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레이 E. 스티븐슨
1. 개요
미합중국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다. 정치인으로서는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속으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맞붙어 패배를 맛본 인물로 유명하다. 외교관으로서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UN에서 소련을 강력하게 압박하며 존 F. 케네디 행정부가 미사일 철수를 이뤄낼 수 있도록 공헌했다.
2. 생애
일리노이 정치 명문가 출신인데 할아버지인 애들레이 스티븐슨 1세가 그로버 클리블랜드 2기 임기 당시 미국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으며 아버지 역시 그 후광을 입어 일리노이 주 국무장관 직을 지냈고, 1928년 대선에서 공화당 허버트 후버와 맞붙을뻔하기도 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군에 입대하여 일등병으로 전선 투입을 앞두고 있었으나, 직전에 전쟁이 끝나면서 참전하진 못했다. 이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문학과 역사를 전공한 후,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했으나 졸업에 실패하고 자퇴를 선택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압박으로 결국 노스웨스트 대학에서 다시 로스쿨을 들어가 이번에는 변호사가 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농업 조정국 특별 변호사, 해군 장관 법률 고문, 국무장관 특별보좌관 등을 맡으며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48년, 일리노이 주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 현직 공화당 드와이트 그린 주지사를 꺾고 승리해 처음으로 선출직에 올랐는데 이 시기 자기의 리버럴적인 색채를 마음껏 뽐내며 정치적 관심을 끈다. 공공 교육 기금을 2배로 확충하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주 경찰 채용을 좌지우지하던 정책을 금지시켰으며 주 내 고속도로를 대거 정비하면서 존재감을 키웠다. 특히 해리 S. 트루먼 행정부에서 냉전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반공단체 설립을 비판하면서 "여러분들은 진짜 간첩이 충성 서약서에 서명할까 말까 망설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짜 위험한 인물들은 주의 깊고 면밀한 수사로 잡아낼 수 있지, 고작 종이쪼가리로 잡아낼 수 있는게 아닙니다."라는 명연설을 남겨 주목을 받았다.
이후 두번의 대선에서 당의 공식 지명을 받아 후보로 나섰으나 패배했다. 1960년 대선에서는 당의 공식 후보 지명을 받은 존 F. 케네디 후보를 위해 다시 한번 적극적으로 유세에 나섰고 이번에는 아이젠하워 시절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을 상대로 케네디가 승리하면서 간접적으로 복수를 이뤘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UN 안보리에서 발언하는 스티븐슨
이후 케네디의 지명을 받아 UN 주재 미국 대사가 되었으며 린든 B. 존슨 행정부 시절인 1965년까지 자리를 지킨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유엔 안보리 긴급 회의가 소집되자 소련 대사 발레리아 조린을 강력하게 압박해 조린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기로 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자 쿠바의 항공 사진을 공개해 국제 여론을 미국에 유리하게 크게 움직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헌했다.
하지만 1965년 7월 17일, 영국 런던에서 급작스럽게 찾아온 심근경색으로 인해 향년 65세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후임 대사로는 아서 골드버그가 지명되었다.
2.1.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의 두번의 맞대결
1952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낮아진 인기 등으로 인하여 3선 도전을 포기하면서 다음 민주당 대선 후보가 누가 될 것이냐는 논란이 당내에서 거세게 일었다.[1] 트루먼은 이 상황을 일찍 정리하기 위해 스티븐슨을 호출해 다음 대선에 출마하기를 권유했지만 일단 스티븐슨은 주지사 재선 도전 쪽에 관심을 더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일리노이 주지사 경선에 나서 재선 도전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경선에서는 테네시 주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에스테스 키포버가 범죄 조직와 싸웠던 자신의 경력을 어필하며 큰 승리를 거뒀지만 이것이 범죄 조직과 민주당 지방 조직과의 연관성까지 문제가 되는 상황이 되자 키포버는 트루먼 대통령과 당 내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2] 트루먼 행정부 부통령이었던 앨번 W. 바클리 역시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고령과 편협성이 문제가 되어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그 사이 자유주의 성향 당원들의 지지를 받은 스티븐슨이 출마를 결심했고 트루먼 대통령의 최종 지지까지 더해지자 전당 대회에서 스티븐슨이 3차 투표 끝에 키포버를 꺾고 당의 공식 지명을 받는 데 성공했다.
본선에서는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된 전쟁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맞붙게 됐는데,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라는 아이젠하워의 거대한 존재감과 함께 6.25 전쟁의 장기화와 민주당 장기 집권으로 인한 미국 국민들의 피로감까지 더해져 스티븐슨으로서는 도무지 풀어나가기 어려운 선거였다.
스티븐슨은 특유의 유머감을 이용해 자신이 대머리인 점을 이용해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인용해 '만국의 달걀머리들이여 단결하라!' 외치며 웃음을 주면서 동시에 매카시즘에 대해 비판했다. 이때문에 언론인과 지식인 층에게 호평을 받았지만, 오히려 공화당 지지층과 블루 워커 민주당 지지층에게는 배운 티를 낸다는 이유로 호감을 사지 못했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나선 리처드 닉슨과 격렬하게 대립하기도 했는데 닉슨은 스티븐슨을 "지식인"으로 호칭하며 비꼬았고 스티븐슨 역시 이때문에 닉슨을 매우 경멸했다고 한다.
반면 공화당에서는 이 시기 한창 보급되기 시작한 TV 광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아이젠하워를 전쟁 영웅인 동시에 소탈한 동네 할아버지로 이미지 메이킹을 시키는 데 성공했고[3] 스티븐슨은 전국 득표율 44.3% vs 55.2%, 선거인단 89명 vs 442명의 압도적인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아직 철회하지 않았던 남부 9개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스티븐슨의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
대선 참패 이후 한동안 아시아와 유럽을 순방하며 외교 활동을 펼치다가 1956년 다시 한번 대선에 도전하기 위해 복귀한다. 이번에도 도전장을 내민 키포버와 함께 현직 뉴욕 주 주지사 W. 애버럴 해리먼이 도전해왔다. 4년전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선에 나서게 됐지만 이번에는 본인도 의지가 생겼는지 공격적으로 경선에 나섰고, 트루먼이 해리먼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존 F. 케네디 등 당내 소장파의 지원을 받아 다시 한번 전당 대회에서 공식 후보로 지명받는 데 성공했다.[4]
본선에서 다시 한번 아이젠하워와 맞붙게 됐는데 "새로운 미국"을 내세우며 55,000마일을 오가면서 정력적으로 유세에 나섰다. 현역 아이젠하워 대통령 역시 심장 질환을 앓고 있어 우려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4년전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핵무기 폐지 공약이 미소 냉전 시기에 내세우기엔 무리가 있었고, 결국 치명타로 작용했다.
거기에 수에즈 전쟁 등이 연속으로 터지는 바람에 정권 안정을 희망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4년전보다 더 큰 차이로 패배하고 말았다. 두번째 대선 패배 이후로는 변호사로 복귀하고 민주당의 상임 고문직을 받아들여 사실상 정계를 떠나게 된다.
3. 기타
비록 1952년 대선에서 아이젠하워에게 패했지만, 선거 기간에 찍힌 그의 사진이 이듬해 퓰리처상 보도사진 수상작이 되기도 했다. 열심히 선거 유세를 다녔음을 증명하듯이 구두에 구멍이 난 모습이 드러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