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스 예레미스
1. 개요
1990년대 중후반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함께 바이에른 뮌헨의 중원을 지켰으며, 당시 암흑기를 겪고 있는 독일 대표팀에도 고군분투하여 A매치 55경기 1골의 기록을 남겼다.
2. 플레이 스타일
주포지션은 앵커맨 타입 수비형 미드필더로 터프한 몸싸움과 정확한 태클능력이 강점. 신장이 큰 편이 아님에도 헤딩능력도 좋았고 굳은 일을 도맡는 하드워커형 꾸르소레. 예레미스가 전성기를 맞은 바이에른 뮌헨에서 오트마어 히츠펠트감독이 3-4-3을 썼는데, 예레미스는 주전 앵커맨 로타어 마테우스와 중앙 공미 슈테판 에펜베르크 사이에서 앵커를 담당하며 이들의 오버래핑및 공격참가를 백업하고 수비시에는 활동량을 앞세워 3백 앞을 청소하는 역할을 전담했다.
다만, 예레미스는 공격력이 전무한 수비 몰빵형 선수였고, 중앙지향적 성향의 앵커맨 플레이 때문에 일반적인 4-4-2에서는 박스 투 박스로는 쓸 수 없는 선수였다.[1] 최적화된 포지션은 전술한 3-4-3의 CDM자리나 3-4-1-2의 더블 볼란테 한 자리. 사미 케디라도 독일 국대 중미로 뛰어난 안정감을 보였지만 공격력 없다고 꽤나 까였는데, 케디라보다도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이때문에 바이에른 뮌헨이나 국가대표에서는 풀타임 주전이라기보단 수비형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기용되는 수준이었다. 현 대한민국 국가대표의 한국영 정도의 위치와 비슷한 선수.
2000년대 이후부터는 도르트문트와 레버쿠젠에 밀려 우승을 놓치는 충격으로 인해 팀 시스템 변화를 도모하고, 미하엘 발락,제 호베르투 레버쿠젠 중미라인을 그대로 수혈하여 4백 시스템으로 변경하면서 예레미스는 자연스럽게 잉여자원이 되었다. 20대 시절 터프한 플레이는 30대가 접어들면서 몸의 혹사로 인해 서서히 유리몸기질을 보였기 때문에 사실상 백업자원이나 다름없었지만 바이에른 뮌헨에 대한 충성심때문인지 05~06시즌까지 팀에 남아서 백업으로 뛰었고, 06시즌 종료후 은퇴했다.
에펜베르크에 가려서 그렇지 파이팅 넘치는 미드필더 답게 카드 수집가였고 실제 성격도 불같았다.[2]
3. 선수 경력
구 동독의 괴를리츠 출신으로, 6세의 나이에 모터 괴를리츠에 입단하며 축구를 시작했고 동독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인 디나모 드레스덴에 12세의 나이로 유스팀에 합류하였다. 그는 프로 데뷔 이후, 디나모 드레스덴에서의 2년동안 간간히 출장하였지만, 겨우 10경기 출장에 그친다.
4. TSV 1860 뮌헨
1995년, TSV 1860 뮌헨으로 이적하여, 3년동안 80경기를 소화했고 이적 2년 만에 1860뮌헨을 UEFA 컵에 진출시켰다. 1860 뮌헨에서 그는 터프한 플레이를 보이며 무려 '''30장의 옐로카드'''를 받으며 카드 수집가로 명성을(?) 떨쳤고 때 마침 독일 대표팀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디터 아일츠'''가 은퇴함에 따라 그의 대체자로 1997년 남아공과의 A매치 경기에 발탁이 된다.
4.1. FC 바이에른 뮌헨
1998년 여름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예레미스는 당시 뮌헨의 수비형 비드필더로 활약하던 '''토마스 슈트룬츠'''가 장기부상을 당하자 바로 그 자리를 메꿔주면서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함께 강력한 미드필더 라인을 구축하고 2년만에 분데스리가 정상을 탈환한다. 하지만 유럽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맨유와의 경기에 그 '''캄프 누의 비극의 희생'''이 되어 유럽정상에 등극하는데 실패한다. 절치부심으로 2년 후 예레미스는 UCL에서 그야말로 최고의 활약을 펼치는데 총 12경기에 출장을 해 3골을 넣으며 2001년 뮌헨의 UCL우승의 주역이 된다. 단 레알 마드리드와의 4강전에서 경고누적으로 결승전에 나오지 못한 것은 흠..[3]
단 이와 별개로 국가대표에서의 활약은 점점 떨어졌는데 UEFA 유로 2000전 당시 대표팀 감독인 리베크 감독으로부터 형편없다며 혹평을 들었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루디 푈러 감독에 재신임을 얻는데 성공하지만 대부분 교체출장에 그쳤고 특히 파라과이와의 16강전에서 선발로 나섰다가 '''미하엘 발락과의 상성에 최악을 달리면서 재앙과도 같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이는 전술한 4백 불가형 선수라서가 가장 큰 이유인데, 독일은 조별예선까지 3-5-2를 쓰다 16강전에서 4-4-2로 포지션을 변경하였는데 공격력이 없는 선수한테 4-4-2 박스 투 박스를 맡기다보니 미하엘 발락과 호흡에서 크나큰 문제를 보였고[4] 결국 펠러감독은 다시 3-5-2로 돌아서게 된다. 결국 이 후에도 벤치신세를 지다가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발락의 결장으로 인해 그 자리를 예레미스가 메꾸게''' 된다. 발락이 결장한 자리를 채울 능력이 없는 예레미스는 팀에 별다른 공헌을 못하고 0-2로 패배하면서 2002 월드컵을 아쉽게 마무리한다.
그리고 서른 줄이 넘으면서 서서히 예레미스의 폼도 하락되어가고 있었다. UEFA 유로 2004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를 했고, 소속팀에서도 진작부터 발락, 제 호베르투에 밀린 상태였지만, 당시 신예인 마르틴 데미첼리스[5] 에게까지 순위에서 밀리면서 2006년 32세의 비교적 젋은 나이에 은퇴를 하게 된다.
[image]
죄측부터 비셴테 리사라수, 미하엘 발락, 옌스 예레미스[6]
5. 수상
- FC 바이에른 뮌헨 (1998/99 – 2005/06)
- Bundesliga (6) : 1998/99, 1999/00, 2000/01, 2002/03, 2004/05, 2005/06
- DFB-Pokal (1) : 1999/00, 2002/03, 2004/05, 2005/06
- UEFA Champions League (1) : 2000/01 / Runner-up (1) : 1998/99
- UEFA Super Cup Runner-up (1) : 2001
- DFB-LigaPokal (3) : 1998, 1999, 2000, 2004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1997 - 2004)
-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 2002 Runner-up (1) : 2002
[1] 4백 앞에 서는 수비형 미드필더의 가장 중요한 임무중 하나가 오버래핑하는 풀백 스위칭임을 생각하면 된다. 예레미스는 이게 전혀 안됐다.[2] 사진의 11번 선수가 바로 시니사 미하일로비치. 축구팬이면 아는 그 미하일로비치가 맞다.[3] 그리고 결승에서 그를 대체한 선수가 하필 유리몸의 황제 였다는 거...[4] 꽤 오랫동안 3-5-2를 유지하다가 이 시기부터 쇠락했던 독일 대표팀은 암흑기를 보내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클린스만아 4-4-2 시스템을 선보였는데 이 때 발락의 파트너는 토어스텐 프링스였고 이 둘은 최적의 호흡을 보이며 독일축구의 화려한 부활을 알린다.[5] 당시 데미첼리스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센터백으로 뛴건 2006/07 시즌부터.[6] 리자라쥐와 예레미스는 은퇴식과 발락의 고별식을 동시에 열었는대 뮌헨팬들은 발락한테만 야유를 보냈다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