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민영

 



'''정수장학회''' '''이사장'''
초대
이관구


제2대
'''엄민영'''


제3대
김현철

[image]
嚴敏永
1915년 2월 4일 ~ 1969년 12월 10일
대한민국의 전 공무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15년 경상북도 경산군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일본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1940년 조선총독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말기 전라북도 임실군수, 무주군수를 역임하였다.
8.15 광복 직후 전라북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농상부장, 농림국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학계로 진출하여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대한민국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5.16 군사정변 후인 1963년 상산 김도연이 이끄는 자유민주당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소선규와의 갈등으로 자유민주당을 탈당하여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1963년부터 1964년까지,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두 번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67년 11월부터 주일대사를 역임하다가 1969년 12월 10일 별세하였다.[1]
2008년 공개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분야에 선정되었다.
미국 백악관을 40년 동안 출입했던 문명자 기자의 기록에 의하면 엄민영은 좌익 경력자로 6.25 당시 월북했다는데, 그 후 아내와 아들을 이북에 놔두고 남쪽으로 내려 왔다가 미군 정보부대에 체포 되었고 전향해서 남쪽에서 새로 가정을 꾸몄다. 엄민영은 방첩부대 등을 거쳐 5.16 이후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도쿄에 주재하기도 했고 주일 대사와 내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엄민영이 주일대사로 부임해 신임장을 제정할 때 그의 경력 때문에 한.일 간에 마찰이 빚어진 일도 있었다. 통상 호적초본만 가지고 처리하던 일본측이 유독 엄민영에게는 호적 등본을 제출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엄민영이 주일대사로 재직하던 중 북에 남겨 둔 그의 아들이 연일 북한 방송에 출현해 "아버지, 저 00 입니다. 민족의 통일을 앞당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루 속히 북으로 오십시오."라고 엄민영을 부르는 사태가 생기자, 이 문제로 고민하던 엄민영은 일본 게이오 병원에서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공식적인 사인은 위장병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자살이었다.출처
또한 한상범 동국대 명예교수가 2005년 12월 20일 인터넷 매체 사람일보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엄민영은 원래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창이었으며, 해방 후 남로당 당원이 되었는데, 1950년 6.25 전쟁 직후엔 당시 북에서 남파된 역사학자 전석담 밑에서 서울지역 대학책의 중요 요직을 담당 활동하다가, 미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먼저 처자를 평양에 보내고 그 후에 월북하다가 동두천근처에서 미군포로가 되어 거제도에 수용되었다가 그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엄민영이 왜 포로가 되었는가 하면 노동당원은 전시에 ‘무장 빨치산’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무장한 부대원으로 월북하다가 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출처


[1] 그 후임 대사로 '''제갈조조''' 이후락이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