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리 리트마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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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세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재능과 감각을 가진 선수로 평가 받았으나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던 비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정상급의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필요 요건을 모두 갖췄으며, 패싱 능력과 시야가 탁월한 선수였다. 득점에도 또한 일가견이 있어 전성기인 아약스 시절에는 득점왕까지 차지한 바 있다.
2. 클럽
1987년 아버지의 팀이었던 레이파스 라티에서 데뷔했다. 첫 시즌에는 유망주에 불과했으나 2번째 시즌부터는 주전 선수로 발돋움했고 1990년에는 리그에서만 두자릿수 득점에 성공하며 리그 정상급 선수로 성장한다. 1991년에는 자국 명문인 HJK 헬싱키로 이적해 1시즌간 뛰었고 1992년에는 MyPa로 이적했다. MyPa에서 그는 처음으로 핀란드 컵을 들어올렸고 다른 유럽 클럽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그를 노리던 팀은 AFC 아약스를 비롯해 FC 디나모 부쿠레슈티, 리즈 유나이티드 FC, FC 바르셀로나, PSV 에인트호번 등이 있었고 리트마넨은 루이 판할이 이끄는 아약스로 이적한다. 첫 시즌이었던 1992-93 시즌, 윙어였던 리트마넨은 초반에는 주로 리저브 팀에서 뛰었고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부상당한 데니스 베르흐캄프의 대체자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된 리트마넨은 새로운 아약스의 10번이 될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다음 시즌 베르캄프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하면서, 리트마넨은 아약스의 새 10번이 된다.[2]
리트마넨은 클라렌스 세도르프, 에드가 다비즈 등과 함께 중원을 구성했고 그 시즌 리그에서만 26골을 몰아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그해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상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1994-95 시즌 아약스는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무패 우승(34전 27승 7무)과 함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격파하며 우승을 차지했고[3] 리트마넨은 그 중심에 있었다. 1995-96 시즌 아약스는 다시 한번 챔피언스리그 재패에 도전했고 리트마넨은 결승전에서 유벤투스 FC를 상대로 동점골을 넣는 등 분전했으나 승부차기 끝에 패퇴했다. 이 대회에서 리트마넨은 9골로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1995년에는 조지 웨아, 위르겐 클린스만에 이어 발롱도르 3위에 랭크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이후 리트마넨은 점점 유리몸이 되었고 많은 경기에 결장하게 된다.
1999년 리트마넨은 아약스를 떠나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는데, 그 행선지는 아약스 시절 자신을 지도했던 반 할이 이끄는 FC 바르셀로나였다. 바르셀로나에서 리트마넨은 한마디로 망했어요. 당시 바르셀로나는 아약스 출신의 선수들이 꽤나 많았는데 대부분 좋은 활약을 펼첬으나 리트마넨은 그러지 못했다. 첫 시즌 모든 대회를 통틀어 32경기에 나서 4골만을 기록했을 뿐이며, 최악의 영입으로 평가되었다. 시즌이 끝나고 반 할이 경질되자 히바우두에게 등번호 10번을 빼았기기까지 했다.[4]
리트마넨은 바르셀로나에 잔류했으나 1경기도 출장하지 못했고 결국 2001년 1월, 계약을 해지한다. 리트마넨은 자유계약으로 어릴적부터 동경하던 리버풀 FC에 합류했고 등번호 37번을 배정받았다.[5] 이적 초반 리트마넨은 순조로운 출발을 했으나 3월달 A매치 주간에 입은 부상으로 시즌아웃 당했다. 그를 영입한 제라르 울리에는 본인이 좋다고 영입해 놓고 정작 기용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 이는 리트마넨이 불만을 갖게되는 계기가 된다.
결국 2001-02 시즌이 끝나고 리트마넨은 다시 자유계약 상태가 되었고 친정팀인 아약스로 복귀한다. 리트마넨은 팀의 챔피언스리그 8강행 등에 기여했으나[6] 다시 부상에 시달렸고 03-04 시즌 도중 방출되었다. 리트마넨은 FC 라티로 이적하며 핀란드로 복귀했으나 2005년 겨울 이적 시장에 분데스리가의 FC 한자 로스토크로 이적했다. 로스토크는 핀란드의 슈퍼스타인 리트마넨을 영입해 강등을 모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리트마넨은 스웨덴의 말뫼 FF로 이적한다.
그러나 말뫼에서도 그는 잦은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고[7] 2007년을 끝으로 팀을 떠난다. 2008년 1월 그는 잉글랜드의 풀럼 FC와 6개월 단기계약을 맺었으나 2군 경기에서나 뛰었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방출, 핀란드의 FC 라티로 복귀했다. 첫 시즌 라티는 3위를 기록했으나 그 다음 시즌 14개 팀 중 11위를 기록하며 강등을 간신히 모면했다. 2010년 리트마넨은 핀란드 리그 통산 50호골을 기록했으나 팀은 그 경기에서 패배했고 라티는 최하위로 강등되었다.
불혹의 나이가 된 리트마넨이었으나 그는 현역 연장 욕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불러준 팀은 다름 아닌 자신의 친정팀 중 하나이자 핀란드 최강팀인 HJK였다. 리트마넨은 주로 서브로 10~30분 정도만 뛰었으며 총 18경기에 나섰다. 그가 나선 경기는 모두 승리했다. 리트마넨은 MyPa와의 핀란드 컵 결승전에도 출전했는데, 40세의 리트마넨은 후반전 교체 투입되어 연장 후반 선취골을 작렬해 팀이 2-1로 승리하는데 기여했다. 리트마넨의 현역 마지막 경기는 FC 하카와의 경기였고 리트마넨은 무려 '''어시트릭'''을 작렬하며 팀의 5-2 승리에 기여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3. 국가대표
조지 웨아, 라이언 긱스 등과 함께 실력은 좋으나 국가가 국가인지라 국제대회와 연이 없는 선수 중 하나이다. 1989년부터 2010년까지 국가 대표 팀에서 뛰어 4개의 다른 년대(1980, 90, 00, 10년대)를 경험한 유일한 선수이다. 핀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장 기록과 최다 득점 기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의미있는 기록은 모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기록했는데, 100번째 A매치 경기, 최초로 4개의 다른 년대에 출전한 선수가 된 경기 모두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경기였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80년대''', '''90년대''', '''00년대''', '''10년대'''에서 모두 출전과 골을 기록한 유일한 핀란드 선수다. 전 세계에서도 달성한 선수가 얼마 없는 희귀한 기록인데, 터키의 엠레 벨로조글루, 스웨덴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대한민국의 이동국, 파라과이의 로케 산타 크루즈가 이와 같은 기록을 달성한 선수들이다. 다만 1980년대에도 골을 넣어본 선수는 이 중에서 리트마넨이 유일하다.[8]
2010년 11월 17일 산마리노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PK골을 작렬하면서 유로 예선전 최고령 득점자가 되었다.[9] 이 골은 리트마넨의 마지막 A매치 골이기도 하다.
4. 경력
4.1. 클럽
MyPa
- Finnish Cup(1): 1992
- Eredivisie(5): 1993-94, 1994-95, 1995-96, 1997-98, 2003-04
- KNVB Cup(3): 1992-93, 1997-98, 1998-99
- Dutch Super Cup(3): 1993, 1994, 1995
- UEFA Champions League(1): 1994-95, 1995-96(준우승)
- UEFA Super Cup(1): 1995
- Intercontinental Cup(1): 1995
- UEFA Cup(1): 2000-01
- UEFA Super Cup(1): 2001
- FA Cup(1): 2000-01
- Football League Cup(1): 2000-01
- FA Community Shield(1): 2001
- Finnish championship(1): 2011
- Finnish Cup(1): 2011
4.2. 개인 수상 목록
- 핀란드 기자단 선정 올해의 스포츠 선수(8): 1990,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 FFA[10] 선정 올해의 선수(9): 1990,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2000
- 핀란드 리그 올해의 선수(1): 1990
-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선수(1): 1993
- 에레디비시 득점왕(1): 1993-94(26골)
- 발롱도르 3위: 1995
- ESM[11] 선정 올해의 팀(2): 1994-95, 1995-96
- UEFA 챔피언스리그 득점왕(1): 1995-96
- UEFA 주빌리 어워드 - 핀란드
4.3. 리그 기록
5. 여담
- 부모가 모두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아버지인 올라비 리트마넨은 1970년대 레이파스의 핵심 멤버였고 어머니 역시 레이파스 여성 팀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 어릴 적에는 다른 핀란드 아이들처럼 아이스하키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 FM에서 저비용 고효율로 유명하다. 나이가 있지만 조커로 쓰기에 적절하며 유망주 튜터용으로 상당한 효율을 자랑한다.
- 피파 16에서 신규 전설의 선수로 추가되었다. 피파 온라인 3에도 전설의 선수로 등장한다.
- 그의 고향인 라티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 핀란드 A매치 최다 득점 기록[2] 혹자들은 리트마넨이 반 할이 가장 원하는 No. 10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3] 이 우승으로 리트마넨은 핀란드 선수로는 최초로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 선수가 되었다. 리트마넨의 뒤를 이어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한 핀란드 국적의 선수로는 챔피언스 리그 2004/05 시즌 이스탄불의 기적 핵심 센터백이었던 사미 히피아가 있다.[4] 이전까지 히바우두의 등번호는 11번. 리트마넨 이전 바르셀로나의 10번은 지오반니.[5] 리트마넨은 케니 달글리시를 동경했으며 7번을 달길 원했으나 스미체르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고 17번(제라드), 27번(비그널)역시 사용중이라 37번을 선택했다고 한다.[6] 이 시즌 챔피언스리그는 조별리그가 1,2차로 나뉘어 있었다. 1차 조별리그에서 1,2위 팀들이 4개조로 나뉘어 2차 조별리그를 치뤘고 거기에서 1,2위를 한 팀이 8강에 진출했다.[7] 이 중에는 옆 사람이 딴 콜라 캔 뚜껑에 맞아 눈 부상을 당한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8] 나머지 4명은 모두 90년대, 00년대, 10년대, 20년대에 걸쳐서 출전과 골을 기록한 선수들이다.[9] 만 39세 270일. 종전 기록은 아일랜드의 존 알드리지, 만 37세 23일.[10] 핀란드 축구 협회[11] 유럽 스포츠 미디어[12] 슈퍼컵, 리그컵 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