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셴테 리사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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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통 프랑스어식 발음에 따른 '빅상트 리자라쥐'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출신지인 바스크 지방의 바스크어로 발음하면 비셴테 리사라수([biˈʃente lis̻aˈɾas̻u])가 된다. 영어판 위키백과
소수민족인 바스크족 출신으로 1969년 12월 9일 프랑스 쪽 바스크 지방의 생장드뤼즈 태생이다. 때문에 관청에 출생신고를 하러 갔을 때 관청 공무원들이 Bixente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이름인 '뱅상(Vincent)'으로 고쳐서 등록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관청에 머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요, 우리 부모님이 지어 주신 Bixente라는 이름을 지들 맘대로 Vincent로 써서 호적에 올렸어요. 뱅상이 누구인지 난 모르겠어요."라고 한다. 1996년에야 법적 절차를 거쳐서 자신의 원래 이름으로 호적을 정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풍미한 세계 최고의 수비수로 말 그대로 당대 최고의 윙백이자 수비수의 전설이다. '''레블뢰 군단과 바이언의 왼쪽을 책임지던 전설적인 풀백'''이고, 철의 포백의 일원이다.[3]
FC 바이에른 뮌헨 시절 출장경기수를 보면 부상때문에 그리 많은 경기에 출장한 선수는 아니다. 그럼에도 최고의 선수들만 등극할 수 있는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에 오른걸 보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를 알 수 있다.
2. 클럽
2.1. FC 지롱댕 드 보르도
1988년 프랑스의 FC 지롱댕 드 보르도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보르도에서 젊은 시절부터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1992년부터는 프랑스 국가대표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95-96 UEFA컵이었다. 리사라수의 소속팀 지롱댕 드 보르도는 8강에서 세리에 A의 강팀 AC 밀란을 격침시키고 결승전까지 진출하였다. 사상 첫 UEFA컵 우승을 눈앞에 두고 만난 상대는 바이언이었고, 보르도는 안타깝게도 결승전에서 바이언에게 완패하였다. 하지만, 이 UEFA컵으로 인해 리사라수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마치 2008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앙헬 디마리아가 유명해지듯.
2.2. 아틀레틱 클루브
이듬해, 8년간 몸담았던 소속팀을 떠나서 리사라수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아틀레틱 빌바오에 입단하였다. 빌바오 팀은 바스크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바스크인으로만 구성되는 팀이었는데, 리사라수가 이 팀에 입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역시 바스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바스크지역은 스페인과 프랑스 양국에 걸쳐있는데 리사라수는 북부 바스크 출신으로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리사라수는 빌바오 팀 사상 첫 외국인 선수라는 역사적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4]
2.3. FC 바이에른 뮌헨
빌바오에서 한 해를 보낸 후, 1997년 리사라수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FC 바이에른 뮌헨에 입단하였다.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리사라수의 기량은 절정에 이르렀고, 지난날 UEFA컵 결승전에서 만났던 바이언에서 당당한 주연으로 빛나는 역사를 만들어 갔다.
1998년부터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최고의 팀으로 군림하며 3년 연속으로 우승하였고, 뿐만 아니라 UEFA 챔피언스리그 2000-01 시즌에서 리사라수는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면서, 바이언을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2000-01 시즌 챔스에서 활약이 장난 아니였던 것이 8강에서 만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데이비드 베컴을 완벽히 봉쇄하면서 자신이 결장하였을 때 벌어졌던 1998-1999 챔스결승에서 벌어진 캄프 누의 비극을 되갚아주었고, 4강에서는 레알 마드리드 CF의 루이스 피구를 지워버렸다.[5] 결승에서는 당시 윙어들중에서는 날린다던 발렌시아 CF의 가이즈카 멘디에타를 삼켜버리면서 바이언의 왼쪽측면을 지배하였다.
리사라수는 황금기 바이언의 빠질 수 없는 중심 선수였다. 그리고 같은 프랑스 대표팀 후배인 윌리 사뇰의 영입에도 큰 공을 세웠다.
한편 2004년 바이언을 떠나 프랑스의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 뛰기도 했었는데, 당시 필립 트루시에 감독과 선수 기용법에 관한 마찰이 생겨서 반년 만에 다시 바이언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선수 생활 마지막까지 바이언에서 뛰었고, 2006년에 공식 은퇴를 선언하였다.
3. 국가대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멤버로서도 레프트백 위치에서 부동의 중심 선수로 맹활약한 리사라수는 당시 프랑스 대표팀의 철벽 수비를 이끄는 선수 가운데 하나였다.[6] 특히 리사라수는 주전으로 뛸때 프랑스의 왼쪽 사이드를 단독으로 책임졌다. 당시 오른쪽의 로베르 피레스에 비해 왼쪽 사이드에는 확실한 윙어가 없었으며, 중앙의 티에리 앙리, 지네딘 지단이 주로 왼쪽 사이드에 처져서 플레이하는 경향 때문에 왼쪽에서 앙리, 지단의 백업을 전천후로 수행하는 역할은 바로 리사라수의 역할. 이때문에 리사라수는 지네딘 지단을 완벽하게 보호하여 지단이 종횡무진 활약할 수 있도록 크게 뒷받침해줬다.[7] 리사라수의 보좌에 힘입어 지단은 혼자 힘으로 경기를 뒤집고 팀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8] 실제로 리사라수가 없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지단은 비록 준우승은 했으나 대한민국과 비기는 등의 졸전을 하기도 했다. 리사라수 대신 주전 레프트백으로 출전했던 에릭 아비달이 설기현에게 스피드로 밀리면서 동점골의 빌미를 허용하기도 했다. [9]
리사라수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UEFA 유로 2000에서 프랑스의 우승에 공헌하고, UEFA 유로 2004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으며, 프랑스 대표팀에서 통산 97경기에 출전해 2골을 기록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호베르투 카를로스를 위시한 브라질 윙백들이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상대를 휘저었다면 리사라수는 공격력과 수비력을 모두 갖춘 풀백으로 뛰어난 테크닉과 수비력으로 상대 윙어를 무력화 시키며 측면 공격을 이끄며 만나는 팀의 상대 공격수마다 다 집어삼키기로 악명높은 수비수였다.
다소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리사라수는 프랑스 국대의 자랑 철의 포백(비셴테 리사라수-마르셀 드사이-로랑 블랑-릴리앙 튀랑)의 일원이며 지네딘 지단과 같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우승멤버'''이다! 리사라수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풍미한 세계 최고의 수비수이며 현대 축구 레프트백 통산 순위로 따지면, 부동의 원톱 말디니보다는 아래지만 호베르투 카를루스와는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레전드급 레프트백이라 할 수 있다. 브라질에 카푸- 호베르투 카를로스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릴리앙 튀랑-비셴테 리사라수가 있었고 1998 프랑스 월드컵 결승에서 릴리앙 튀랑-비셴테 리사라수가 완승을 거두었다.
5. 은퇴 후
은퇴 후에는 잠깐씩 축구 해설을 했었지만, 설상종목인 스켈레톤에서 40세에 우승했던 인물에 큰 영향을 받아 2006년, 2010년 동계 올림픽에서 스켈레톤 프랑스 대표가 되기 위한 도전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브라질리안 주짓수를 수련하더니 2009년 유러피언 대회 파란띠 부문에서 '''우승'''해버렸다.
몇년 뒤 보라띠에서는 3위...
주짓수를 수련하기 시작한 이유는 자신의 오래된 취미인 서핑에 필요한 근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근본이 축구선수, 더군다나 월드컵 우승 멤버였는지라 다리 힘이 겁나 쎘을 것이다. 그래서 브라질리안 주짓수 대회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2006년부터 프랑스 여배우인 클레르 켐과 12년째 연애중이다. 둘 사이에는 2008년에 8월에 태어난 딸 우하이나 (Uhaina)가 있다.
6. 리자라수에 대한 말말말
'''나는 라이트윙으로 뛰면서 수많은 레프트백과 맞붙어봤다. 카를로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리사라수를 최고로 꼽는다. 리사라수는 말디니의 수비력과 카를로스의 공격력을 갖춘 선수이며 어떠한 라이트윙도 그와 마주치는걸 반기지않는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10]
'''나는 언제나 내가 뛰는 팀에서 왼쪽 수비는 리사라수가 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7. 기타
- 리사라수는 69라는 숫자와 많은 인연이 있었다. 1969년 생인 데다가 키169cm, 몸무게 69kg이기까지 했으니... 그래서 바이에른 뮌헨에서 선수로 뛸 때의 등번호도 69번으로 했다.'
- 2000-01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당시 빅이어를 머리에 쓰는 세레머니를 했던걸로 유명하다. 이는 나중에 19년 후 같은 팀의 한 후배가 따라하기도 했다.
8. 경력
8.1. 우승 기록
- 지롱댕 보르도 (1988/89 - 1995/96)
- 프랑스 리그 되 (1) : 1991/92
- UEFA 인터토토컵 (1) : 1995
- UEFA 컵 준우승 (1) : 1995–96
- FC 바이에른 뮌헨 (1997/98 - 2003/04, 2005/06)
- 독일 분데스리가 (6) : 1998/99, 1999/00, 2000/01, 2002/03, 2004/05, 2005/06
- DFB 포칼 (5) : 1997/98, 1999/00, 2002/03, 2004/05, 2005/06
- DFB-리가포칼 (4) : 1997, 1998, 1999, 2000
- UEFA 챔피언스 리그 (1) : 2000/01 / 준우승 (1) : 1998/99
- UEFA 슈퍼 컵 준우승 (1) : 2001
- 인터컨티넨탈컵 (1) : 2001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8.2. 출전 기록
8.3. 개인 수상
- ESM 선정 올해의 팀: 1998/99
- UEFA 선정 올해의 팀: 2001
- 프랑스 축구 선수 협회 선정 20인: 2011
[1] 1998년 FIFA 월드컵 수훈,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Légion d'Honneur Chevalier[2] 과거 바이에른 뮌헨에서 뛸 당시에는 몸무게가 '''69'''kg이었다. 19'''69'''년생에 키1'''69'''cm 몸무게 '''69'''kg이었던 리사라수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등번호 '''69'''번을 달고 뛰었다.[3] 참고로 나머지 셋은 릴리앙 튀랑, 로랑 블랑, 마르셀 드사이다.[4] 리사라수와 같이 북부 바스크 출신인 프랑스 선수로는 디디에 데샹 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있다. 단 디디에 데샹은 빌바오에서 뛴 적은 없다.[5] 이 때 리자라수에게 된통 당한 피구는 리자라수를 카를루스의 공격력과 말디니의 수비력을 갖춘 선수라고 극찬하였다.[6] 리사라수와 튀랑이 워낙 특출났던 탓에 어디 놓아도 주전을 차지할 실력이 있던 뱅상 캉델라는 국대에서 백업역할에 그쳤다.[7] 리사라수는 지네딘 지단에 대해 "나는 경기 중에 어디로 패스해야 될지 모를 때 지단에게 패스한다."라는 말을 통해 그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드러냈다. 선수 은퇴 역시 지단이 은퇴선언을 한 4일 후에 같이 하게 된다.[8] 사실 디디에 데샹도 그랬고 당시 프랑스는 어느 정도 지단에게 몰아주는 경향이 있었다.[9] 살짝 과장이 섞였긴 하지만, 그 때 프랑스와 지단이 전성기도 아니고, 우승을 노리는 강팀들은 죽음의 조가 걸리지 않는 이상 보통 조별리그에서 혼신의 힘을 쏟지는 않는다. 설사 완벽한 포스를 뿜는 스쿼드의 대표팀이라도 조별 리그 한 경기쯤은 얼마든지 부진할 수 있다. 10년 스페인도 막강한 포스를 뿜으며 우승했지만 조별리그에선 스위스에 패했듯이. [10] 근데 사실상 피구가 제일 처참하게 발린건 송종국이란건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