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스 카터

 



'''1999년 NBA 올해의 신인상'''
팀 던컨

'''빈스 카터'''

엘튼 브랜드
'''2016년 NBA 올해의 팀메이트상'''
팀 던컨

'''빈스 카터'''

디르크 노비츠키
'''2020년 NBA 스포츠맨십 어워드'''
마이크 콘리

'''빈스 카터'''

2021년
'''2000년 NBA 슬램덩크 컨테스트 우승자'''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음[1]

'''빈스 카터'''

데스몬드 메이슨
[image]
'''이름'''
'''빈센트 라마 카터
(Vincent Lamar Carter)'''
'''생년월일'''
1977년 1월 26일 (47세)[2]
'''출신지'''
플로리다 주 데이토나 비치
'''신장'''
198cm (6' 6")[3]
'''체중'''
100kg (220 lbs)
'''포지션'''
슈팅 가드,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1998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지명'''
'''역대 소속팀'''
'''토론토 랩터스 (1998~2004)'''
'''뉴저지 네츠 (2004~2009)'''
올랜도 매직 (2009~2010)
피닉스 선즈 (2010~2011)
댈러스 매버릭스 (2011~2014)
멤피스 그리즐리스 (2014~2017)
새크라멘토 킹스 (2017~2018)
애틀랜타 호크스 (2018~2020)
'''등번호'''
15번
25번(피닉스, 댈러스 시절)
'''수상내역'''
'''NBA 올해의 신인상 (1999)'''
NBA 올스타 8회 (2000-2007)
'''올-NBA 세컨드 팀 (2001)'''
올-NBA 서드 팀 (2000)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99)
NBA 슬램덩크 콘테스트 챔피언 (2000)
NBA 올해의 팀메이트상 (2016)
NBA 스포츠맨십 어워드 (2020)
2000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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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IR CANADA '''
전 NBA 농구 선수. 덩크 슛의 달인으로 공중에서 예술을 했던 사나이. NBA 역사상 최고의 덩커 중 한명이다. 한때 '''포스트 조던''' 에 가장 근접한 선수'''였다.''' 별명은 토론토 시절에 '''에어 캐나다''' 그 외에는 '''Vinsanity''', '''Half-Man/Half-Amazing'''[4] 등이 있다. 2019-2020 시즌 NBA 역사상 처음으로 22번째 시즌을 맞았다. 2020년 1월 5일 경기에 출전하면서 NBA 역사상 처음으로 10년대를 4번(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맞이한 선수가 됐다. 1980년생인 자말 크로포드와 더불어 NBA 최고참이자 90,00,10,20년대 NBA 무대를 밟은 레전드.

2. 선수 경력



2.1.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image]
1995년, 맥도날드 올 아메리칸에 선정되는 등 고교시절에도 촉망받는 유망주였던 빈스 카터는 많은 대학에 러브콜을 받았다. 그중 카터는 마이클 조던이 다녔던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같이 입학한 선수로는 앤트완 재미슨도 있었다.
대학시절 견실한 활약과 또한 그때도 주체할수 없었던 엄청난 운동능력과 점프력으로 뽑아내는 덩크는 일품이었다. 그리고 프로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수비력도 대학에서 어느정도 인정 받았었다. 다만 동료였던 앤트완 재미슨이 대학시절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쓴 전미 최고의 대학선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는 저평가 받았었다.
주전으로 2시즌 활약하면서 2년 연속 파이널 4를 경험한 빈스 카터는 앤트완 재미슨과 함께 1998년 NBA 드래프트 참가신청을 했고 전체 5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된다. 하지만 바로 앞에 앤트완 재미슨을 4순위로 지명한 토론토 랩터스와 워리어스가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면서 카터는 토론토에 입단하게 된다[5].

2.2. 토론토 랩터스


[image][6]
대학시절에는 앤트완 재미슨에게 가려졌지만 프로 첫 시즌만큼은 달랐다. 비록 단축시즌으로 치러진 시즌이었지만 카터는 공중을 날아다니면서 팬들을 매료시켰다. 토론토 팬들은 경기장을 찾기 시작했고, 카터 덕분에 관중석은 언제나 매진이었다. 오죽했으면 방송사가 예정에도 없던 토론토 랩터스의 경기를 추가 편성했을 정도였다. 토론토는 '''캐나다'''다. 아이스하키 NHL과 직접적으로 시즌이 겹치고 거기다 파업 직후라는 악재가 터진 NBA의 캐나다 팀이다. 그런 안 좋은 사정의 토론토 랩터스를 끌어올린 것은 빈스 카터의 미칠듯한 쇼타임 덩크쇼였다.
토론토 팬들은 카터에게 애정과 환호를 보내주었고, 그에게 '''에어 캐나다'''라는 멋들어진 별명을 붙여주었다.[7] 언론도 '포스트 조던'으로 그를 지목하면서 열심히 설레발을 쳤다. 1998-99시즌 올해의 신인상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1999-2000 시즌. 처음으로 풀타임 시즌을 소화하는 첫 시즌에 카터는 대부분의 기록에서 상승세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3점슛을 장착하면서, 내외곽에서 도저히 막을수 없는 언터쳐블한 선수가 돼버린 것이다.

카터는 2년차 시즌만에 올스타전에 동부팀 주전으로 선발되었고 바로 그해 슬램덩크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올스타전만 하더라도 쟁쟁한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최다득표로 선발되었다. 그의 당시 인기가 어느정도였는지 알수 있는 대목. '''무엇보다도 슬램덩크 콘테스트를 부활시킨 장본인이었다.''' NBA가 얼마나 카터를 밀어주었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더 이상의 새로운 덩크는 앞으로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몇몇 이들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카터는 부활한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전대미문의 덩크를 연이어 선보이면서''' 우승했다.
이때 슬램덩크는 88년 조던vs윌킨스, 2016년 에런 고든 vs 잭 라빈 등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콘테스트로 유명한데, 특이한 점은 다른 콘테스트와 달리 여기선 카터가 독보적이었다는 것.
그는 처음 나오자마자 360도 역회전 윈드밀을 했고, 해설 겸 심판이었던 케니 스미스는 10점 만점을 주며 "집에 갑시다! 집에 가자구요! 신사 숙녀 여러분!(Let's go home! Let's go home ladies and gentlemen!)"을 연이어 외쳤다. 어차피 우승은 카터로 끝났다는 소리. 당연히 첫 덩크는 50점 만점을 받았다. 두번째 덩크로는 베이스라인 밖에서 뛰어 들어오다 윈드밀을 성공시켰는데 49점이 나왔다. 스미스가 "엄청난 덩크였지만 첫 덩크만큼은 뛰어나진 않았다"면서 9점을 준 것. 이후 결승진출을 확정지은 상황에서 카터는 예선 세번째 덩크를 하기 전에 스미스에게 "더 이상 낮은 점수 주지 마요(No more low scores)"라고 장난스럽게 당부한 뒤 카터의 역대 최고 덩크 중 하나로 꼽히는 1. 동료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공을 튕겨서 앨리웁 패스를 준 걸 2. 공중에서 받아 다리사이로 돌린 다음[8] 덩크,를 선보인다. 당연히 경기장은 뒤집어졌다. 2차 덩크에서 9점을 줬던 케니 스미스 역시 이 덩크를 보자마자 "다 끝났네요! 다 끝났어요!(It's over! It's over!)"라는 멘트와 함께 10점을 준 건 덤. 이후 결승에서 허니딥(덩크하면서 팔꿈치까지 림 안에 넣는 것), 자유투라인 반발짝 앞에서 투핸드 덩크를 선보이며 우승을 확정지었는데, 결승까지 가면 관중들이 대놓고 카터에게 주목하며 카터 원맨쇼가 되었다.[9] 놀라운 것은 결승상대 스티브 프랜시스나 그의 동료 티맥 역시 놀라운 덩크를 선보였다는 것이다. 프랜시스는 측정치로만[10] 110cm가 넘는 점프력을 선보이며 놀라운 덩크를 보였고, 그와 티맥 모두 다른 해였다면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덩크를 선보였다.
사실 2019년 기준으로 난이도 자체만 보면 카터의 덩크를 재현할 선수들이 제법 있다. 순수하게 난이도로 보면 라빈이나 고든 등이 더 높기도 하고. 그러나 카터는 당시 기준으로 상상도 못할 수준의 덩크를 선보였었고, 97년까지 점점 허접해지던 덩콘에 익숙해진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 난이도를 떠나 카터의 덩크는 특유의 멋이 있었다. 난이도만 따지면 조던, 윌킨스의 덩크가 현재도 명품 취급받으며 주목받을 이유가 없다. 조던의 유연함과 공중동작, 윌킨스의 순수한 파워와 박력과 대비되는 카터의 긴팔을 이용한 윈드밀 궤적, 파워, 덩크찍는 순간의 임팩트, 공중동작 등이 그의 덩크를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명품덩크로 만든 것. 이 때문에 보통 미국에서 역대 덩커 4인방으로 꼽히는 조던, 윌킨스, 줄리어스 어빙, 카터 중에서 카터가 다른 이들보다 더 높게 평가받고, 조던이나 닥터J 등 클래식한 덩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카터는 인정하는 편.
토론토는 빈스 카터의 활약을 앞세워 1999-00시즌에 팀 창단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발을 들였다. 비록 3게임만에 광속으로 탈락했고, 빈스카터 역시 정규시즌보다 거친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고전했지만, 팬들은 카터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카터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비록 기존의 드림팀에 비해 2000년도의 드림팀4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경기도 많았으나, 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카터는 팀내 최다득점을 올리며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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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프랑스팀의 센터 프레드릭 와이즈(키 218cm)를 뛰어넘어 슬램덩크를 작렬해 전 세계 농구팬들을 경악시켰다. 그때 같이 국가대표팀에 뛰었던 제이슨 키드는 "내가 본 플레이중 가장 최고." 라고 극찬했고, 프랑스 언론은 이를 두고 '''le dunk de la mort 즉 죽음의 덩크''' 라고 표현했다.
후에 대한민국을 방문했을때 인터뷰 중 이 일을 언급했는데, 어떻게 저런 덩크를 했냐는 질문에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당시에는 너무 정신이 없었다. 정말 어쩌다가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나중에 195cm 정도 되는 선수를 세워놓고 다시 시도해봤는데 실패했다. 나중에 다시 하라고 하면 아마 못할것." 이라고 밝혔다.
2000-2001 시즌에는 팀을 컨퍼런스 세미파이널까지 올리면서 더욱더 인기가 치솟았다. 이 성적은 토론토가 2015-2016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기 전까지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성적 중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상대는 당시 동부최강 필라델피아였고, 그곳의 에이스는 앨런 아이버슨이었다. 둘은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 아이버슨의 경우 악동의 이미지가 좀 있었는데 반해 빈스 카터는 깨끗한 이미지의 스타였다. 이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대 접전이었다.
하지만 7차전을 앞두고 카터는 병크를 하나 터트렸는데, 7차전 당일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졸업식이 있었다. 카터는 이 졸업식에 가고 싶어했는데, 당시 반응은 '''지금 팀이 컨퍼런스 결승에 가느냐 못가느냐 갈림길에 놓여있는데 제정신인가''' 였으나 카터는 끝내 전용비행기를 타고 졸업식에 참석했다. 7차전에서 카터는 야투부진으로 고생했고, 경기종료를 얼마 안남기고 던진 회심의 3점슛이 실패하면서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카터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저 졸업식에 참석한게 7차전 부진의 원인이 될수는 없었지만.
카터는 2001-02 시즌부터 부상으로 고생해야 했다. 60게임만에 시즌아웃 하면서 기록도 대폭 하락했다. 그 다음시즌은 아예 시즌의 절반가량을 날려먹으면서 또 개점휴업해야만 했다. 카터는 이때쯤부터 조금씩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구단과 갈등의 조짐도 보였다.
2004-05시즌. 카터는 정말 그답지 않은 부진한 성적을 보였다. 그동안 부상을 많이 당했다고는 하나 이 정도까지 부진할꺼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언론과 팬들은 카터와 랩터스 구단과의 갈등으로 인해 카터가 태업을 하는게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실제로 카터는 '''경기중에 상대팀에게 자기팀 작전을 얘기하기도 하는 등(...)''' 정말 태업이 의심될만한 행동을 했다. 결국 랩터스도 카터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마침 슈퍼스타의 영입이 필요했던 뉴저지 네츠와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뉴저지는 두개의 1라운드 지명권과 알론조 모닝, 아론 윌리엄스, 에릭 윌리엄스를 내주는 조건으로 카터를 받아왔다[11], . 카터는 트레이드 된 후의 인터뷰에서 "열심히 하지 않았다." 라고 발언하면서 또 랩터스 구단과 팬들의 어그로를 끌었다. 한때 에어 캐나다, 토론토의 상징이었던 선수는 이렇게 씁쓸하게 자신의 첫 소속팀과 인연을 끊고 말았다.[12]

2.3. 뉴저지 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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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네츠는 지난 2년간 파이널에 진출했던 그 전력이 아니었다. 캐년 마틴의 이적. 리차드 제퍼슨이 잘 나가다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거의 제이슨 키드가 혼자서 팀을 이끌어야 할 판이었다. 네츠 구단도 키드가 불만을 터트리기 전에 잽싸게 카터를 영입했고 이는 좋은 선택이었다. 카터는 제이슨 키드라는 리그 최고의 포인트 가드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다시 활약했다. 네츠 유니폼을 입고 처음 몇경기는 적응단계였다가 경기를 진행할수록 전성기에 못지않은 대활약을 펼쳤다. 57경기동안 27.5점을 기록하면서 뉴저지가 플레이오프 막차를 타는데 공언했다. 하지만 마이애미 히트에게 4전전패로 1라운드에서 광속탈락하고 말았다.
카터와 키드 그리고 제퍼슨 이 삼인방은 2005-06시즌부터 제대로 된 호흡을 맞추었다. 좋은 활약상을 보여주긴 했으나 팀 성적이 큰 폭으로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에 2년연속 오르는 등 그런대로 동부강호로써의 면모는 보여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2007-08시즌 제이슨 키드가 댈러스로 트레이드 되면서 이 뉴저지의 빅3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시즌 종료후 리차드 제퍼슨도 밀워키 벅스에 트레이드 되면서 네츠에는 카터 혼자만 남게 되었다.
카터는 네츠의 리더로써 팀을 이끌어갔으나, 이미 과거의 폭발력은 많이 감소한 상태였다. 그리고 돌파보다는 점프슛만 쏴대고, 경기에 져도 싱글벙글 하는 등 맨탈적인 부분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뉴저지 네츠 역시 브룩 로페즈와 데빈 해리스 위주로 팀을 재편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카터에게 더 이상의 미련이 없었다. 2008-09시즌이 끝나고 우승전력을 위해 올랜도가 트레이드를 제안하면서 카터는 올랜도로 트레이드 되었다.

2.4. 올랜도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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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는 플로리다 데이토나 해변에서 태어났다. 올랜도 매직은 고향인 플로리다 주에 연고를 두는 팀이었다. 카터 역시 기쁨을 나타내면서 올랜도의 우승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많은 팬들은 카터와 하워드의 결합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2008-09시즌 파이널에서 레이커스에게 패한 올랜도는 목표가 우승으로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경험많은 베테랑 카터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카터는 제 몫은 했지만 확실히 기량은 많이 하락한 상태였다. 48득점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올랜도는 컨퍼런스 파이널에 올랐지만,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하면서 우승에 실패했다.

2.5. 피닉스 선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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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시즌에는 거의 조용하다 싶을 정도로 시즌을 치루고 있다가 올랜도가 공격력 강화를 위해 그를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 해 버렸다. 고향팀에서 경력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카터의 꿈은 무산되었다. 피닉스 선즈로 팀을 옮겼지만 카터는 이제 거의 옛날의 모습을 찾기 힘들어보였다. 젼혀 내쉬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피닉스는 결국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카터 역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했다.

2.6. 댈러스 매버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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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 선즈에서 방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댈러스 매버릭스와 3년계약을 맺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비록 예전과 같은 기량은 더 보여주지 못하지만 아직까지는 평균정도는 할수 있는 기량은 있기 때문에 댈러스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 짬밥이 많이 쌓였다보니 경기운영이나 수비력도 좋은 수준에 도달해 괜찮은 베터랑 식스맨으로 자리잡았다. 단 프랜차이즈 스타인 더크 노비츠키가 늙고 우승팀급 전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팀 사정상 댈러스에서 반지를 얻고 은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2014년 샌안토니오 스퍼스하고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3차전에서 기적같은 3점 버저 비터로 팀의 역전승을 만들어냈다. 토론토 시절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필라델피아전에서 실패했을 때와 거의 비슷한 구도였는데 이번에는 성공.

2.7. 멤피스 그리즐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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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오프시즌에 멤피스 그리즐리스와 3년 124억원 가량의 계약을 맺었다고 보도되었다. 어느덧 리그 최고참급이 되어 벤치멤버로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중. 통산 24,000 득점을 돌파한 24번째 선수가 되었고 불혹의 나이가 된 2016년에도 20득점을 두 차례 기록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멤프스에서 벤치 멤버의 요원으로 솔솔히 확약하고 특히 2016-2017에 선발인 토니 앨런이 부상당하자 스타터로 뛰기도 하였다.
2016-17 플레이오프에서 스퍼스와 접전을 했는데 요소요소에 중요한 활약을 펼치며 2-2 까지 만들었지만 더 전력이 강했던 스퍼스에 결국 2-4로 패했다. 스퍼스와의 경기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요소가 많았는데, 스퍼스는 현 NBA 팀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팀이라 카터 vs 지노빌리의 노장 투혼을 관람할 수 있는 경기이도 했다. 두 노장이 공 하나 뺏겠다고 코트에 뒹구는 훈훈하면서(...) 나이든 투혼을 보여주기도 했다.
같은 드래프트 동기인 피어스가 PO 이후 은퇴를 선언함에 따라 FA가 된 카터의 거취에도 관심이 쏠렸는데 아직은 은퇴할 생각없이 2년 정도 더 뛰고 싶다고 하더라.[13] 이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링 체이스"[14] 걸 하지 않냐고 제안이 들어왔지만 반지보다는 플레이타임 보장이나 팀 기여에 더 관심을 두고 있으며, 그 말대로 리빌딩 팀인 새크라멘토 킹스와 계약을 했다.

2.8. 새크라멘토 킹스


휴스턴과의 홈 개막전에 출전했고 3점슛 3개 중 2개 성공시켰다. 이 경기에서 2017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디애런 팍스가 인상적인 킹스 데뷔전을 가졌는데, 그 디애런 팍스가 태어난 해가 1997년 12월 20일이고 카터의 데뷔가 직장폐쇄로 50경기 단축시즌인 1998/99시즌.. 즉 팍스가 생후 12개월 정도 지났을 때 카터는 NBA에 데뷔하여 엄청난 덩크와 앨리웁을 보였다.
한국 시간 12월 28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전에서는 4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4득점 FG 10/12로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전성기에 비해선 크게 모자라지만, 수비와 3점으로 쏠쏠하게 제 몫을 하고 있다. 특히 영건들의 멘토이자 라커룸 리더로서의 역할을 차고 넘치게 수행해 주고 있다. 올 시즌이 끝난 이후에도 커리어 연장 의사가 있다고.

2.9. 애틀랜타 호크스


한국 시간 2018년 7월 26일, 애틀랜타 호크스와 1년 240만 달러 계약을 맺으며 NBA 최고령 선수 기록을 이어나가며, NBA에서의 21번째 시즌을 맞았다. 이로서 카터는 역대 가장 오랜시즌을 뛴 선수 공동1위가 되었다. 현역 중에서는 디르크 노비츠키와 단 둘 뿐인 1990년대를 경험한 선수로 남아있었으나 노비츠키도 18~19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면서 유일하게 90년대를 경험 선수가 되었다. 시즌 76경기, 평균 17.6분을 뛰며 평균 7.6점을 넣는 노장으로서 쏠쏠한 역할을 해주었다. 통산 25,000점을 다른 팀도 아닌 토론토 랩터스를 상대로, 그것도 덩크로, 그다운 모습으로 성취하였다. 시즌 종료 후, 애틀란타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년에도 뛰겠다고 커리어 연장 의사를 밝혔다!
한국시간 2019년 8월 6일, 애틀랜타 호크스와 1년 재계약했다. 자세한 계약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 시즌과 비슷한 최저연봉일 것으로 예상된다. 2019-20시즌이 그의 22번째 시즌이 될 예정이다. 디르크 노비츠키, 케빈 가넷, 케빈 윌리스, 로버트 패리시를 제치고 NBA 최다 시즌 출전 기록을 세운다. 그가 2020년에도 뛰게 되면서 NBA 역사상 최초로 네 번의 십년대(decades, 1990, 2000, 2010, 2020년대)를 뛴 선수가 되었다.
ESPN에 나와서 19~20 시즌 이후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근데 이 양반은 작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했다가 뛰고 있는지라..
당연히 풀타임을 소화하지는 못하지만, 경기에 꾸준히 나와주시고 계신다. 팀이 10경기를 하면 9경기에 나오는 수준이며, 그것도 가비지 타임이 아니라 후반 승부처에 나와서 득점을 올려주며 팀을 승리로 이끌고 있다! 최저연봉임을 감안하면 밥값을 충분히 해주고 있는 셈. 성적 지표도 팀이 최하위임을 고려하면 작년과 비교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작년과는 달리 시즌 중반에 접어들어서까지 GS가 0이고 현재 애틀란타가 탱킹 시즌이어서 경기 출전이 가능하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2020년 3월 12일 루디 고베어도노반 미첼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을 받으면서, NBA 시즌 전체가 중단되었다. 상황이 빠르게 개선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같은 날 진행된 뉴욕 닉스와의 경기가 그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가 될 가능성도 있다. 아무도 그 경기가 은퇴 경기가 될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은퇴 관련 행사도 진행하지 않았는데 감독이 그런 생각을 했는지 승부가 결정된 후 마지막 공격에 투입되어 3점슛을 넣고 경기를 끝내기는 했다. 이런 식으로 커리어를 끝내기를 원치 않은 많은 팬들은 그에게 한 시즌만 더 뛰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트위터에서의 감사 인사 등으로 미루어보아 더 이상 뛰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구단주 총회에서 플옵 가능성만 있는 팀들끼리 올랜도 한 곳에서만 무관중으로 시합을 재개하기로 합의하면서[15] 플옵과는 거리가 먼 애틀란타는 이대로 시즌을 끝내게 되었으며, 빈스 카터는 공식적으로 현역을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역대 최고의 하이플라이어 중 한 명이자 뛰어난 중장거리 슈터'''
역대급 운동능력을 가진 선수 중 하나로 다양한 방식으로 림어택이 가능했다. 드리블이 준수한 편이라 동시대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앨런 아이버슨 급은 아니지만 그 바로 아래의 돌파력을 가지고 있었다. 힘도 좋고 포스트업 기술도 있어 포스트 플레이도 자주 보여줬다.
덩커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좋은지라 종종 묻히는 사실인데, 전방위 슈팅 능력도 뛰어났다. 3점 라인 근처에서 드리블해 들어오다가 던지는 미들레인지 점퍼도 준수했고, 커리어 평균 성공개수 1.5개, 성공률 37.1%를 자랑할 정도로 3점 능력도 출중하다. [16] 자유투 역시 전성기 시절에는 통산 79.8%로 준수한 성공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슈팅 능력을 가지고 있던 덕분에 운동능력이 많이 떨어진 커리어 후반부에는 3&D 플레이어로의 전환도 무리없이 해낼 수 있었다.
시야는 준수한 편이었지만 동시대 6성 슈가의 일원들인 앨런 아이버슨,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코비 브라이언트처럼 보조 리딩 혹은 메인 볼핸들러로서 활약하기에는 아쉬운 수준이었다. 팀원들을 살려주는 것 보다는 자신이 직접 마무리하는 플레이를 선호했다. 뉴저지 네츠 시절의 제이슨 키드처럼 리딩을 전담할 선수가 있는 것도 한 몫 했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최고 수준의 운동능력을 이용한 앨리웁 받아먹기와 페이스업 돌파와 포스트업, 준수한 슈팅력을 이용한 미드레인지 점퍼와 3점슛 등 다재다능했던 스윙맨. 다만, 모든 능력이 A급이었지만 당대 최고 수준에서는 한 끝 모자란 점이 약간 아쉬웠던 선수로 볼 수 있다.

4. 기타 등등


  • 포스트 조던[17]으로 언급되었던 사람들 중에 코비 브라이언트와 제리 스택하우스[18] 못지않게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선수였다. 그리고 첫 3시즌 동안은 정말 거의 조던의 뒤를 이을 슈퍼스타 포스였다. 실제로 운동능력 하나만큼은 조던 이상 이라는 평가까지 받았을 정도. 하지만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스타선수[19]정도로 머물러야 했다. 또한 2004-05시즌 토론토에서 보여준 태업성 플레이로 인해 이미지를 실추시킨 것도 마이너스 요인 중 하나였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카태업
  • 갖추고 있던 재능 자체는 다른 포스트 조던 경쟁자들에 비해 결코 꿀리지 않았으나(코트비전, 운동능력, 정확한 3점 등) 이 재능들을 받쳐주는 기본기들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평가가 지배적. 그래도 운동능력으로 먹고 살았다는 이미지하고는 달리 연습을 통해 슛을 장착해 나이를 먹고 나서도 도태되지 않고 리그에서 오래 살아남는데는 성공했다. 3점은 이미 2000-01시즌 40%를 넘길 정도로 좋았다. 즉 덩커 이미지가 매우 강해서 나머지 부분들이 가려진 것 이다. 스탯은 폴 피어스와 비슷했다. 평균 25점 내외, 6리바운드, 3어시스트. 또한 전성기 때는 부상이 잦은 편이었으나 말년에는 포스트조던 중에서 가장 훌륭한 몸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선수이다.[20]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그의 덩크 실력. 만 40세가 넘긴 2017-18시즌까지 역 360도나 윈드밀 정도는 연습중에 쉽게 하며 (물론 전성기 때 높이는 아니다) 경기 중에도 종종 호쾌한 덩크를 한다. 이 때문에 리그 내외 전문가들과 팬들이 덩크 콘테스트 참가를 종용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참가 루머가 돌기도 했으나 이뤄지진 않았다.
  • 트레이시 맥그레디와 사촌이다. 카터가 슬램덩크 콘테스트 우승할 때 맥그래디는 카터와 경쟁하는 한편 카터의 덩크를 도와주는 도우미 역할도 해줬다.
  • 플레이오프에 50득점 이상을 한 선수중 한명이며[21], 3점 슛 성공수도 역대 10위 안에 들어간다.
  • 2010년 봄에는 자신의 고향에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슬슬 은퇴 후를 준비하는 듯 보인다.
  • 개인 홈페이지가 있다. 카터에 대한 소식이 궁금하면 바로 가보도록 하자. 주소는 여기
  • 프로레슬러 타이터스 오닐[22]가 조직한 스테이블 '타이터스 월드 와이드'[23]에 가입했다! 여기에 들어가서 어떤 역할을 맡을지는 아직 모른다.
  • 2019-20시즌 기준으로 NBA최고령 선수이며, 한 살 어린 노비츠키의 은퇴로 현재 NBA에서 현역으로 뛰는 유일한 70년대생 선수가 되었다. (덤으로 유일한 40대) 얼마나 나이가 많냐면 77년 1월생이라 2020년 3월 기준 43세인데, 팀 동료 트레이 영아버지가 77년 11월생이라 아직 생일이 안 지나 42세로 카터보다 어리다. 즉, 문자 그대로 아들뻘과 뛰는 셈. 참고로 카터가 98년 드래프티인데 영은 98년 9월생, 즉, NBA에 입성하고 나서 영이 태어났다.
  • 1998년에 데뷔한 그는 19-20시즌까지 뛰면서 90-00-10-20년대까지 사상최초로 네번의 10년대를 뛴 NBA선수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 넷플릭스에 빈스 카터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인 '더 카터 이펙트(The Carter Effect)'가 올라와 있다. 말 그대로 빈스 카터가 토론토라는 도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 가가 주된 내용. 관심이 있다면 한번 쯤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 22년 가까이 뛰었던 레전드 선수라서 영구결번 떡밥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정작 저니맨 생활이 길어서[24] 영구결번을 줄 팀은 토론토 랩터스나 브루클린(뉴저지) 네츠 정도뿐. 토론토 랩터스에서 주어야한다는 말은 많지만 카터의 랩터스 후반기의 태업은 정말 작정하고 팀을 떠나려고하며 팬들에게 큰 상처를 남긴 행동이었고 랩터스는 아직 영구결번선수가 없기 때문에 팀의 첫 영구결번을 태업한 선수에게 줘야하냐?라면서 반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받을 수 있을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5. 관련 문서


[1] 파업 때문이었다.[2] 공교롭게도 코비 브라이언트의 기일과 같다.[3] 2019 재측정 신장[4] 케니 스미스가 지어준 별명이다. 2000년 올스타 주간 당시 슬램덩크 대회 전에 진행된 TNT의 pre game show의 일환으로 크렉 세이거가 카터를 인터뷰하는데, 여기서 세이거가 "케니 스미스가 지어준 별명 half man/half amazing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5] 왜 먼저 지명권이 있었던 토론토가 굳히 다른 선수를 지명한 후 트레이드로 대려왔는지 궁금할수도 있는데, 이는 워리어스가 어떻게든 꼭 앤트완 재미슨을 뽑는것을 원해서 당시 토론토행의 루머가 있었던 재미슨을 안전빵으로 대려오길 위해서였다. 사실 당시 토론토는 처음부터 카터를 원했고 실제로는 재미슨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는데도 재미슨 루머가 돌자 재미슨에 러브콜을 하는 블러핑을 하고, 이에 조급해진 워리어스에게 접근하여 돈을 추가로 삥뜯고 랩터스의 재미슨 지명 후 워리어스가 카터를 뽑고 트레이드를 하는것으로 합의 하였다.[6] 밑에 있는 유튜브의 99~00 올스타전 슬램덩크 콘테스트 에서 찍힌 사진이며 이 사진이 찍힌 덩크는 4분 7초부터 볼 수 있다.[7] 마침 랩터스의 홈구장이 에어 캐나다 센터, 그러니까 에어 캐나다구장명명권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빈스 카터의 환상적인 플레이와 딱맞는 별명이었다.[8] 당신이 위에서 보았던 사진이 바로 이 순간을 찍은 것이다.[9] 여담이지만 결승에서 선보인 덩크들은 그가 즉흥적으로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허니딥을 하기 직전에 카터는 공을 들고 골대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오는데, 퍼포먼스처럼 보였지만 훗날 그는 인터뷰에서 "그때까지 무슨 덩크를 해야할지 생각이 안 났다"고 했다. 허니딥의 경우 이제는 제법 덩콘에서 흔한 덩크가 됐지만 이를 처음 선보인 것은 이때 카터였다. 즉흥적으로 역대급 덩크를 만든 것. 그러나 마지막의 투핸드 덩크의 경우 아이디어가 고갈된 것이 조금 티가 날 정도였고, 만점도 못 받았다. 게다가 앞서 두번째 덩크의 경우 스미스의 억지에 가까운 이유로 만점에 실패했어도 만점감이라고 다들 인정했지만, 이 덩크는 만점까진 아니라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10] 당시는 덩크하는 즉시 얼마나 점프했는지 측정하는 첨단 기술이 적용됐다.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한 것이 바로 프랜시스.[11] 정작 트레이드의 핵심이였던 알론조 모닝은 토론토에서 뛰는걸 거부하는 바람에 랩터스는 얼마 못가 어쩔수 없이 바이아웃을 진행하여 그를 방출하였다.[12] 2006년 즈음에 토론토 농구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카터에 대한 여론이 정말 안 좋았다. 이들은 카터를 quitter라고 부르며 매우 싫어했는데, 그전까지 전국구 스타가 없던 캐나다에 리그에서 가장 핫한 스타가 온만큼 애정도 컸고, 이 스타가 몇년간 부상 때문에 못 뛰다가 결국 이적하고, 심지어 이적 직후 뉴져지에서 그야말로 맹활약을 해대며 저런 어그로까지 끄니 빈정이 상한 것.03-04시즌 당시 이적 전에 토론토에서 평균 15.9점을 넣었는데, 이적 후 뉴져지에서 57경기동안 '''27.5점'''을 넣으니 배알이 꼴리지 않을 수가 없다.(최전성기이 된 01시즌의 27.6점보다 고작 0.1점 낮은 수치다)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토론토 팬들의 악감정은 많이 희석된 상태다.[13] 인터넷 댓글들도 아직까지는 더 뛸 수 있겠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14] 우승 반지를 쫓는[15] 다만 포틀랜드만은 합의를 하지 않았다.[16] 2020년 3월 14일 현재 통산 3점슛 성공 5위에 올라있다.[17] 앤퍼니 하더웨이, 그랜트 힐도 초창기 포스트 조던 선수였다. 당시 젊고 조던과 비슷한 신장 혹은 유형의 선수는 거의 다 그 후보군에 올랐다. 그 만큼 조던의 빈 자리를 우려했다는 증거[18] 스택하우스는 1시즌만에 포스트 조던 자리에서 내려왔다. 전체득점선두를 할 정도로 득점력은 있었으나 야투율이 지나치게 낮았고 무엇보다 스타성이 부족했다. 사실 스택하우스가 포스트조던 소리를 듣던 건 커리어 초창기 뿐이었다. 조던과 똑같은 6피트6인치 신장,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드래프트 3순위, 폭발적인 운동능력과 득점력 때문에 조던에 비교되었으나 못하는게 없었던 조던과 달리 득점력을 제외하면 별로 내세울 게 없었다.[19] 그냥 스타선수라고 하기에는 그 이상 이였다. 슈퍼스타 - 올스타 - 스타 - 주전, 식스맨 - 핵심벤치 - 로테이션 멤버 의 등급이라면 올스타 레벨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클 조던을 제외하면 대부분 은퇴, 베테랑 선수의 선수평가는 시간이 갈수록 하락한다. 사실 천하의 조던 역시 평가가 시간이 지날 수록 하락했다. 만장일치 MVP에 근접했던 1996시즌의 조던조차 전성기에 비해 모든 면에서 현저하게 떨어지며, 2차 3연패 시절에는 매해 눈에 띄게 기량이 하락했고, 워싱턴 시절의 조던은 허구헌날 못한다고 욕먹었다. 다만 원체 실력이 뛰어난 선수라 눈에 띄게 떨어진 실력이 MVP, 욕을 바가지로 먹던 시절조차 올스타급 이상이라 그렇지.[20] 아이러니하게 동년배 라이벌들 중에 전성기 때는 롱런하지 못할 거란 예측이 (단신이고 돌파형인) 알렌 아이버슨 다음으로 가장 많았던 게 카터이다. 당시 그는 3점슛도 뛰어났지만 폭발적인 운동능력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았으며 부상도 은근 잦았기 때문이다. 동갑인 폴 피어스처럼 운동능력 떨어져도 몸빵과 스킬로 먹고사는 선수도 아니고, 코비처럼 심할 정도의 독종도, 레이 알렌만큼 수도사처럼 금욕하며 철저하게 몸관리와 연습을 하는 선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쇠락하여 은퇴한 이후에도 혼자 현역으로 뛰고 있다. 언뜻 부각되지 않는 몸관리와 노력이 얼마나 뛰어난 지 알 수 있는 부분.[21] 이게 대단한 게 지금까지 플레이오프에서 50점을 넘긴 선수는 23명으로 총 36번 일어났다. 카터의 경우 정확히 50점으로 2001년에 달성했다. 여담이지만 가장 많이 50점을 넘긴 선수는 마이클 조던으로 8차례, 그 다음은 윌트 체임벌린으로 4차례, 앨런 아이버슨으로 3차례, 제리 웨스트로 2번이다. 그 외엔 전부 1번씩으로 가장 최근에는 르브론 제임스가 2018년 파이널에서 달성했다(51점). 60점을 넘긴 선수는 조던과 엘진 베일러 뿐이다.[22] 전직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며, 키가 193cm에 달하는 거구 중 하나다. 좋은 신체조건에 비해 프로레슬링 경기력이 좋지 않아 한국팬들한테 욕을 먹는 선수다. 절친한 친구가 바로 데이브 바티스타[23] 타이터스 오닐이 조직한 스테이블로 아폴로 크루즈, 토자와 아키라 등 신인 선수들을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사실 이 스테이블은 타이터스 오닐이 프로레슬링 실력이 되지 않다 보니 앞에 언급한 실력이 좋은 신인들과 같이 다님으로써 선수 활용을 하려고 만든 거라고 보면 된다.[24] 2009년부터 2020년까지 6팀을 떠돌아 다녔고 그 팀들 중에서 파이널까지 진출한 팀은 없다. 올랜도 매직(08-09준우승)과 댈러스 매버릭스(10-11우승)의 경우에는 파이널 진출 다음 시즌에 입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