한 점수를 줬다. 용맹함이나 지휘력, 가혹행위가 극심했던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었음에도 혁명 이후 휘하 병사들의 지지를 얻어 지휘관에 올라간 인망도 그렇고... 군인으로서 자질은 훌륭했지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군인이라 볼 수 있다.

5. 기타


말에 대한 품종개량 자체도 굉장히 힘을 썼던 사람으로, 러시아에는 아예 부됸니라는 품종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고른 성질에 높은 지구력을 가지고 있다보니, 러시아에서는 의장용 혹은 축제 등지에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말이다. 심지어 해외에 수출까지 한다. 적어도 자기 분야 안에서는 확실한 전문가 맞았다는 반증이다. 의외로 인간적인 면모도 풍부했는지 아코디언 연주에도 실력이 있어 전문 음악가인 그리고리 자이체프라 하는 친구와 함께 듀오 음반까지 내기도 했다.[7] 상술한 각주에 소개된 부됸니 지휘하 적군 제1 기병여단을 기반으로한 적백내전 당시 적군 미화 소설인 붉은 기병에선 술과 음악을 좋아하고 목소리가 크며, 술취해 홧김에 반유대주의적인 폭언을 하면서도 누군가 반유대주의는 부르주아적 반동 차별의식이라 지적하면[8] 정색하며 사과, 자아비판하는 전형적인 거치면서도 호쾌한 러시아, 카자크 남아쯤으로 묘사된다.
혼인을 3회 했다. 첫째 부인(글자를 모르는 농사꾼의 딸)은 러시아 내전 직후의 뒤숭숭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고, 집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둘째 부인(아주 드센 노동자의 딸)은 가극단에서 성악가로서 활동했는데, 1937년에 동료 성악가의 집에서 불륜 관계를 맺은 채로 니콜라이 예조프가 다스리는 내무인민위원회에 체포되었다. 결국 두번째 부인과는 이혼했으며, 그녀는 굴라크에서 20년간 삽질하면서 무뢰배들에게 윤간을 당했다. 셋째 부인(둘째 부인의 가까운 친척)은 둘째 부인의 어머니의 소개로 혼인했다. '''셋째 부인은 온순한 주부로서 평생을 살았고, 부부는 평온한 가정을 꾸렸다'''. 셋째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한때 맞벌이를 고려했지만, 남편의 만류로 육아에 전념한 덕택에 스탈린의 호감을 얻었으며, 그녀의 남편이 관직을 퇴임할 경우에 대비해 개인이 소유하는 별장을 미리 마련한 덕택에 부부가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 딸인 니나 부됸나야는 훗날 언론인 겸 예술가가 되었는데 구글에 Nina Budyonnaya라 이미지 검색하여 나오는 작품들을 보면 아버지의 농촌 성향은 딸의 예술관에도 그대로 반영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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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집안 할아버지들이 그렇듯이 손주들에게는 따뜻한 할아버지. 1965년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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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의 사진. 저 멋진 콧수염은 내전 시기부터 그의 대표적인 트레이드마크였다.

[1] 독일에게는 동부전선[2] 코마루프(Komarow) 전투. 사실 이 전투는 부됸니 입장에서는 흑역사급 전투이다. 소련군 '''1만 7,500명'''과 폴란드군 '''1천 7백명'''이 싸워서 소련군이 '''전사자 4천을 내고 대패'''했다, 그나마 폴란드군 숫자가 워낙 적어서 전멸은 피했으니 다행.[3] 그나마 이것도 러시아 내전 이후 자본주의 국가에 포위되어 있다는 소련의 공포심이 낳은 결과였다. 당시 소련은 경공업이고 농업이고 싸그리 팽개치고 중공업에 모든 능력을 몰빵했고, 그 결과는 소련 중공업의 기형적인 발전과 홀로도모르라는 대참사였다.[4] 포로가 될 것을 우려해 자살했다는 설도 있으며, 독소전쟁에서 전사한 소련 장성들 중 한 사람이다. 다른 장성급 전사자로는 1944년에 우크라이나 반소 게릴라에게 저격당한 니콜라이 바투틴 대장과 1945년에 독일군을 추격하다가 전사한 이반 체르냐홉스키 대장이 있다.[5] 투하체프스키, 블뤼헤르 같은 모가지 날라간 다른 원수급 장성들은 혁명 열사 아니냐 따질수 있겠지만 투하체프스키는 20-30년대 부터 '우파', 즉 소련 자기네 기준으로 지나치게 비정치적인 사람이라 의심받았고, 예고로프는 애초에 대숙청의 집중 타겟중 하나인 전직 비-볼셰비키 경쟁 당파인 사회혁명당 출신, 중국 등지에서 군사고문으로 명성을 쌓은 블뤼헤르는 역시 대숙청의 주된 타겟 중 하나인 해외파였다. 즉 스탈린 기준에서 죽일놈들 다 죽이고 정신 차려보니 띄워줄만한 고참 볼셰비키 원수란 부됸니밖에 없었고, 안그래도 부됸니는 이런 명예와 간판 밸류만 높은 이런 자리에 딱 맞게 일단 소설가 아이작 바벨의 붉은 기병 같은 혁명기를 다룬 각종 소설, 연극, 선전물을 통해 이름이 알려진 '''낭만적인 기병대 장교 출신''' 유명 인사였다. 특유의 지형적 여건 때문에 중세부터 전쟁은 자고로 말타고 하는 것이었던 동유럽에서 카자크 기병이 가진 문화적 의미는 매우 크다.[6] 역설적으로 러시아 내전 당시 부됸니 지휘 아래 적군 기병대에 복무한 경험을 소설 붉은 기병에 써내 부됸니 우상화에 큰 공헌을 한 소설가 이사크 바벨은 전직 상관이자 주인공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과 달리 결국 대숙청을 못 살아남고 39년에 총살당했다(...)[7] https://www.discogs.com/artist/4327700[8] 적백내전 당시 백군이나 적군이나 대규모 징집을 하면서 종종 러시아와 동유럽 민간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적 의식이 유대인에 대한 약탈과 살해 등으로 표출되었다. 이런 와중 적군은 그래도 이념이 이념이니 공식적인 차원에선 반유대주의를 퇴폐적 반동적 인종주의라 비판하며 억제하려고 했던 반면, 백군은 아예 노골적으로 공산혁명 자체를 유대인들이 일으킨 반기독교적 음모로 선전하며 공식적으로 밀었고, 당시 러시아 백군의 반유대주의+반공주의 콤비 사상은 오래 지나지 않아 전간기 유럽의 파시스트와 극우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