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우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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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 나치 독일의 군인. 제 1차 세계대전에서 62기를 격추시킨 전투기 에이스였으며, 전간기에 루프트바페가 창건되면서 군으로 복귀하였다. 2차 대전기 동안에는 항공기 생산 및 조달의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최종계급은 상급대장.
2. 생애
우데트는 1896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하였으나 성장기를 보낸 것은 주로 뮌헨이었다. 집 근처에 항공기 공장이 있었고, 어렸을 적부터 자신이 날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우산을 펴고 지붕에서 뛰어내리기도 하는 등 항공분야에 관심을 갖고 자랐다. 항공기 동호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는데 1913년에는 테스트 파일럿으로 첫 비행을 소화하기도 하였다.
2.1. 1차세계대전, 그의 리즈 시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우데트는 육군 항공대에 지원하였으나 160cm라는 작은 키로 인해서 입대할 수 없었지만 오토바이 기증자에 한해서 입대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오토바이를 기증하고 전령병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복무 중 폭격으로 인하여 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원 소속부대와도 멀어져 복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군 병원에 있으면서 만난 독일 제국 항공대 장교로부터 항공 정찰대 소속으로 근무할 것을 조언받고 항공 정찰대로 배속되었으나 다시 원대 복귀의 명령이 내려지면서 혼선을 빚게 되었었다.
항공대로 전출을 원했던 우데트는 민간 비행사자격증이 있으면 바로 항공대 파일럿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렸을 적 테스트 파일럿을 시켜준 친구에게 부탁하여 민간 비행사 자격증을 받았고 이를 통해서 육군 항공대 전투기 조종사가 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육군 항공대 전투기 조종사가 된 뒤에도 무모한 기동술을 시험하다 기체를 갈아먹어서 영창에 가기도 하는 등 사고뭉치였었으나 고장난 항공기를 조종술로 커버하여 무사 복귀하는 등의 실력있는 파일럿이기도 했다. 이 일로 철십자 훈장 2등급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물론 죽을 뻔한 적도 많다. 프랑스 육군의 톱 에이스 조르주 기느메르(Georges Guynemer, 54기 격추)와 대결한 적이 있는데, 기관총이 고장나서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기네메르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그냥 보내줘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전최강 전투기 대전에도 소개된, 초창기 공중전 특유의 낭만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
이 일이 있은 후 우데트가 소속했던 15전투비행대는 그의 지휘관과 우데트 본인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하였고, 37전투비행대로 전속되게 된다. 조르주 기느메르와의 교전 이후 우데트는 기느메르의 공격방식을 벤치마킹하여 태양을 등지고 높게 올라가 적의 편대 가장 끝의 비행기 뒤를 쫒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점차 육군 항공대에서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전투비행대의 편대장까지 오르게 된다.
이후 제1전투항공단의 붉은 남작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이 이끄는 엘리트 편대 '플라잉 서커스'로 전속되어 격추 스코어를 꾸준히 늘려나갔다. 플라잉 서커스에서도 리히트호펜이 맡았던 11전투비행대의 편대장을 맡았다. 1918년 당시 앓던 질병으로 오랜기간 동안의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았으나 그 해에 리히트호펜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고, 또 우데트 본인도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게되면서 다시 군으로 돌아와 1918년 그 해에만 20여대의 적기를 격추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인격추 62기를 기록한 독일의 에이스. 붉은 남작에 이어 독일 제국군 2위 에이스였으며, 종전까지 살아남은 에이스 중에서는 가장 높은 기록이었다.
우데트는 마지막 프랑스군과의 교전에서 항공기간의 충돌로 인하여 추락하였고 간신히 낙하산이 펼쳐지면서 목숨은 건졌으나 큰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으로 군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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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전간기
▲전간기 시절, 곡예비행을 선보이는 우데트
전후에는 다른 수많은 전투비행사들이 그랬듯이 몇 년동안 민간 항공기의 곡예비행사로 일했으며, 날개 끝으로 지상의 손수건을 걷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조종술을 가지고 있었다. 곡예비행사로 일하면서 영화 촬영에도 참여하였으며 레니 리펜슈탈과도 같이 작업하기도 하였고 북미와 남미 등을 오가며 활약하였다.
이러한 민간 활동은 자신이 설립한 항공기 회사를 홍보하는 데에 좋은 효과를 거두었고 미국의 재력가의 지원을 받아 우데트 플룩저이크바우(Flugzeugbau )라는 상업용 항공기 제조사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항공기 제조사 경력은 이후 다시 군으로 복귀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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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에 입당해서 아돌프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으며, 그 덕분에 1935년, 독일 국방군의 신생 공군에 대령의 계급장과 함께 루프트바페의 항공기 조달 책임자가 된다. 미국에 갔다가 헬다이버 폭격기를 보고 "우왕ㅋ굳ㅋ"을 외치면서 히틀러한테 의견을 상신, Ju87 슈투카 급강하폭격기를 개발하게 했다. 이후 단좌 1인승 전투기 개발을 추진해서 여러 시제기를 몸소 몰아본 이후, Bf109 모델을 선택한다.
그런데 이후론 병맛이 물씬 풍기는 행정 수완을 발휘했다. 원래 4개였던 전투기 개발 부서를 '''13개'''로 나누는 등 행정 계통을 쓸데없이 세분화시킨 덕분에 원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도 못한 채 관료제의 단점만 잔뜩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공군 내의 세력 다툼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항공기 원자재 수급의 문제점 등으로 인하여 차질을 빚자 괴링과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등의 갈등도 매우 심화되어만 갔다.
게다가 사생활에도 문제가 많았는데, 상당한 주당이었다고 전해진다. 1940년 기사십자 철십자훈장을 수여받고 상급대장으로 진급하고 난 뒤에도 술과 담배에 빠져 사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1941년 11월 17일 우데트 장군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자신의 죽음이 괴링의 탓으로 돌리는 내용의 유서가 확인되었다.
게다가 죽은 후에까지 독일 공군에 민폐를 끼쳤는데, 전투기 총감이자 최고의 에이스로 모든 조종사들의 신망을 받던 베르너 묄더스 대령 등 여러 조종사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He-111 폭격기를 타고 이륙하다 사고로 사망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죽음으로 중장거리 폭격기 계획이 사실상 폐기, 제3제국의 패망을 부채질했다. 사실 장거리 폭격기 계획 자체는 그 이전인 1936년에 발터 베버 장군이 사고로 사망한 이후 찬밥신세기는 했다.
[1] 동체의 마킹은 그의 소꿉친구이자 연인이던 Eleanor "Lo" Zink의 애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