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웨아

 

'''조지 웨아의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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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1996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호나우두
2위
'''조지 웨아'''
3위
앨런 시어러

'''라이베리아 공화국 제25대 대통령
조지 타울론 마네 오퐁 오스만 웨아
George Tawlon Manneh Oppong Ousman Weah
'''
'''출생'''
1966년 10월 1일 (58세)
몽세라도 주 몬로비아 클라라타운
'''국적'''
라이베리아
'''신체조건'''
185cm
'''직업'''
축구선수(공격수 / 은퇴)
정치인
'''경력'''
'''선수'''
영 서바이버스 클래리턴 (1981~1984)
봉레인지 컴퍼니 (1984~1985)
마이티 배럴 (1985~1986)
인비서블 일레븐 (1986~1987)
아프리카 스포츠 내셔널 (1987)
토네르 야운데 (1987~1988)
AS 모나코 FC (1988~1992)
'''파리 생제르맹 FC (1992~1995)'''
'''AC 밀란 (1995~2000)'''
첼시 FC (2000, 임대)
맨체스터 시티 FC (2000)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2000-2001)
알 자지라 클럽 (2001-2003)
'''정치'''
민주변혁회의 (2005년 ~ ''현재'')

라이베리아 하원의원 (몽세라도 주)
'''라이베리아 제25대 대통령
(2018년 1월 22일 ~ 현직)'''
''' 국가대표 '''
61경기[1], 22골(라이베리아 / 1987~2018)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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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디브라이 대학교 경영학 석사 (2013년 졸업)
'''종교'''
개신교
''' 가족 '''
배우자 클레어 웨아(Clar Weah)
자녀 티모시 웨아[10]외 2명


1. 개요
2. 축구선수 생활
2.1. 클럽
2.2. 국가대표
2.3. 플레이 스타일
3. 정치인 생활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웨아에 대한 말, 말, 말
6.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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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이베리아의 정치인, 전 축구선수.
선수 시절에는 AS 모나코 FC, 파리 생제르맹 FC, AC 밀란 등 유명 팀들을 두루 거치며 아프리카 최초이자 유일하게 발롱도르를 받은 뛰어난 실력의 선수였다. 2017년에 치러진 제25대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2018년 1월 22일에 취임했다.

2. 축구선수 생활



2.1. 클럽


[image]
''' 전설로 남은 선수 시절 '''
그의 부모님은 라이베리아의 소수 민족 크루족으로 낙후된 지역인 그랜드크루 주에서 수도 몬로비아로 이주해 빈민가인 클라라타운에 정착하였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가족관계에도 문제가 있어 웨아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 1981년 15세 때 당시 3부 리그 소속 지역 축구 클럽인 영 서바이버스 클래리턴과 계약하며 골키퍼로 축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골을 넣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서 공격수로 전향하였다. 1984년 봉레인지 컴퍼니 유스팀으로 이적하였다가 1985년 마이티 배럴에서 프로선수로 데뷔하였다. 마이티 배럴에서 10경기에 출전해 7골을 기록하며 활약하였고, 1986년 라이베리아 최고의 팀이었던 인빈시블 일레븐으로 이적하였다. 이 클럽에서 주장을 맡고 23경기에 출전해 24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이 활약으로 카메룬 스카우트의 눈에 띄어 1987년 코트디부아르 리그 소속의 아프리카 스포츠 내셔널로 이적하였다가 카메룬 리그의 토네르 야운데로 이적하였다. 토네르 야운데에서 18경기 15골을 기록하며 활약을 이어갔다.
아프리카에서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사실상 무명인 상태의 조지 웨아를 발탁하여 국제무대로 데려와서 성장시킨 인물은 아르센 벵거였다. 벵거는 아프리카로 직접 가서 조지 웨아의 모습을 수 차례 지켜보았고, 1988년 아르센 벵거 감독이 이끄는 AS 모나코로 이적하였다. 열악한 아프리카 리그에서 쥐꼬리만한 연봉을 받으며 가족을 부양했던 웨아는 당시 여러모로 열악한 상태였다. 사인을 하러 모나코에 왔을 때 당장 쓸 용돈이 한 푼도 없었기에 벵거 감독이 용돈으로 500프랑을 줄 정도였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팔이 골절된 상태였다. 구단에서도 의문을 표시했으나 벵거는 웨아를 전적으로 신임하며 '''"열심히하면 너는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고 격려했다. '''그리고 진짜 그렇게 되었다.'''[2] 웨아는 모나코에서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1991년 쿠프 드 프랑스에서 우승하였고, 이듬해에는 팀을 UEFA 컵 위너스컵 결승전으로 이끌었다. 모나코에서 4시즌동안 102경기에 출장해 47골을 기록하였다. 1992년 파리 생제르맹 FC으로 이적하였다. 이적한 뒤 첫시즌인 1992-93 시즌에 쿠프 드 프랑스에서 우승하였고, 1993-94 시즌에는 리그 앙 우승, 1994-95 시즌에는 쿠프 드 프랑스쿠프 드 라 리그에서 우승하는 등 파리SG에서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나 1995년은 PSG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해였다. FC 바이에른 뮌헨FC 바르셀로나를 꺾고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 준결승까지 진출한것. 파리 생제르맹에서 3시즌동안 96경기에 출장해 32골을 기록하였다.
1995년 유럽과 남미 출신이 아닌 대륙 출신이며 아프리카인으로서 처음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하였으며, 같은해 FIFA 올해의 선수상도 수상하였다. 그리고 3번째(1989년, 1994년, 1995년)로 아프리카 올해의 축구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개인 타이틀을 휩쓸었다. 지금까지도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대륙 출신으로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받은 선수는 조지 웨아 뿐이다. 동시에 그는 FIFA올해의 선수상 수상자 중 유일하게 월드컵 무대를 단 한 번도 참가하지 못한 선수이기도 하다.
1995년 여름 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 경이적인 신체 능력을 보여주며 "블랙 다이아몬드"이라고 불렀다. 1996년 9월 8일 베로나 전에서 80m를 질주하여 넣은 골은 그의 클래스를 보여준다. 이 골은 '''현재까지 영상자료가 존재하는 개인이 드리블로 돌파해 넣은 골 중 역대 최장거리 기록으로 알려져있으며'''[3][4] '''지금까지도 치달의 상징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 중 하나로 여겨진다.'''

''' AC 밀란에서의 골 '''
밀란에서 2회 리그 우승을 이끌며 5시즌 동안 114경기에 출장해 46골을 기록하였다. 2000년 첼시 FC로 임대되어 11경기에 출장해 3골을 기록하며 팀의 FA컵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2000년 여름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하여 7경기에 출장하였고, 이후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해 19경기 5골을 기록하였다. 2001년 알 자지라 클럽으로 이적해 8경기 13골을 기록하였고, 2003년 선수생활을 마감하였다.
그의 뛰어났던 선수시절은 사무엘 에투와 더불어 '''아프리카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평가받는다.

2.2. 국가대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라이언 긱스 등과 더불어 명성에 비해 안습의 국대 커리어를 가진 선수로 자주 거론되는 선수로 허약한 그의 조국 대표팀을 이끌고 고군분투했으나, 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채 국가대표 무대에서는 두각을 드러낼 기회조차 없었던 선수로 요약될 수 있다.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월드컵은 물론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조차 예선 탈락이 다반사로 아프리카 내에서도 약체로 분류되는 선수단이었다.
1987년 1월 30일 서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나이지리아 전에서 데뷔하였고, 그 경기에서 데뷔골도 기록하였다.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정치권의 부정부패 때문에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웨아는 국가대항전 본선이 있을 때마다 사비를 털어야 했다. 라이베리아 팀의 주장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도전했으나 꿈을 이루진 못하였다. 심지어 2002 한일 월드컵 때에는 35세의 노장이었던 그는 선수 겸 감독을 맡았지만 같은 조의 나이지리아에 승점 단 1점 차로 밀려 아깝게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대신 200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본선에 진출했고 말리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였다.[5]
2018년, 라이베리아 현지시각 9월 11일에 주장 완장을 차고 나이지리아와의 A매치 친선전에 나섰다!!! 현역시절 자신의 등번호였던 14번을 달고 뛰었는데,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14번을 영구결번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경기라고 한다. 조지 웨아는 79분간 경기를 뛰고 교체되었고, 라이베리아는 나이지리아에 아쉽게 2대1로 패하였다.

2.3. 플레이 스타일


만능 완성형 포워드. 폭발적인 스피드를 낼 수 있으면서도 강인한 힘으로 상대 수비를 이겨낼 수 있는 탄력적이면서도 강인한 신체를 가졌다. 이 신체 능력을 십분 활용하며 상대 수비를 박살내고 골을 집어넣던 선수였다. 거기에 더해진 좋은 퍼스트 터치와 준수한 드리블 능력, 의외로 좋은 편인 패스와 크로스 능력이 합쳐지고, 그 위에 더해진 오프 더 볼 능력이 웨아를 당대 발롱도르 수상자로 만들었다.

3. 정치인 생활


[image]
''' 정치인으로 활동 중인 모습 '''
내전으로 상처받은 조국 라이베리아를 위해 조지 웨아 기금을 설립하는 등 라이베리아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해 2005년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에 우익 정당인 민주변혁회의(CDC) 후보로 출마하였다. 327,046표를 획득하며 478,526표를 획득한 유엔 개발 프로그램의 아프리카 담당 재정국장으로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중도 자유주의 성향인 통일당(Unity Party) 소속의 엘런 존슨 설리프(Ellen Johnson-Sirleaf)에 151,480표 차이로 패하였다. 엘런 존슨-설리프(Ellen Johnson-Sirleaf) 는 2번 연임하며 12년 임기를 모두 채웠다.
2017년 10월 10일 치러진 대선에도 출마했는데, 1차 투표에서 39.0%를 받아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결국 결선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18년 1월 22일에 취임했다. 관련 기사
그런데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독재자 찰스 테일러의 전 부인을 선택하고 옥중의 본인과도 통화해서 논란이 되는 중. 관련 기사 또 선거에서 찰스 테일러의 정당이었던 극우 국민애국당과 연합을 해서 이겼는데, 찰스 테일러는 라이베리아 내전의 주범이자 아프리카에서도 손꼽히는 대량학살자로 현재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인물이라 큰 논란이 되고 있다.[6]
취임 후 1년이 넘은 2019년 5월 기준으로 달러 대비 라이베리아 달러 화폐 가치가 확 떨어지고 물가가 30% 가까이 상승[7]하여 경제적 불확실성에 시달리고 있다 한다. 경제 성장률은 1.2%에서 0.4%로 추락하고, 먹고 살기 어려워진 시민 1만여명이 인플레이션과 부패에 항의하여 거리시위를 하고 있다고. 이에 조지 웨아 대통령은 현지시간 6월 6일에 연설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시위자들에게 국가를 위협한다며 용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 마이티 배럴 (1985~1986)
    • 라이베리아 프리미어 리그 : 1985–86
    • 라이베리안 컵 : 1985–86
  • 인비서블 일레븐 (1986~1987)
    • 라이베리아 프리미어 리그 : 1986–87
  •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CSSA 네이션스 컵[8] 준우승 : 1987

4.2. 개인 수상



5. 웨아에 대한 말, 말, 말


'''"웨아는 놀라운 선수다. 나는 웨아만큼 피치에서 폭발력을 지닌 선수를 본 적이 없다."''' - 아르센 벵거

'''"조지 웨아는 내 선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선수이자 나의 우상이다."''' - 티에리 앙리[9]


6. 이야깃거리


  • 조지 웨아 본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본인의 이름이 팔려 의문의 1패를 당한 황당한 과거가 있다. 그레이엄 수네스 문서 참조.
  • 조지 웨아의 아들인 티모시 웨아도 미국에서 살면서 축구선수로 뛰고 있다. 포지션은 공격수로 2014년부터 파리 생제르맹 FC 유스팀에서 뛰다 2017년 7월 4일에 PSG와 2020년 6월 30일까지 계약기간 3년으로 프로 계약을 맺었다. 2017년 FIFA U-17 월드컵에 미국 주전으로 나와 16강전 파라과이 전에서 해트트릭을 넣으며 미국의 5-0대승을 이끌었다.
[1] 2018년에 만 51세의 나이로 자신의 마지막 A매치 경기를 치루었다.[2] 웨아는 밀란에서 발롱도르를 수상한 뒤 벵거에게 공을 돌렸다. 벵거는 자신이 발탁한 선수 중 가장 대단한 선수로 아직도 웨아를 꼽는다.[3]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역대 최장거리 골은 펠레의 골이다. 무려 '''자기 팀 골대 앞에서부터 상대 팀 골대 바로 앞까지 100m를 혼자서 뚫어버리고 넣은 골로,''' 이는 현재 라디오 중계자료만 남아있어 제대로 된 세계기록으로는 인정받지는 못한다.[4] 참고로 2번째로 긴 드리블 돌파 후 골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손흥민'''이다. 바로 그 유명한 19/20시즌 번리전의 75m 돌파 후 골. [5] 2무1패로 탈락하였다. 1경기 말리전, 2경기 알제리전 모두 1점차로 앞서다가 경기종료를 얼마 안 남겨두고 동점골을 내주었고, 나이지리아 전은 지면서 아쉽게 탈락하였다.[6] 이는 후진국에서 스포츠 선수가 정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독재자에 대한 반감마저 덮어버릴 정도로 영웅 취급을 받았다는 소리.[7] 물가가 상승하기 직전에 1억2600 라이베리아 달러를 새로 찍어냈다 한다.[8] 서아프리카 네이션스 컵의 전신이다.[9] 조지 웨아의 AS 모나코 시절부터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앙리가 말하길, 조지 웨아만큼 파워, 스피드, 테크닉을 겸비한 선수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