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니 리펜슈탈

 

'''Berta Helene Amalie "Leni" Riefenstahl'''
'''베르타 헬레네 아말리 "레니" 리펜슈탈'''
'''생몰: 1902년 8월 22일 ~ 2003년 9월 8일 (향년 10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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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를 들고 있는 자화상[1]
아돌프 히틀러와 담소를 나누며 웃는 리펜슈탈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기타등등


1. 개요


독일의 여성 무용가, 배우, 영화감독, 사진작가. 무려 101세까지 장수#s-3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독일 제국의 몰락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의 성립과 붕괴, 나치 독일의 등장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한 독일의 동서 분단재통일까지 1세기에 걸친 격동과 굴곡의 독일 근현대사를 모두 지켜본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베를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무용에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3년, 표현무용의 무용가로 데뷔하게 된다. 그녀는 무용가로서 "몸"에 대해서 집요하게 탐구했고, 특히나 "강인한 육체"에 집중했다.
이런 리펜슈탈의 성향에 대해서 어떤 이는 "'''타고난 파시즘의 징조'''"라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가 고전주의를 선전에 악용하였던 것이지, 결코 '고전주의 = 파시즘'은 아니다.
유럽 각지를 다니면서 공연하던 중 프라하 공연에서 무릎부상을 입은 리펜슈탈은 결국 무용가로서의 길은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된 산악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영화에 흥미를 가진 그녀는 무릎수술을 받은 후, 아르놀트 팡크 감독과 함께 산악영화 제작에 뛰어든다. 빼어난 미모와 강인한 육체를 지닌 리펜슈탈은 산악영화의 여주인공으로서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스타 영화배우에만 만족할 수 없었던 리펜슈탈은 1932년, 자신의 프로덕션을 차리고 자신이 제작, 각본, 감독, 주연을 모두 맡은 영화 "푸른 빛(Das Blaue Licht)"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도 초청 받으면서, 그녀는 이제 영화감독으로서의 명성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리펜슈탈의 영화를 보고 팬이 된 한 남자와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에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주게 된다. 그 남자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리펜슈탈의 영화 "푸른 빛"을 보고 열성적인 팬이 된 히틀러는 후원자가 되었고 히틀러와 괴벨스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리펜슈탈은 뛰어난 재능을 나치즘선전하는데 쓰고 만다.
리펜슈탈의 첫 번째 나치 프로파간다 영화는 1933년작 "신념의 승리(Der Sieg des Glaubens)"로, 뉘른베르크에서 1933년 8월 30일부터 9월 3일까지 열린 제 5회 나치 전당대회를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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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35년, 히틀러의 요청으로 역시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당대회를 촬영한 영화 "의지의 승리"(풀버전, 마지막 연설부분)를 만들게 된다. 의지의 승리는 당시로선 찾아보기 어려운 혁신적인 촬영기법과 카메라 구도, 효율적인 음악 사용 등으로 히틀러를 최고의 영웅으로 돋보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의지의 승리"에 크게 기뻐한 히틀러는 다른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자신을 홍보하는 영상은 오로지 "의지의 승리"로 할 것을 명할 정도였다. 오늘날에는 '독재자와 전범을 미화, 우상화한 작품'으로 호된 비판을 받지만, 촬영기법이나 드라마틱한 연출기법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레니 리펜슈탈의 전기를 기록한 오드리 설킬드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D. W. 그리피스의 자극적인 영화 국가의 탄생을 제외한다면, 영화사에서 의지의 승리만큼 오랫동안 논란을 일으킨 영화는 없었다. 우리는 의지의 승리를 그 이후에 나치가 저지른 만행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 또 이 영화는 본래 감정과 감각에 호소하도록 만들어진 감정적인 영화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평가를 요구하는 것은 이성적인 평가를 받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 이 영화의 뛰어난 예술적 기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영화 자체보다 파시즘에 매혹되었다고 생각될까봐,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오랫동안 억눌러왔다.” -오드리 설킬드

이듬해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오토 마이어의 요청으로 베를린 올림픽의 기록영화 "올림피아" 2부작을 만들게 된다. "올림피아"는 히틀러의 전폭적 지원하에 최첨단 영화기자재들을 맘껏 구사하였고, 리펜슈탈 자신의 재능도 최고로 끌어낸 걸작 영화였다. 다만 문제는 나치즘의 아리안 우월주의를 찬양하는데 이 모든게 이용되었다는 것이었지만(…)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독창적인 영상미학을 선보였다.
"올림피아"에서 리펜슈탈이 가장 주목했던 선수는 바로 손기정 선수였다. 과묵한 동양의 마라토너에게 반한 그녀는 "올림피아"에서 손기정의 영상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었다. 리펜슈탈은 "올림피아"로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하게 된다. 손기정은 마라톤 경기가 끝나고 3일후에 리펜슈탈의 저택에 초대받았고[3] 종전 후에도 만남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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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치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자신의 선택에 혹독한 책임을 져야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리펜슈탈은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녀는 "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영화미학만을 생각했다"라고 고집스럽게 자신을 변호했다.[4] 이런 그녀의 일관된 고집스러운 태도가 나치즘에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는 악랄하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전범재판에서는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사실상 독일 사회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하게 된다.
전쟁 전부터 기획했던 영화 "저지대(Tiefland)"를 1953년 개봉했지만 흥행에 실패하고 나치즘을 찬양한 영화감독이라는 꼬리표는 그녀의 남은 생애 평생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결국 온갖 비판과 중상모략에 법정다툼으로 일생을 보냈고, 악평을 받는 리펜슈탈과의 영화작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스탭들도 없어서 결국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사진작가의 길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1962년부터 아프리카의 누바족을 만나 10년에 걸쳐 그들의 생활을 사진에 담았고 1973년, 10개국에서 사진집 "누바"를 출판하여 아티스트로서 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진집 "누바"에서도 촬영 기법이 나치즘을 찬양한 "의지의 승리"나 "올림피아"와 유사하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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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리펜슈탈. 세상을 떠나기 8개월 전인 2003년 1월 18일 뒤셀도르프에서 촬영
리펜슈탈은 73세의 나이에 나이를 속이고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하고 바다속을 촬영한 사진집을 내놓기도 할만큼 늙어서도 도전정신은 멈추지 않았다. 2002년, 무려 100세의 나이에 직접 스쿠버 다이빙을 하여 ''물 아래의 인상(Impressionen Unter Wasser)"[6]이라는 영화를 오랫만에 제작했다. 이것은 리펜슈탈 최후의 영화가 되었고, 이와 함께 역대 최고령 스쿠버 다이버의 기록도 세웠다. 이듬해 2003년,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리펜슈탈의 일생은 도전의 일생이라 할 만한데 무용가로 시작해서 배우로, 영화감독으로, 노년에는 스쿠버 다이빙까지 할 정도로 끈질기게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영화사에 길이남을 새로운 시도를 한 뛰어난 재능의 감독이란 평가와 나치즘을 선전한 인물이라는 평가[7]가 그것들이다. 하지만 리펜슈탈의 가치관이나 나치즘 선전 영화를 찍은 행적들을 떠나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감독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전후 현대 영화는 리펜슈탈의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파시즘과 스펙타클에 대한 비판과 고찰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후대에도 (주로 안 좋은 쪽/비판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특히 독일 전후 세대들이 이끈 뉴 저먼 시네마는 리펜슈탈의 유산을 거부하고 새로운 언어를 찾으려고 투쟁한 걸로 유명하며, 그 중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그의 히틀러는 리펜슈탈이 영화를 통해 신화화한 히틀러를 중점적으로 해체하고 고찰하고 있다.

4. 기타등등


  • 죽기 직전 그녀는 "히틀러를 만난 건 내 일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우리의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투쟁을 영화화한다.
  •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몰리나가 하는 영화 이야기 중 두번째 영화인 나치 선전영화의 여주인공 '레니'가 레니 리펜슈탈과 연관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레니 리펜슈탈이 등장하진 않고 대사로 언급된다. 독일어 발음이 형편없는데 독일영화를 잘 안다는 이유 하나로 적지에 잠입하게 된 영국장교 히콕스가 그의 발음을 미심쩍게 여기는 SS장교에게 산골 오지 출신으로 리펜슈탈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적이 있다고 둘러댄다.
  • 페르시아의 왕자의 제작자인 조던 메크너가 방문해 인터뷰 하기도 했다. 다만 촬영기기를 가져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에 휴대용 테이프 리코더만 지참해야 했다고.

[1] 레니 리펜슈탈 본인의 캐릭터를 잘 드러낸 것으로 사진 역사에서 걸작 자화상 중 하나로 꼽힌다. 킬링 조크의 표지에서도 오마주된 것으로도 유명하다.[2] 영화 내에서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돌격대 수장들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문제는 이들이 1934년 장검의 밤을 거치면서 모두 숙청됐다는 것인데, 따라서 이후로 신념의 승리는 독일 내에서 상영이 금지됐으며 히틀러의 명령으로 원본 필름 뿐만 아니라 복사본들도 모두 파괴됐다.[3] 뒷날 저택이 덕수궁보다 크더라고 회상했다.[4] 여론에 아랑곳않고 당시 몸에 달라붙는 도발적인 스키니 가죽바지를 입고 법정에 출두한 것도 리펜슈탈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일화.[5] 따지고 보면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본인의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이 죄는 아니니까.[6] 영어제목('Underwater Impressions)을 그대로 읽은 언더워터 임프레션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7] 나치의 헤드 치어리더(...)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