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빈 리비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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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빈 리비츠키[1] (Irvin W. Rybicki. 1921년 9월 16일~2001년 7월 24일)는 미국의 자동차 디자이너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제너럴 모터스를 이끌었던 수석디자이너였다.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있어 고등학교에서는 미술 훈련을 받았고,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프로젝트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이때부터 제너럴 모터스와의 인연이 시작되어 1945년 종전 후에는 GM의 디자이너로 취업했다.
1947년에는 GM 내부의 정식 디자이너로 인정받았고, 1950년부터는 고위 디자이너가 되었으며, 캐딜락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빌 미첼 수석디자이너의 디자인 팀에서 일했다. 당시 그의 디자인으로는 캐딜락 차량에 쓰이던 후미등 겸 연료 주입구 커버가 있었고, 1953년의 캐딜락 르망(LeMans) 컨셉트카의 디자인을 지휘하기도 했다. 1956년에는 올즈모빌로 넘어가 보조 수석디자이너로 근무했고, 이후 수석디자이너가 되어 올즈모빌의 컨셉트카들을 디자인했다.
1962년에 리비츠키는 쉐보레 스튜디오의 수석디자이너가 되어 지배인이였던 Bunkie Knudsen를 도와 저가차 및 트럭의 디자인을 보조했고, 1963년에는 쉐보레 콜벳에 견줄만한 스포츠카 컨셉트를 디자인했으나, 당시 쉐보레에는 있을만한 차가 다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적도 있었다. 1965년에는 쉐보레 및 GMC의 수석디자이너로, 그리고 1970년에는 쉐보레와 폰티악 승용차, GMC 트럭의 외관 디자인을 담당했는데, 이때 리비츠키의 팀이 1973년식 쉐보레 몬테카를로의 디자인을 맡았으며, 당시 쉐보레의 지배인이였던 존 들로리언[2] 이 아무 수정 없이 바로 양산했을 정도였다고. 나중에 GM 경영진들이 리비츠키식 몬테카를로의 대표적인 디자인 요소였던 오페라 윈도우(뒷 필러의 쪽창) 디자인을 온갖 차에 다 돌려쓰기도 했다.
1972년에는 올즈모빌과 뷰익, 캐딜락 승용차의 디자인을 지휘하기 시작했으며, 초대 캐딜락 세빌에 그의 디자인 요소가 반영되었으며, 1977년에 나올 차기 대형차와 1978년에 나올 차기 중형차들을 모두 디자인하는 일을 지휘했다. 그러다가 빌 미첼이 은퇴하면서, 리비츠키는 GM의 총괄 수석디자이너 자리를 이어받았다. 디자인에 돈을 아끼던 일이 거의 없었고 GM 내부의 모든 디자인을 쥐어잡던 선임자에 비하면, 질서와 팀워크, 비용 절감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과 일본 소형차들의 유입으로 자동차 업체들과 정부가 상당히 예민해져있었고, 게다가 당시 GM은 재무부서에서 회사의 온갖 일들을 지휘하던 시기였다. 이때 GM에서는 모든 차들을 소형화하는 데 급급해있었고, 정부에서도 안전 및 연비 규정들을 엄격하게 만들어가고 있었으며, 재무부서가 중심이 된 회사 내부에서는 비용절감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이때 리비츠키가 이끌던 디자인 팀은 안팎으로 압박을 받은데다 이를 충실히 따르는 리비츠키 본인의 성향 때문에 GM의 디자인에 있어서 암흑기 비슷한 것이 시작되었다.
이때 디자인된 GM차들은 비용절감과 소형화의 영향이 상당히 커지면서 덩치도 상당히 작아졌고, 나중에는 노골적 수준으로 뱃지 엔지니어링이 남용됨에 따라 앞뒤만 살짝 다르다뿐이지 완전히 똑같은 디자인의 차들이 쏟아지면서 차량의 질이 크게 폭락했다. 당시 GM의 무리한 비용절감도 여기에 기여했고, 더군다나 리비츠키는 이러한 GM의 요구를 준수하는 편이다보니 캐딜락 엘도라도같은 명차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차기작들도 예전에 비하면 그저 그런 수준의 차들만 가득해져갔다. 당연히 디자이너들의 권한도 대폭 축소되면서 반발도 적잖게 있었다. 아예 디자인 팀이 차종별 부품 공유안을 제안하거나, 연비규정을 이유로 기술팀이 완성된 디자인의 전장을 잘라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음에도 별다를 저항을 안 했다.
이후 리비츠키는 피닌파리나와 함께 캐딜락 알랑테 스포츠카의 디자인 시안을 두고 경쟁하다가 자신의 디자인 팀[3] 이 떨어진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전해지며, 1986년에 GM의 수석디자이너 자리에서 은퇴했다. 이후 2001년에 메사추세스에서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생전 인터뷰 내용
아래 사례들의 경우는, 리비츠키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것 외에 그가 관여한 디자인, 그에게 권한이 있었던 디자인, 그가 있던 시절의 디자인도 포함된다.
1. 개요
어빈 리비츠키[1] (Irvin W. Rybicki. 1921년 9월 16일~2001년 7월 24일)는 미국의 자동차 디자이너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제너럴 모터스를 이끌었던 수석디자이너였다.
2. 생애 및 업적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있어 고등학교에서는 미술 훈련을 받았고,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프로젝트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이때부터 제너럴 모터스와의 인연이 시작되어 1945년 종전 후에는 GM의 디자이너로 취업했다.
1947년에는 GM 내부의 정식 디자이너로 인정받았고, 1950년부터는 고위 디자이너가 되었으며, 캐딜락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빌 미첼 수석디자이너의 디자인 팀에서 일했다. 당시 그의 디자인으로는 캐딜락 차량에 쓰이던 후미등 겸 연료 주입구 커버가 있었고, 1953년의 캐딜락 르망(LeMans) 컨셉트카의 디자인을 지휘하기도 했다. 1956년에는 올즈모빌로 넘어가 보조 수석디자이너로 근무했고, 이후 수석디자이너가 되어 올즈모빌의 컨셉트카들을 디자인했다.
1962년에 리비츠키는 쉐보레 스튜디오의 수석디자이너가 되어 지배인이였던 Bunkie Knudsen를 도와 저가차 및 트럭의 디자인을 보조했고, 1963년에는 쉐보레 콜벳에 견줄만한 스포츠카 컨셉트를 디자인했으나, 당시 쉐보레에는 있을만한 차가 다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적도 있었다. 1965년에는 쉐보레 및 GMC의 수석디자이너로, 그리고 1970년에는 쉐보레와 폰티악 승용차, GMC 트럭의 외관 디자인을 담당했는데, 이때 리비츠키의 팀이 1973년식 쉐보레 몬테카를로의 디자인을 맡았으며, 당시 쉐보레의 지배인이였던 존 들로리언[2] 이 아무 수정 없이 바로 양산했을 정도였다고. 나중에 GM 경영진들이 리비츠키식 몬테카를로의 대표적인 디자인 요소였던 오페라 윈도우(뒷 필러의 쪽창) 디자인을 온갖 차에 다 돌려쓰기도 했다.
1972년에는 올즈모빌과 뷰익, 캐딜락 승용차의 디자인을 지휘하기 시작했으며, 초대 캐딜락 세빌에 그의 디자인 요소가 반영되었으며, 1977년에 나올 차기 대형차와 1978년에 나올 차기 중형차들을 모두 디자인하는 일을 지휘했다. 그러다가 빌 미첼이 은퇴하면서, 리비츠키는 GM의 총괄 수석디자이너 자리를 이어받았다. 디자인에 돈을 아끼던 일이 거의 없었고 GM 내부의 모든 디자인을 쥐어잡던 선임자에 비하면, 질서와 팀워크, 비용 절감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과 일본 소형차들의 유입으로 자동차 업체들과 정부가 상당히 예민해져있었고, 게다가 당시 GM은 재무부서에서 회사의 온갖 일들을 지휘하던 시기였다. 이때 GM에서는 모든 차들을 소형화하는 데 급급해있었고, 정부에서도 안전 및 연비 규정들을 엄격하게 만들어가고 있었으며, 재무부서가 중심이 된 회사 내부에서는 비용절감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이때 리비츠키가 이끌던 디자인 팀은 안팎으로 압박을 받은데다 이를 충실히 따르는 리비츠키 본인의 성향 때문에 GM의 디자인에 있어서 암흑기 비슷한 것이 시작되었다.
이때 디자인된 GM차들은 비용절감과 소형화의 영향이 상당히 커지면서 덩치도 상당히 작아졌고, 나중에는 노골적 수준으로 뱃지 엔지니어링이 남용됨에 따라 앞뒤만 살짝 다르다뿐이지 완전히 똑같은 디자인의 차들이 쏟아지면서 차량의 질이 크게 폭락했다. 당시 GM의 무리한 비용절감도 여기에 기여했고, 더군다나 리비츠키는 이러한 GM의 요구를 준수하는 편이다보니 캐딜락 엘도라도같은 명차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차기작들도 예전에 비하면 그저 그런 수준의 차들만 가득해져갔다. 당연히 디자이너들의 권한도 대폭 축소되면서 반발도 적잖게 있었다. 아예 디자인 팀이 차종별 부품 공유안을 제안하거나, 연비규정을 이유로 기술팀이 완성된 디자인의 전장을 잘라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음에도 별다를 저항을 안 했다.
이후 리비츠키는 피닌파리나와 함께 캐딜락 알랑테 스포츠카의 디자인 시안을 두고 경쟁하다가 자신의 디자인 팀[3] 이 떨어진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전해지며, 1986년에 GM의 수석디자이너 자리에서 은퇴했다. 이후 2001년에 메사추세스에서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생전 인터뷰 내용
3. 대표 디자인
아래 사례들의 경우는, 리비츠키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것 외에 그가 관여한 디자인, 그에게 권한이 있었던 디자인, 그가 있던 시절의 디자인도 포함된다.
- 2세대 쉐보레 몬테카를로
- GM 에어로 2002 컨셉트카.
- 1세대 캐딜락 스빌[4]
- 5세대와 6세대 캐딜락 드빌[5]
- 뷰익 레에타[6]
- 쉐보레 사이테이션/폰티악 피닉스/올즈모빌 오메가 등의 X-카 준중형차들.
- 3세대 쉐보레 카마로[7]
- 3세대 폰티악 파이어버드
- 폰티악 피에로[8]
- 5세대 올즈모빌 커틀라스 수프림, 쉐보레 루미나 등의 W-바디/GM10 중형차들.
- 쉐보레 카발리에, 올즈모빌 피렌자, 폰티악 선버드 등의 J-바디 준중형차들.
- 11세대 올즈모빌 98
- 쉐보레 콜벳 C3
4. 둘러보기
[1] 밥 루츠의 자서진 빈 카운터스의 한글판 표기. 2011년 1월 자동차생활에서는 "어빈 라이비키"라고 표기했으며 구글에서도 라이비키라는 한글 표기를 띄우고 있다.[2] 드로리안 스포츠카를 만든 사람이 맞다![3] 당시 캐딜락의 수석디자이너였던 웨인 캐디(Wayne Kady)가 디자인을 지휘했다.[4] 실질적으로는 빌 미첼이 지휘했으며, 리비츠키는 디자인에 참여한 것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5] 5세대 드빌은 존 메이슨(John Mason)의 디자인 제안을 기반으로 했다.[6] 당시 리비츠키의 팀 일원 중 하나인 Dave McIntosh가 1983년에 초본 디자인을 제안했다.[7] 제리 파머(Jerry Palmer)가 디자인을 맡았다.[8] Hulki Aldikacti와 George Milidrag가 디자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