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발락

 

''' 미하엘 발락의 역임 직책 '''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올리버 칸
(2000~2004)

'''미하엘 발락
(2004~2010)
'''

필립 람
(2010~2014)

''' 미하엘 발락의 수상 이력 '''

''' 독일의 前 축구선수 '''
'''이름'''
'''미하엘 발라크[1]
Michael Ballack'''
'''출생'''
1976년 9월 26일 (48세) /
동독 드레스덴괴를리츠 (Görlitz)
'''국적'''
독일 [image]
'''신체 조건'''
189cmㅣ체중 80kg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 소속 '''
''' 선수 '''
켐니츠 FC (1995~1997)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 (1997~1999)
'''바이어 04 레버쿠젠 (1999~2002)
FC 바이에른 뮌헨 (2002~2006) '''
'''첼시 FC (2006~2010)'''
바이어 04 레버쿠젠 (2010~2012)
'''국가대표'''
98경기 42골 (독일 / 1999~2010)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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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56]

1. 개요
2. 플레이 스타일
3. 선수 경력
4. 평가
5. 기타
5.2.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5.3. 사건 사고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출전 기록
7. 어록
7.1. Pray for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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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전 축구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였다.
스트라이커가 아닌 중앙 미드필더였음에도 A매치 98경기 42골이라는 특급 스트라이커 뺨치는 공격력을 자랑하는 선수[2]로 대포알 같은 중거리슛과 큰 키를 활용한 헤딩슛이 트레이드 마크였고 프랭크 램파드와 더불어 '미들라이커'의 선구자격 인물이기도 하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마티아스 자머, 울프 키르스텐와 더불어 가장 성공한 동독 출신의 선수로도 꼽힌다. 바이엘 레버쿠젠, 바이에른 뮌헨,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주장을 맡아 리더십을 발휘하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했다. 하지만 첼시로 이적한 후에는 팀의 주장, 부주장이자 레전드인 존 테리, 프랭크 램파드가 있었기에 평범한 일개 팀원으로서 묵묵히 뛰는 모습을 보였다. [3][4]

2. 플레이 스타일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활약한 선수 가운데 파트리크 비에라, 클라렌스 세도르프, 지우베르투 시우바, 제 호베르투, 에메르송, 스티븐 제라드와 함께 전술이해도가 뛰어난 선수로 꼽힌다. 말 그대로 '''만능'''이다. 그리고 재능 뿐만 아니라 실적 면에서도 뛰어났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페널티박스 밖에서의 묵직한 중거리 슛이다. 최고의 중거리 슈터를 꼽으라면 제라드, 스콜스, 램파드와 함께 최일선에 거론되는 인물이다. 또한 190cm 가까이 되는 큰 키를 이용한 헤더능력 역시 당대의 미드필더 중 최강이었다. 국가대표 커리어만 봐도 알겠지만, 98경기에 42골. 왠만한 월드클래스 공격수에 준하는 기록이다. 동독 유스 시스템의 산물답게 왼발로도 좋은 퀄리티의 킥을 구사한다.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 등 모든 미드필더 위치에서 뛸 수 있는 선수. 전성기 때에는 대표팀이든 소속팀이든 그를 중심으로 전술이 짜였다. 괜히 그를 로타어 마테우스의 후계자로 부르는 것이 아니며, 전성기 시절엔 미드필드 플레이어 한정으로 루드 굴리트와 비슷한 포스를 보여준 선수라 보면 된다. 발락의 무시무시한 전성기가 더 오래 갔다면 마테우스, 사비, 지지와 비견되는, 그러니까 역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발락에게는 미드필더들이 갖춰야할 패싱력과 강력한 슈팅력, 단단한 피지컬과 많은 활동량, 팀의 중심이 되는 컨트롤 타워 능력이 있었다. 뛰어난 대인 수비, 태클 실력은 덤. 전성기 시절에는 약점이 없는 선수라고 평가되었으며,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발락 혼자만 중원에 세워놔도 상대편 중원을 씹어 삼킬 정도였다. 그는 드리블을 화려하게 하는 선수는 아니었고, 사실 그럴 만큼 민첩하거나 빠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말 팀에 필요한 플레이를 했다. 시야가 넓고 판단이 빨라 볼을 끌다가 뺏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상대 선수를 제치는 데 힘을 들이지 않고, 다른 선수에게 패스를 내준 다음 자신의 적절한 위치를 찾아 들어간다. 이러한 유형의 선수들은 보통 피지컬적인 면에서 약점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발락의 경우에는 마치 탱크같은 단단함을 갖춰 밀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정말 감독들이 좋아하는 스타일.
팀의 중심 역할은 물론, 다른 선수를 돕는 위치에서도 충분히 빛이 났다. 예를 들어, 첼시로 이적한 발락은 이전처럼 폭발적인 공격력을 보이거나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선 인물은 아니었지만, 팀 동료인 프랭크 램파드가 제대로 활약할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 주며 자신이 어느 위치에서든 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발락의 공격능력이 램파드 못지않다는 것을 생각했을때, 램파드보다 처진 위치에서 그와 균형을 맞추어 뛰라는 감독의 요구를 완벽에 가깝게 실행해 낸 발락은 정말 다재다능하다고 볼 수 있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3.1.1.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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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입단을 했으나 전반기 시즌은 2군에서 보냈고 99년 3월 레버쿠젠과의 리그경기를 통해 프로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데뷔시즌에 팀이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5]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바로 우승 커리어를 새기는 영광을 누린다. 다음 시즌 서서히 주전선수로 도약을 하고 98-99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출전하여 8강까지 갔으나 같은 리그 소속인 바이에른 뮌헨에게 패하게 된다.

3.1.2. 바이어 04 레버쿠젠


[image]
본격적인 전성기가 열린 시절로 과거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선 수비적인 역할을 맡았다면 레버쿠젠에선 보다 더 공격적인 역할을 부여받으며 레버쿠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이 시기 레버쿠젠은 '''에메르송[6], 루시우 페헤이라,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베른트 슈나이더, 옌스 노보트니, 제 호베르투''' 등 2000년대 명성을 날린 선수진용을 꾸렸고 발락 역시 이 선수단의 전술의 중심이 되면서 레버쿠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활약의 백미는 2001-02 시즌. 발락은 이 시즌 리그에서만 17골을 때려박는 대활약을 펼치며 레버쿠젠은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상당한 상승세를 보였으나 막판 선수단의 줄 부상으로 결국 준우승으로 마무리하며 빈손으로 마무리 하게 된다. 이 당시 발락은 선수 시절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었고 잘하면 트리플 크라운도 달성할 수 있었으나. 결국 노보트니등의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트리플 러너업을 달성하게 된다. 이른바 콩락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image]
지네딘 지단의 챔피언스리그 역대급 골이 터지기 직전의 순간. 발락은 그저 지단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3.1.3. FC 바이에른 뮌헨


[image]
2001/02 시즌이 끝나고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였다.
발락은 조금 더 강한 팀으로 가길 희망했고 오퍼 중 바이에른 뮌헨레알 마드리드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고 한다. 대부분 분데스리가를 떠나지 않는 독일 선수들과는 다르게 발락은 해외리그를 경험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지만, 2006년에 독일에서 월드컵이 열릴 것을 감안해 독일클럽에서 계속해서 뛰는게 나은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바이에른 뮌헨을 택했다고 한다. 훗날 은퇴 후 스카이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지만 레알 마드리드로 갔어도 독일 월드컵 출전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을 것이라고 밝히며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레알로 갔다면 흥미로웠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전성기를 이어가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서 분데스리가 전체가 맛탱이가 간 상황이였다. 2002/03 시즌 바이언의 과도기로 UCL에서 광탈을 하게 되고 2003/04 시즌엔 아예 무관으로 마무리 하게 된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에 불만이 쌓여있었던 발락은 여름 이적시장에서 다시 한번 유럽 빅클럽들에게서 러브콜을 받았고, 그 중 FC 바르셀로나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왔지만 바이에른이 요구하던 이적료로 50m 유로를 지불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적은 불발되었다.[7]
2004/05 시즌과 2005/06 시즌엔 분데스리가 우승과 포칼 우승 등 연속 더블 크라운을 달성하지만 UCL에서는 좀처럼 바이에른은 리그에서의 힘을 유럽 무대에서는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발락은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할만한 전력을 가진 팀으로 이적을 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2004/05 시즌이 끝나고 발락은 뮌헨과의 계약기간이 1시즌밖에 남지 않았었고, 팀은 계약연장을 제시했지만, 발락은 계약 연장을 거절했다. 이후 그대로 2005/06 시즌까지 가면서 자유계약신분이 된다. 사실 뮌헨과 재계약을 수락하고 이적할 때 팀에게 이적료를 챙겨주는 '훈훈한 마무리'를 지을법도 했으나, 발락은 바이에른 구단으로부터의 어떤한 대화도 거부했다. 이에 바이에른의 루메니게 회장이 발락이 구단과 어떤 말도 안한다며 답답함을 표했다.
이번에도 몇몇 빅클럽들과 발락에게 관심을 보였는데, 최종적으로 발락을 두고 맨유와 첼시가 경쟁했다. 발락은 첼시를 선택했다. 발락은 두 팀을 두고 어느 팀이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하기 더 유리할지 저울질 했는데, 당시 맨유가 몇시즌간 부진했지만, 무서운 포스를 보여주던 주제 무리뉴의 첼시가 자신에게 맞는 팀이라 결정하고 첼시로 이적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첼시가 돌풍을 일으키긴 했지만 맨유 역시 첼시와 우승을 다투며 이에 못지 않은 저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단지 더 높은 연봉을 주는 첼시를 택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발락의 발언과 달리 발락을 영입을 실제로 원했던 것은 맨유의 퍼거슨 감독이었고, 첼시 무리뉴 감독은 발락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첼시는 전적으로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의 의중에 의해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고 있었고 무리뉴는 한동안에 이에 대해 소극적인 불만을 표하는 정도에 그쳤다. 어쨌든 발락은 무리뉴 감독의 전력 구상과는 무관하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일련의 (백인) 스타선수 영입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발락과 더불어 세브첸코, 토레스가 당시 이런 영입의 대표적인 사례. 맨유 퍼거슨 감독이 비록 발락을 원하긴 했지만 발락 영입에 그리 많은 돈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첼시가 더 많은 액수를 비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퍼거슨 감독은 쿨하게 발락을 포기했다.[8]

3.1.4. 첼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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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로 이적한 발락은 이전 분데스리가에서의 압도적인 폼을 보여주지 못하고 다소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고 만다. 첼시에서 풀 주전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로테이션 선수로 분류되기도 하는 등 바이에른 시절에 비하면 다소 안습한 처지가 되었다. 일단 무리뉴 감독의 전술과 무관하게 구단주의 취향으로 영입된 선수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발락 스스로가 EPL과 팀 내에서 자신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래도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EPL과 첼시 스타일에 서서히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고, 점차 풀 주전에 가까운 자원이 되어갔다. 하지만 공격 포인트 등 팀 기여도에 있어서 첼시 시절은 바이에른 시절에 비하면 수치적으로 훨씬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2006년 8월 27일 블랙번 로버스 전에서 발락은 프리미어 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삭발까지 하면서 첼시에서의 새 출발을 각오하지만 시즌 초기에는 적응기에 애를 먹으며 바이에른 시절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다. 이는 05-06 시즌까지 4-3-3을 즐겨 사용하면서 역습무쌍을 선보인 첼시가 4-4-2, 그러니까 투톱으로 시스템을 바꾸면서 혼선을 빚었기 때문이다.[9][10] 이렇게 되면 이미 기존의 램파드, 마켈렐레, 에시앙 등 중앙 미들진이 많은 첼시에 발라크까지 가세를 하는 상황이고 당시 발락을 포함한 네 선수들 중 나이가 있는 마켈렐레를 제외하면 백업으로 두기는 쉽지 않는 상황이었다.[11][12] 시즌 초중반에는 이 전까지 팀의 중추역할을 담당했던 발락은 팀의 실질적 에이스인 램파드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전성기 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했다. 시즌 중후반부터는 살아난다 싶었는데 아쉽게도 뉴캐슬 원정에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시즌을 마감했다(이 부상은 07-08 시즌 초반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07-08 시즌부터 부상 회복 후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 홈 경기에서 부상당한 램파드를 대신해 투입된 이후로부터 램파드의 역할을 부여받고 팀의 중심이 되어 팀을 먹여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장 존 테리, 부주장 프랭크 램파드가 빠진 상황에서 캡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첼시에서의 50번째 경기였던 풀럼 원정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 그리고 08년 4월 26일 리그 맨유전에서 선취골과 결승골을 기록하고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는 등 마지막까지 맨유와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경쟁에 불을 지피는데 애썼지만 이미 골득실에서 많이 앞섰던 맨유가 위건에게 대승을 하고 첼시는 경기를 비기며 승점 2점차로 리그 준우승을 한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맨유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으나 모두 알다시피 테리가 우승을 결정지을 수 있었던 킥을 실축하고, 아넬카의 슈팅이 판데르사르에게 막히며 꿈에 그리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놓치고 만다. 당시 테리가 킥을 실축하고 그것을 본 발락이 다리에 힘이 풀려 팀원에 기대 쓰러지는 사진은 꽤나 유명한 사진. 거기에 리그컵도 결승전에서 연장 끝에 1:2로 토트넘에게 패하고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결국 발락은 '''생애 두 번째 트리플 러너업'''을 겪고 만다.
2008/09 시즌에는 새 감독으로 스콜라리가 부임한다. 스콜라리가 데려온 애제자 데쿠에게 밀려 완전 주전이 아닌 1.5군으로 분류되기도 했었으나, 시즌중반으로 가면서 팀이 극심한 부진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2009년 2월 스콜라리는 경질되고 거스 히딩크가 남은 시즌을 맡아줄 임시감독으로 오게된다. 이전까지 감독들이 에시앙(혹은 마켈렐레)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두고 램파드와 발락이 박투박 미드필더 역할을 수행하도록 지시했었으나, 히딩크는 여기서 새로운걸 시도하게 되는데 바로 발락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내려 경기조율 및 후방에서 볼배급 역할을 맡게했고[13], 램파드가 조금 더 미들진 공격의 중심이 되게 해주고, 에시앙을 박투박 미드필더로 기용해 그의 왕성한 활동량을 제대로 활용하게 해주었다. 발락은 히딩크의 전술에 완전히 적응하며 '''첼시 기계 축구의 중추'''가 된다. 발락과 에시앙의 역할을 재조정하면서 이미 강력했던 미들진이 더욱 호흡이 더 맞아들어가며 최상의 시너지를 일으켰다. 발락은 수비적인 롤을 부여받았음에도 빛이 났는데 비록 민첩하지는 않지만 그의 지능적인 플레이가 상대방의 패스를 차단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고 신체조건을 이용해 피지컬로 상대 공격진과 미들진을 밀어붙히거나 강력한 제공권을 선보였다.[14]
이 중원 조합은 압도적인 피지컬과 제공권으로 상대팀의 중원을 그야말로 압살시켰는데 그 절정이 2008/09 시즌 챔피언스리그 바르샤와의 4강전. 그 시즌 내내 괴물같은 포스를 보였던 바르샤의 차비-이니에스타-부스케츠 트리오와 메시가 그 2경기 만큼은 램파드-발락-에시앙 트리오에게 힘과 조직력에서 완전히 밀려 힘을 못썼다. 은퇴 후 발락이 얘기하기로는 그 당시 첼시는 유럽 어느팀이든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가장 강력했다고 평가했고, 당시 오심으로 얼룩진 바르셀로나와의 2차전에서 승리했었다면 결승에서 맨유를 꺾고 우승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 당시 만 33세의 노장 미드필더인 발락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차비를 상대로 경기 주도권을 잡으며 피지컬과 경기 조율에서 앞섰으니... 페널티 에리어에서 사무엘 에투의 핸드볼 파울을 눈앞에서 보고도 잡지않은 주심 오브레보를 발락이 잡아먹을듯이 쫓아가며 항의하는 장면은 첼시 팬들 사이에서 굉장히 깊게 뇌리에 남은 장면으로 유명하다. 당연하겠지만 본인에게는 굉장히 가슴아픈 순간이었다고 한다.[15]
2009/10 시즌 안첼로티 체제에서도 3미들(정확히 말하면 다이아몬드 4-4-2)의 중추로써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중반에는 팀이 좀 부진했는데 같이 부진, 그렇지만 중후반기부터는 안첼로티가 4-3-3 포메이션을 섞어가며 팀을 운영했고 히딩크 시절처럼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소 수비적인 룰을 맡음에도 불구하고 램파드, 에시앙과 같이 안정적인 중원을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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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즌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2010년 5월 15일 포츠머스 FC와의 FA컵 결승전에 선발 출전했던 발락은 전반 종료 직전 상대 선수인 케빈프린스 보아텡[16]의 거친 태클에 무릎 부상을 입고 줄리아누 벨레티와 교체되어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아픔을 겪었다. 결국 이 부상으로 인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출전은 무산되었다.
사실 발락은 첼시에서 아직 들어보지 못했던 챔피언스리그컵을 드는것을 포함해 첼시에서 은퇴까지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첼시는 당시 젊은피로 대대적인 리빌딩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발락에게 제시된건 2년도 아닌 1시즌 단기계약이었다. 이를 알게된 발락은 감독이었던 카를로 안첼로티와도 자신이 다음시즌 구상에 있는지 의논했고, 안첼로티는 발락이 첼시에 남아주길 원하나 결정은 보드진에 달려있다고 말한다.[17] 발락은 첼시에 애정이 꽤나 큰 선수 중 한명이었고[18] 주급삭감까지 해서라도 팀에 남기를 강력히 바랬으나, 보드진은 단기계약 이외에는 옵션이 없다 통보, 결국 그는 첼시를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은퇴 후 발락이 밝힌 얘기지만 1시즌만이라도 더 첼시에 남지 않았던게 큰 후회였다고 한다. 차라리 1년 계약을 하여 남고 그 이후에 계속해서 팀과 재계약을 논의해가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걸 고려하지 않은게 한이라고...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2010/11~2011/12 시즌 발락의 빈자리는 첼시의 예상보다 컸다. 존 오비 미켈의 더딘 성장은 물론 대체불가 자원이었던 에시앙의 장기부상과 부진이 있었고, 그동안 하미레스와 메이렐레스 등이 미드필더진을 매꾸기 위해 영입되었지만 모두 발락 정도의 클래스를 가진 선수들은 결코 아니었다. 2010/11에는 이전시즌 성적이 무색하게 무관으로 마치는 실패를 맛봤고, 2011/12 시즌에는 FA컵과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시즌초반에는 무리한 리빌딩으로 피를 보다 후반기에 가서야 베테랑들의 저력으로 우승컵을 드는 그림이었다. 이마저도 토너먼트였기에 가능했고 리그는 6위로 마쳐 챔스 우승이 아니었다면 2012/13 시즌 챔스출전권조차 확보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3.1.5. 바이어 04 레버쿠젠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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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름일자로 레버쿠젠으로 이적을 했다. 당시 레버쿠젠은 직전 시즌 시몬 롤페스와 아직 성장중이던 토니 크로스를 중심으로 미들진의 전술을 짜였고, 크로스의 바이에른 복귀로 인해 34세의 노장인 발락은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맡게된다.
그러나 9월 하노버전에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며 전반기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만다. 그나마 다행히도 빠르게 재활하며 후반기 초에 복귀하는데에는 성공했다. 발락의 복귀 이후 레버쿠젠은 10승 2무 3패를 달리며 8승 4무 3패에 그친 도르트문트를 제치고 바이언과 함께 가장 많은 승점을 쓸어담았으나 이미 벌어졌던 11점의 승점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7점차로 도르트문트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2011-2012시즌 UCL에서 발렌시아 전과 행크전에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팀은(발락은 부상이라 출전을 못했다.) 16강에서 바르셀로나에게 합산 점수 2-10으로 대패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유럽 클럽 대항전 무대를 쓸쓸히 마감한다.

3.2. 국가대표


당장의 2002 FIFA 월드컵 플레이오프에서 발락이 없었으면, 독일은 진작에 우크라이나에 밀려 예선탈락이라는 최악의 암흑기가 도래했을 것이다. 또한 발락 의존증을 줄이기 위해, 하노 발리치, 파비안 에른스트, 프랑크 바우만, 시몬 치우머 등 당시 분데스리가에 날고 기는 미드필더들을 투입하며 실험을 하였으나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3.2.1.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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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2000에 서브멤버로 포르투갈과의 3차전에서 선발로 출전하였으나 팀은 0-3으로 깨지고 성적도 1무 2패의 최악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한다.[19]
이후 2002년 월드컵 지역예선 9조에서 독일은 잉글랜드와의 1위 다툼에서 그 전설의 1-5 참사를 당하면서 플레이오프로 밀려나게 된다. 바로 이 때 부터 발락의 진가가 발휘되는데 플레이오프 상대는 우크라이나로 발라크는 1차전 0-1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동점골을 넣고 2차전 선제골, 추가골을 넣어 4-1 대승을 이끌며 독일을 탈락위기에서 구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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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팀과의 4강전에서 결승골을 넣고 포효하는 모습. 물론 이날 이 선수의 이름은 대한민국 축구팬들에게는 당연히 '''금지어'''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미로슬라프 클로제, 올리버 칸과 함께 실질적으로 팀을 이끌다시피하여 결승까지 진출시킨 주역이다. 발락은 1-0으로 끝난 8강 미국전, 4강 한국전 두 경기에서 모두 결승골을 넣으며 토너먼트에서는 조별예선보단 잠잠했던 클로제 대신 해결사 노릇을 했다.[20] 당시 독일은 그나마 희망이였던 제바스티안 다이슬러메멧 숄, 옌스 노보트니, 크리스티안 뵈른스의 부상, 카르스텐 얀커옌스 예레미스가 클럽에서 만큼 제역할을 하지 못한 상황이였고 특히 16강전부터 독일은 전술적의 고지식함을 드러내며 졸전을 펼쳤는데 바로 발락이 해결사 역할을 하면서 독일을 꾸역꾸역 결승까지 이끌었던 것. 그러나 결승전에서는 경고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했고 독일은 0:2으로 패했다.
사실 독일의 대진운이 무척 좋았는데 독일의 천적들을 한국이 모두 없앴다. 이탈리아야 독일의 대표적인 천적이고[21] 당시 라울 곤살레스,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비센테 로드리게스, 호아킨 산체스, 차비 에르난데스, 페르난도 이에로, 미첼 살가도, 카를레스 푸욜, 이케르 카시야스가 있는 스페인을 이길 확률은 없었다고 봐도 된다.[22]
그러나 2002년 월드컵에서의 기대이상의 성과를 올린 독일 대표팀은 이 때부터 다시 최악의 암흑기를 맞이하고[23][24], 20대 후반 자신의 축구경력의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발락에게 있어선 이 나이에 2004년 홀로 망가진 독일축구를 짊어져야하는 안습한 상황이 오고 만다. 당시 대표팀 상황은 2000년대보다 더 최악에 가까웠다. 2000년도엔 늙었어도 나름 이름값 있는 선수들이라도 있었고 메멧 숄이나 다이슬러, 노보트니가 어느정도 폼이 좋았을 때였지 2004년도엔 앞의 세 선수의 폼이 완전히 하락한 상태였고 케빈 쿠라니, 게랄드 아사모아, 프랑코 바우만, 파트릭 오모엘라, 파비안 에른스트 등 누구세요? 수준의 눈물나는 스쿼드를 보였으며 클로제는 이 시기 슬럼프에 빠졌고 지금 최고의 선수로 불리는 필립 람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는 이 당시에는 유망주에서 막 벗어나려는 시점에 있었던 철저한 무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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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2004에서도 졸전을 거듭했는데 특히 당시 신예 필립 람을 제외하곤 거의 '''혼자서 독일 대표팀을 이끌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특히 3차전인 체코전에서 당시 감독인 루디 푈러 감독은 '''정신나간''' 포메이션을 사용했는데 프리드리히,뵈른스,노보트니의 쓰리백과 수비형 미드필더에 하만을 그리고 죄우에 프링스와 필립 람을 배치하고[25][26] 공격형 미드필더에 발락을 배치...또 그 위에 슈바인슈타이거와[27] 슈나이더를 윙으로 배치 그리고 최전방에 케빈 쿠라니를 배치하는 '''이른바 5-4-1 도 아니고, 3-4-3도 아닌 쓰리백에 죄우 윙을 두명 씩이나 두고 홀딩엔 기동성이 전혀 없는 디트마어 하만을 혼자 배치하는 초엽기 포메이션'''[28][29]을 선보였고 당연히 팀은 체코 2진에게 2-1로 깨지면서 이번에도 광탈하게된다. 이는 과거 1999년 바이에른 뮌헨이 선보인 5-4-1포지션의 강력한 수비라인에 이은 위협적인 역습장면을 여러차례 만들어낸 전술을 재현하기 위해서인데 과거 에펜베르크의 역할을 발락이 어느정도 수행해냈으나 예레미스[30]의 넓은 활동량을 하만이 보여줄리 만무했고 네드베드, 포보르스키가 없는 체코2진 미들진에게 처참히 털리게 된다. 비록 이 시기 국가대표팀은 완전 막장테크를 타고 있었으나 발락의 평가는 역으로 올라갔는데 아시다시피 당시 독일 대표팀은 '''어쩡정한 4-4-2 전술로 최약체 라트비아에게 비기질 않나''', '''당시 구닥다리인 3-5-2를 끝까지 고집하질 않나''' 한마디로 전술적인 유연성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 발락은 그런 괴악한 포메이션과 최약체의 독일 스쿼드를 가지고 홀로 고군분투를 하면서 어찌어찌 팀을 꾸역꾸역 이끌어 갔기 때문이다. 앞에 언급한대로 전술적 이해도가 매우 뛰어나 3-5-2든 4-4-2든 제 몫을 해준 선수는 대표팀 내에 발락이 유일하다시피 했으며 '''막장테크의 대표팀을 혼자 이끌면서''' 그래도 발락 덕분에 독일 대표팀은 소위 썩어도 준치라는 소릴 듣게 된 것이다. 약체들에게 쳐발리더라도 이 시기 최악의 시기를 달린 독일 대표팀이 어찌어찌 꾸역꾸역 메이저 대회에 출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발락의 존재가 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3.2.2. 2006년 그리고 황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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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 4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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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독일 월드컵 발락 최고의 파트너였던 토르스텐 프링스(왼쪽)
2005년 자국에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올렸고 이 당시 독일 대표팀 역시 뒤늦게나마 4-4-2의 포지션을 확립하게 된다. 이 때 '''발락의 파트너로써는 토르스텐 프링스'''였고, 이 둘을 최적의 호흡을 보이면서 UEFA 유로 2008 때까지 파트너로 활약하게 된다.[31] 발락과 프링스는 넓은 활동량과 기동성을 자랑하였고, 특히 8강전인 아르헨티나 전에서 아르헨티나 미들진의 점유율 축구를 기동성으로 뭉게버리는 포스를 보여준다.
이 시기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필립 람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페어 메르테사커, 루카스 포돌스키 등 소위 1980년대생의 황금세대들이 포텐이 터진 시기인데 비록 2006년 30줄에 접어든 발락 역시 체력적인 저하가 일어났으나, UEFA 유로 2008에서도 여전한 팀의 전술의 핵으로 활동했다. 이는 요아힘 뢰프 감독이 모든 팀의 코어를 몰빵한 발락에 대한 과부하를 줄이기 위해, 토마스 히츨슈페르거, 지몬 롤페스, 사미 케디라를 원볼란치, 혹은 더블 볼란치로 두는 실험을 했다. 당시 뢰브 감독은 2007년 10월 체코와 홈경기에 발락을 제외하고 프링스, 슈바인슈타이거의 중원에 피오트르 트로초프스키, 다비드 오동코어의 좌우 윙을 두며 미드필더 라인을 구축했으나 결과는 0-3 완패를 당하면서 여전히 발락 없이는 불안정한 상태였다.[32] 하지만 2010년 5월 FA컵 결승전에서 당한 부상으로[33] 인해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되었고,[34] 이후 그의 대표팀에서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35]
그리고 2011년 독일 축구 연맹 측은 발락을 8월에 있을 A매치에 발탁한 다음 경기를 뛰게 하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할 예정임을 밝혔으나 발락은 곧장 뢰프 감독을 디스하며 이 경기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출전이 결정된 것이라며 A매치 소집을 거부했다. 발락은 단지 은퇴 경기에 대한 미련이 없고, 정식 대회가 아닌 큰 의미없는 경기를 통해 은퇴 무대를 갖기는 싫다고도 덧붙혔다. 결국, '''98번'''의 A매치에 출전해 '''2경기''' 남겨 두고 센추리 클럽 가입이 무산되었다.[36]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이건 발락이 자신이 은퇴 후 밝힌 자신의 입장을 기준으로 서술한다. 당시 남아공 월드컵이 마무리 된 후 발락 대신 월드컵에서 대표팀 주장을 맡았던 필립 람이 사전에 발락과 상의 하나 없이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계속해서 주장을 맡고싶다는 발언을 했고, 뢰프 감독 또한 람이 주장직을 이어나갈 것을 지지하며 발락의 대표팀 복귀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발락에게는 불행하게도 남아공 월드컵에서 성공적인 세대교체로 인해 발락이 독일 대표팀에서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고, 일방적으로 자신에게서 주장직을 박탈하고 대표팀에서 내친 둘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지금도 발락은 아직도 이 둘에게 앙금이 남아있는듯 하며,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광탈한 독일 대표팀을 크게 비판하며 특히 뢰프가 사임을 하지 않고 계속 독일대표팀 감독직을 유지하는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디스했고, 그 전해인 2017년 필립 람이 현역은퇴를 선언하고 함께 뛰었던 동료들과 많은 축구 관련인물들에게서 축하를 받는 가운데 발락은 아무런 인사도 건내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았을때 발락은 여전히 자신에게 사과 한마디 없었던 람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넌지시 얘기하기도 했다.

3.3. 굿바이 발락!


현지시간 2012년 10월 2일 자로 현역은퇴를 선언했다. 독일 축구의 암흑기를 거의 홀로 지키다시피 했고 2010년 독일 축구의 새로운 세대를 시작하는 초석을 다진 위대한 거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4. 평가


일반적으로 독일 축구의 최악의 암흑기로는 크게 1990년대 중후반 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인데, 미하엘 발락이 절정의 기량이던 시기 같이 독일 축구를 지탱해야할 동료들이 대부분 부진하던 시기였다. 발락에 대한 평가는 과거 올드 독일 축구팬과 바이에른 뮌헨 팬들에겐 그야말로 암흑시대의 한 줄기 희망이나 다름 없었다. 발락의 기량이 절정이던 시절은 레버쿠젠 시절과 바이에른 뮌헨 시절로 보면된다. 첼시 시절엔, 제한된 임무와 더불어 서른 줄이 넘긴 나이로, EPL 무대에서 포스를 발휘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08-09시즌 기계축구의 중추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도 했으며 09-10 시즌에도 서른 경기 이상 출전하는 등, 팀 전력의 중추였다.
발락이 강렬한 임팩트를 보여준 경기는 뭐니뭐니해도 2002년 한일월드컵 유럽 플레이오프에서의 우크라이나 전, 당시 독일은 우크라이나 원정에서 0-1로 끌려가던 상황에 발락의 동점골로 겨우 무승부를 이끌 수 있었고 2차전인 홈에서도 발락이 두 골을 넣으며 4-1로 우크라이나를 꺾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만약 발락이 없었더라면 독일 대표팀은 2002년 월드컵 본선진출에 실패했을 수도 있었다.
당시의 트렌드는 4-4-2와, 4-4-1-1, 혹은 4-2-3-1[37] 포메이션이 대세를 이루었고, 본래 독일은 4-4-2가 아닌 4-2-3-1 포메이션을 구현하려 했었다. 그리고 그러한 미들진의 열쇠는 플레이메이커에 메멧 숄, 혹은 세비스티안 다이슬러를 두고 더블 볼란치에 발라크과 예레미스, 혹은 프랑코 바우만과 카르스텐 라멜로프[38]를 두며 중원을 구축하고, 죄우 노이빌레와 슈나이더, 혹은 프링스를 배치하려 했다. 그러나 독일은 타르낫과 보데의 노쇠화와 레흐머와 뵈르메의 부진으로 풀백이 고갈되고, 센터백인 노보트니와 메첼더는 틈만나면 부상을 찍으며 그렇잖아도 불안한 독일 수비진을 더욱 안습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4-2-3-1은 고사하고 4-4-2를 쓰기에도 아뭐병스러운 상황. 이 상황에서 독일이 할 수 있는 건 결국 과거로 돌아가는 것 뿐이였다. 90년대 바이언이 재현한 강력한 선 수비 카운터 어택인 5-4-1 축구까지 구현하며 발악하지만 결국 독일의 이러한 발악 속에 빛을 발휘한 건 미하엘 발락 뿐이였다.
본래 발락은 포백앞을 보호하고, 2차 저지선 역할을 함과 동시에 안정적인 경기조율만 했으면 됐었다. 2선의 메멧 숄이나 다이슬러가 건재하다면 굳이 팀의 코어를 발락에게 맞출 이유가 없지만, 알다시피 숄과 다이슬러는 로시츠키와 하그리브스의 선대라 할 수 있는 유리몸계의 전설. 어쩔 수 없이 팀 전체의 코어를 발락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고, 4-4-2 포메이션에선 발락의 파트너를 찾기 위해 애를 썼지만, 기대를 모은 제바스티안 켈도 유리몸에, 브레멘의 전성기를 이끈 프랑코 바우만과 파비안 에른스트, 그리고 발락의 후계자라 불렸던 한노 발리티쉬는 국대에선 그야말로 WTF스러운 경기력으로, 망했어요...게다가 풀백은 고갈됐지, 덕분에 프링스는 억지로 라이트백에 배치...게다가 노이빌레와, 슈나이더 역시 기대만큼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주전 공격수 클로제는 이 시기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사실 발락이 분데스리가내에서 일인천하로 군림한 건 아니다. 저 당시, 바우만, 에른스트, 미쿠, 보로프스키의 강력한 미들진으로 중무장하여 03-04 시즌 더블크라운을 달성한 베르더 브레멘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고, 베르바토프, 베른트 슈나이더, 바스튀르크 등이 버티는 레버쿠젠과 이 외에도 코비아쉬빌리, 보르돈, 폴센, 하밋 알틴톱, 판데르, 바움요한 등 신구콤비로 무장한 샬케04도 뮌헨의 독주를 저지할 만큼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였다.
당시 독일대표팀도 적극적인 선수기용으로 난국을 타개하려 애를 먹었으며, 가장 급선무인 것이 발락의 파트너와 고갈된 풀백자원을 찾는 것이였다. 필리프 람이라는 걸출한 풀백을 찾는데 성공하지만, 크리스티안 판데르, 파트릭 오우오모엘라, 크리스티안 슐츠, 안드레아스 힌켈 등을 시험했음에도 신통치 않았고, 분데스리가에서 엄청난 모습을 보인 프랑코 바우만, 파비안 에른스트, 페트릭 마이질레, 시몬 치우머 등은 클럽에서와 달리 국대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특히 루마니아전 1-5 대패의 경기에서 루디 푈러는 과감히 발락을 배제한 채, 에른스트와 바우만의 중원조율을 기대했으나, 전반에만 4골이나 먹히면서 그야말로 망했어요...결국 2006년 독일이 전형적인 4-4-2 포메이션이 가다듬어 질 때까지 독일의 모든 팀 코어는 발락에게 몰빵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 독일 월드컵 개막직전까지 독일 팬들이 자국국대에게 거는 기대치는 매우 낮았다. 하지만 본선에서 발락과 프링스의 중원 조율이 빛을 발휘하고, 그 동안 불안했던 독일의 포백의 안정화가 맞물려서 4년전 대회보다 경기력면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3위로 대회를 마무리 했다.
정리하자면, 암흑기로 접어든 독일축구에서의 구원자 등장 + 2002 월드컵 플레이오프에서의 포스 + 그리고 그 포스를 이후에도 계속 선보이는 뛰어난 실력이 발락에 대한 평가가 높은 요인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발락의 전성기 시절 최악의 독일 대표팀을 꾸역꾸역 이끌면서 독일축구의 암흑기에서도 2002년 월드컵 준우승, 2006년 월드컵 3위, 유로 2008 준우승 등 데이터적인 면에서 역시 우승후보로 유지시켜 준 난세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5. 기타


WWE 영국 투어 때 ECW를 구경간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소개도 못받은 사건이 있었다.(...)[39]
개인 트위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첼시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첼시의 매경기를 챙겨보고 코멘트를 해준다.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첼시 앰버서더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16/17 첼시우승트윗인데 발락이 요즘 트위터에서 첼시엠버서더 시켜달라고 무력시위하는 중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첼시 FC 소속으로 5년간 런던 생활을 한 이유로 영어에 능숙하다.[40] 여담으로 본인의 이름인 ''''Michael''''을 독어로 말할 때엔 ''''미하엘''''로, 영어를 할 때엔 ''''마이클'''로 발음한다.

5.1. 콩라인


[image]

[41]
뛰어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뛰는 팀마다 준우승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 '''콩락'''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이 붙어있다. 특히 01-02 시즌 레버쿠젠이 분데스리가 준우승, DFB-포칼 준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 독일의 2002 한일 월드컵 준우승으로 '''쿼드러플 러너업이라는 한 시즌 4콩'''의 위업을 달성한 적이 있다. 심지어 개인 기록도 따지면 리그 득점, 공격 포인트도 2위였기에 '''6콩'''이다.
그 외에도 UEFA컵유로 등 굵직한 대회에서 모두 준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콩라인. 이후 2008년에도 소속팀 첼시의 프리미어 리그 준우승, 리그 컵 준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 독일의 UEFA 유로 2008 준우승으로 '''또다시 쿼드러플 러너업을 달성'''하는 기이하고도 놀라운 업적을 달성했기도 했다. 이벤트성이 있는 커뮤니티 실드까지 포함하면 '''5콩''' 기록.
그렇다고 해서 우승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이에른 뮌헨 시절 챔스를 제외하고 리그와 포칼 등 우승컵을 밥먹듯이 들어올렸고, 09-10 시즌 첼시에서 뛰며 프리미어리그, FA컵의 더블을 달성하기도 했다.[42] 그런데 위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2002년과 2008년의 '''4연준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주목이 덜 된 것 뿐이고[43], 한창 분데스리가와 첼시에서 날아다닐 때의 챔스와 UEFA컵을 비롯한 유럽 대항전을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는 것과 독일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시절 국가대항전에서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5.2.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 발라크는 독일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토너먼트 16강전부터 준결승까지 한국에서 경기했는데, 한국 입국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꼭 와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라고 말했다.[44][45] 이 인터뷰를 통해 차범근의 위엄이 재확인되었고, 한편으로는 '여기가 XX의 나라입니까?'라는 드립의 시초가 되었다.
2007년 첼시 미국 투어중 수원 삼성과의 친선전에서 차붐과 만난 장면

5.3. 사건 사고


국내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불륜남'''이다. 바이에른 시절 동료인 크리스티안 렐[46]의 그녀인 다니엘라 아우마이어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 사건은 복잡한 게, 렐의 그녀는 원래 슈바인슈타이거의 여친이었지만 렐과 양다리를 걸치다 적발, 이후 렐의 그녀가 되었는데[47] 또 발락과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렐은 피해자로 보이지만 렐도 좀 웃기는 게 원래 여자 문제로 좋은 소리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만삭 상태에서 내 여친의 배 속에 있는 게 누군지 모르겠다며 언론에 공표한 것이다. 발락과의 불륜은 1회성으로 알려졌으며 시기상 태아 친부 드립은 무리수였던 걸 생각하면, 굳이 '''만삭'''일 때, 그것도 '''언론에 대놓고 내 여자는 동료랑 자는 여자라고 떠벌린 게''' 잘 한 짓으로 보이진 않는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발락은 부인[48]과 별거 상태에 들어갔으며[49] 결국 2012년 말엽 쯤에 이혼했다. 그러나 독일 외 팬덤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고 기사도 몇 건 없는 것으로 보아 이혼과정에서 별다른 잡음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팬덤 내에서 제2의 존 테리, 독일의 존 테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팬덤 내에서는 그래도 발락이 형인데 존 테리가 잉글랜드의 발락으로 불려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아무튼 현재는 화해했다고 한다. 렐도 헤어진 지 오래... 하지만 어쨌든 발락 가정도 개발살...
2016년 현재는 레바논계 영국인 여자친구가 새로 생겼다. 미모의 금융업계 종사자로 도이치방크를 거쳐 현재는 골드만삭스에서 일하는 듯하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리그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4/95
켐니츠 FC 2
독일 지역리그
7
2
-
-
-
-
-
-
1995/96
켐니츠 FC 2
독일 지역리그
11
3
-
-
-
-
-
-
1995/96
켐니츠 FC
2. 분데스리가
15
0
1
0
-
-
-
-
1996/97
켐니츠 FC
독일 지역리그
34
10
1
0
-
-
-
-
1997/98
FC 카이저슬라우테른
분데스리가
16
0
2
0
-
-
-
-
1998/99
FC 카이저슬라우테른
분데스리가
34
10
1
0
1
0
6
0
1999/00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23
3
0
0
0
0
2
2
2000/01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27
7
2
0
1
0
5
2
2001/02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29
17
4
0
1
0
16
6
2002/03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6
10
5
4
0
0
7
1
2003/04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8
7
3
2
1
2
8
0
2004/05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7
13
4
3
2
2
9
2
2005/06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6
14
5
1
0
0
6
1
2006/07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26
4
3
1
6
0
10
2
2007/08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18
7
2
0
0
0
9
2
2008/09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29
1
6
3
1
0
10
0
2009/10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32
4
4
1
2
0
6
0
2010/11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17
0
0
0
-
-
3
2
2011/12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18
2
1
0
-
-
6
1

7. 어록


“'''You can always go out early with a bad team, but not with a team like this one!! Honest assessment must start !!!'''”

나쁜 팀이라면 조기 탈락할 수야 있지만, 이런 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어!! 솔직한 평가가 시작되어야 해!!!

“'''Leadership? Personality? Mentality?'''”

통솔력? 개성? 사고?

2018년 6월 27일,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F조대한민국 vs 독일〉 경기 후 발락의 트윗#

“'''요하힘 뢰프 감독은 2018 러시아 월드컵 이후 자진 사퇴를 했어야 한다!!'''”[50]

[51]

2018-19 UEFA 네이션스 리그에서 자국팀이 리그B로 강등 당하자


7.1. Pray for Italy


'''2002년 월드컵''' 에서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은 한국에 패하고 16강에서 탈락한다. 같은 대회 4강에서 독일은 발락의 결승골로 한국에 승리를 거두고 결승전에 올랐고, 이탈리아는 자국 대표팀만 만나면 설설 기던 독일이 한국을 격파했기 때문에 상대적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이탈리아가 독일축구 대표팀, 그리고 발락에 대해 가지는 적대감이 극에 달하게 된다.
'''아주리 징크스'''란 고유 명사가 생길 정도로 독일 축구 대표팀은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만 만나면 제 기량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2006년 독일 월드컵 4강전에서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을 맞아 직접 출전한 발락은 팀이 연장 접전 끝에 패하고 이탈리아가 결승전에 올라가는 상황을 직접 겪으면서 이탈리아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왔었다. 그 반감이 극에 달한 것이 2018년 월드컵 유럽 예선이었고 악명 높은 천적2018년 월드컵 본선에 나갈 수 없게 되자 매우 통쾌해 했었다. 그 마음을 '''Pray for Italy'''[52]라는 트윗으로 표현했는데, 해당 트윗은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에게 크나큰 분노를 안겨주었다. 결국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분노하고 전세계 축구팬들이 너무 심한거 아니였냐고 글을 달자 발락은 자신의 트윗을 곧바로 지웠다.
하지만 '''결국 독일이 더 수치스러운 역대급 대참사를 당하자''' 이탈리아인들이 '''Pray for Germany'''[53], '''Pray for Ballack'''[54]이라며 반격에 나섰다. 또한 자기들이 독일 땅에서 우승을 차지한 사실을 일깨운 건 덤이고.[55]
'''“궁금하면 “여기서 이탈리아인들의 “반격을 읽어보길 바란다'''
이탈리아인들의 통쾌함을 나타내주는 글들

“'''What did you just said?? 👊🎉🎉🎉😂😂Germany worked so hard to qualify in #WC2018 just to be eliminated from #Sweden indeed 😂 You Germans will never learn that first you play, and then you talk 😉 all the defeats against Italy had to teach you something! #KORGER #GermanyOut'''”

너 뭐라고 말했었지? 독일은 정말 열심히 해서 2018 월드컵에 들어갔지만 스웨덴에게 탈락 당할뻔했었지. 언제나 이탈리아에게 패하면서 뭔가를 가르쳐줄 때까지 너의 독일은 절대로 배우지 못할거야!!

“'''Months ago u said pray for Italy 😂😂 pray for your fxxxing team now hahahahhahaha #Corea ♥️'''”

몇달전에 너가 이탈리아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는데 너의 빌어먹을 팀을 위해 기도해.

“'''Yes, you won in the semifinal with them, but not with us in 2006🇮🇹 See you in euro 2020, as always you won't beat us #WORLDCHAMPIONS2006'''”

그래, 넌 2002년에 한국하고 준결승전에 이겼지만 2006년 우리한테 졌어. 유로 2020 때 또 만나자 너희 독일은 우리를 항상 이길 수 없을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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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 이탈리아가 스웨덴에 패해 탈락하자 기뻐하며 올린 트윗.
2018 FIFA 월드컵 한국전 직전, 발락이 자국 팀을 응원하면서 올린 트윗.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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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 팀이 한국에 패배해 탈락한 뒤, 분노하여 대표팀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요구하는 발락의 트윗.
독일이 월드컵에서 탈락하자 발락을 조롱하는 이탈리아 팬들.
[1]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미하엘 발라크'''’가 맞다. 영어, 네덜란드어, 마인어, 태국어, 베트남어의 경우를 제외하고 짧은 모음 다음에 오는 어말의 무성 파열음에는 '으'를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2] 당장 독일의 레전드 공격수 위르겐 클린스만이 108경기 47골, 루디 푈러가 90경기 47골이다.[3] 2001-02 시즌 레버쿠젠 소속으로 '''트리플 러너업'''에 2002 월드컵에서 독일의 준우승. 그 외에도 첼시에서 2007-08 시즌에 '''트리플 러너업'''을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유로 2008 준우승에 2010-11 시즌의 레버쿠젠의 리그 준우승. 2002년에는 리그, 챔스, 포칼+월드컵과 2008년에는 리그, 챔스, 리그컵+유로에 '''쿼드러플 러너업'''을 '''2'''번 달성하기까지 했다.[4] 다만 리그와 컵 우승은 상당히 많이 했다.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데뷔하자마자 리그 우승을 경험했으며 특히 뮌헨과 첼시에서 거둔 4번의 리그 우승은 모두 리그+FA컵 '''더블'''이었다. 실제로 홍진호가 스타크래프트 시절 최고 권위를 자랑한 개인리그 대회들인 온게임넷 스타리그MSL에서의 최고 성적이 5회 준우승인것 뿐만 아니라 최고 권위의 팀단위대회인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에서도 준우승, 세계 대회 중 가장 잘 알려진 WCG에서도 은메달이 최고 성적인 것에 비하면 그래도 발락은 리그와 컵은 여러번 들어서 홍진호보다는 나은 편이다. 하지만 문제는 축구계에서 최고 위상과 권위를 사진 월드컵, 유로, 챔피언스 리그에서 모두 준우승을 했고 02, 08년에 달성한 '''쿼드러플 러너업'''의 임팩트가 너무 강렬하다는 것. 마치 송병구, 정명훈, 조용호가 개인리그 우승을 최소 1회 이상을 나중에 달성하거나 프로리그 우승, WCG 금메달 하나라도 있는 경우인데도 스타리그, MSL 준우승 횟수가 더 많은게 임팩트가 강해서 여전히 콩라인으로 인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사실 콩라인의 원조인 홍진호2002 KT배 온게임넷 왕중왕전, 2003 K-TEC KPGA 위너스 챔피언십, 벼룩시장 Find All배 챌린저 오픈 스타리그, 스니커즈 올스타 리그 같은 공식대회로 포함되지 못한 대회에서는 우승을 하면서 '''이벤트전의 제왕'''으로 불리긴 했다.[5] 이 시기 카이저슬라우테른은 갓 1부리그로 승격한 상태에서 97-98 분데스리가에 우승까지 이루는 그야말로 식스센스급의 반전을 보여주면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6] 2000년 AS로마로 이적[7] 이적얘기가 오고갈 무렵 독일 대표팀으로 출전한 발락이 평가전에서 몰타를 상대로 4골을 넣자 이걸 핑계로 더 높은 이적료를 요구했다고 한다.[8]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3시즌간 맨유가 최전성기를 맞으며 리그 3연패와 2007/08 시즌 챔피언스리그를 그것도 결승에서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첼시를 상대로 우승한 것을 생각하면 역시 축구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스포츠다.[9] 아시다시피 당시 로만이 끔찍히 러브콜을 보냈던 셰브첸코도 이 시기 영입되면서 드록바와 투톱을 쓸 수 밖에 없었고 원톱을 울며 겨자먹기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10] 그러나 결국 셰브첸코가 예상 외로 부진한 탓에 첼시는 결국 기존의 4-3-3으로 돌아가게 되었다.[11] 사실 마켈렐레는 이 시기에도 나름 건재하였다. 마켈레레는 마지막 시즌인 07-08 시즌에도 존 오비 미켈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12] 그리고 현재 완전히 맛이 간 에시앙도 이 시기에는 어마어마한 활동량과 피지컬로 괴물포스를 뽐냈다.[13] 실제로 발락은 청소년시절 스위퍼와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축구를 한 경험이 있다.[14] 에시앙이나 마켈렐레가 수미로 뛸때 가장 부족했던게 제공권이었다. 이후 나중에 들어온 네마냐 마티치와 비교해봐도, 마티치가 조금 더 수비적으로 툭화됬을지언정 발락의 시야나 패스 능력에는 전혀 미치치 못한다.[15]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경기력을 압도한 것은 물론이고, 특히나 발락 본인은 맨유와의 챔스결승 리매치도 꽤나 기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바르셀로나가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1-1로 승리하여 결승에 갔고 맨유를 꺾고 챔스를 우승한다.[16] 공교롭게도 독일 출신이고 독일 청소년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나, 독일 국가대표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자 부친의 조국인 가나 국가대표를 선택, 월드컵에서 독일과 맞대결을 했다. 이복동생인 제롬 보아텡은 독일 국가대표를 선택했는데, 이 태클에 대해 비난을 해서 사이가 나빠졌는지 둘은 경기에서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17] 안첼로티는 내부든 외부든 마찰을 굉장히 꺼려하는 성향의 감독이며, 당시 첼시팬들의 안첼로티를 향한 비판들도 보드진의 말을 너무 고분고분 잘 듣는다는 것이었다.[18] 은퇴이후에도 첼시 훈련장에 많이 얼굴을 비추는 선수중 한명이다.[19] 이 대회에 독일은 마테우스, 헤슬러, 비어호프 등 30대 노장선수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1990년대 독일축구의 마지막 전성기를 선보인 멤버들로 이 때부터 독일축구는 녹슨전차라고 비야냥을 들어야 했었다. 비유하자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이탈리아 대표팀의 엔트리라 생각하면 된다.[20] 발락에게 골을 내주고 가장 좌절했을 이운재는 후에 독일과의 평가전에서 페널티 키커로 나선 발락의 페널티킥을 선방해서 개인적으로는 복수를 이루었지만. 아울러 발락은 21세기 들어 성인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상대로 골을 넣은 유일한 독일 성인 선수다. 같은 기간 동안 한국은 김동진, 이동국, 조재진, 김영권, 손흥민이 독일을 상대로 득점했다.[21] 당시 이탈리아는 프란체스코 토티,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크리스티안 비에리, 필리포 인자기, 파올로 말디니, 파비오 칸나바로, 알레산드로 네스타, 잔루이지 부폰이라는 그야말로 완전 공포스러운 전력의 팀이였으며 2년 전 UEFA 유로 2000 준우승 멤버였다. 프랑스, 브라질, 스페인과 더불어 우승후보로 꼽히는 팀이었다.[22] 그런데 2000년 8월 16일 독일은 스페인과의 친선전에서 4 : 1로 스페인을 완파한 적이 있다. 이 때는 발락과 함께 제바스티안 다이슬러메멧 숄, 옌스 노보트니, 크리스티안 뵈른스가 건재한 상태였고, 옌스 예레미스의 컨디션도 좋았을 때였다. 만약 이 선수들이 부상 없이 그대로 커리어를 이어 갔다면 독일은 2006년보다 더 빨리 암흑기를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2002년 월드컵에선 발락과 예레미스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전부 부상크리로 대회에 불참했다.[23] 2000년도 보다도 더 최악이였다. 그 때는 그래도 분데스리가 클럽팀들이 유럽클럽대항전에서 어느정도 좋은 모습이라도 보였지 2004년도에는 그 분데스리가의 마지막 희망인 바이에른조자 유럽클럽대항전에서 신나게 털린다. 즉 이 시기는 국가대표로나 분데스리가 모두 최악의 시기를 달린 셈.[24] 2004년엔 일본을 3:0으로 떡실신시켰는데, 여기서 발락이 2번째 골을 넣었다. 나머지 2골은 클로제의 골. 그러나 3일 뒤, 순수 국내파로 나온 한국에게 1:3으로 처발릴 정도의 눈물나는 경기력을 보여주었다(...).[25] 당시 프링스는 주로 라이트백에 많이 포진되었었다. 본격적으로 수비형 미드필더를 본 건 클린스만 감독이 독일 대표팀을 맏으면서 4-4-2포지션을 사용할 때부터였다.[26] 게다가 당시 람은 지금의 명성과는 차원이 다른 무명의 신예였고 그렇기에 지금과 같이 중앙을 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중앙을 하만 혼자서 버티는 정신나간 포메이션이 탄생된 것이다.[27] 다만, 이 당시에 슈바인슈타이거는 윙어가 주 포지션이었다. 슈바이니가 중미로 본격적으로 뛰게 된 것은 09-10 시즌부터이기 때문.[28] 물론 하만의 경우 주 포지션이 홀딩 미드필더이나. 이번 포지션의 경우 중원에 달랑 하만을 혼자 배치시켰다.[29] 하만을 깎아내리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분명 하만의 전성기 시절엔 유럽 최고의 수준의 강력하고 정확한 킥능력을 소유한 선수였고 이 것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2004년 독일의 예능수준의 스쿼드를 보면 하만의 이런 뛰어난 능력이 거의 계륵수준이 되어버린다.[30] 공격력이 딸리긴 해도 예레미스의 넓은 활동량으로 인해 과거 바이에른은 윙들이 자주 오버래핑에 나설 수 있었고 어느정도 예레미스가 커버를 잘 해내었는데 하만은 이게 전혀 되질 않았다.[31] 프링스는 발락만큼은 아니지만 중앙 미들필더의 정석다운 플레이를 선보인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그리고 발락 못지않는 호쾌한 슈팅 능력도 자랑했는데 2006년 독일 월드컵 개막전 코스타리카전에 보여준 득점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인성이 시궁창이라서 2006년 월드컵 당시 아무 이유없이 아르헨티나의 훌리오 크루스를 때렸다.[32] 알다시피 발락은 2010년까지 독일 대표팀의 주장으로 활동했으며 발락이 월드컵 직전 불의의 부상으로 빠지면서 람이 불가피하게 주장 완장을 받은거지 대표팀 영향력이 약화되어서 발락이 대표팀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다.[33] 독일 대표팀 후배 제롬 보아텡의 이복형 케빈프린스 보아텡과 충돌하면서 입었다.[34] 이로 인해 그의 등번호 13번은 토마스 뮐러가 달았고, 발락이 은퇴하고 나서 완전히 물려받았다.[35] 이는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 메수트 외질 등의 2선에서의 엄청난 활약이 2010년 월드컵에서의 선전의 이유가 됐다. 특히 토니 크로스는 당시 레버쿠젠 시절 메찰라 포지션에 활동하면서 2선에서의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었고, 메수트 외질 역시, 브레멘에서 유벤투스로 떠난 디에구의 공백을 잘 메꾸면서 기량 상승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발락이 빠진 중원에서의 공백은 윙어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성공적으로 정착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메우면서 세대교체에 성공한 것도 있었다.[36] 호나우두, 나카무라 슌스케도 2경기를 남기고 센추리 클럽에 들지 못했다.[37] 혹자는 4-2-3-1이 UEFA 유로 2008 때의 스페인이 첫 선을 보인 포메이션이라고 착각하기도 하는데 4-2-3-1은 생각보다 역사가 매우 깊은 포메이션이며,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 역시 틈틈히 4-2-3-1 포메이션을 선보이기도 했다.[38] 흔히 2002년 월드컵에서 라멜로프가 스위퍼를 보면서 라멜로프를 전문적인 수비수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본래 그는 수비형 미드필더이며 레버쿠젠 시절 박스 투 박스 역할을 한 적도 있다.[39] 참고로 주제 무리뉴는 가족들과 RAW를 보러갔다가 셰인 맥마흔이랑 세그먼트까지 했다. 다만 지역이 아스날 팬이 많은 지역이라 야유를 좀 받았다는듯.[40] 발음을 들어보면 영국식에 가깝다. 대충 대부분의 독일식 영어 느낌이 많이 난다.[41] 위 사진은 2007-08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존 테리가 결정적인 실축을 한 직후 좌절하는 발락의 모습이다.[42] 뮌헨에서 팬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며 첼시로 이적한 이유가 빅 이어를 들고싶어서였는데, 첼시 시절 결승에 갔던 유일한 시즌인 07-08시즌 승부차기 끝에 준우승하며 들지못했다.[43] 심지어 07-08 시즌 첼시가 FA컵에서까지 준우승을 차지했으면 무려 '''5연준'''이 될 뻔했다.[44] 독일에서 우상이란 뜻의 단어 (das) Idol은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강한 의미의 뜻은 아니다. 좋아하는 선수, 존경하는 선수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차범근 해설위원, '발락의 우상 발언은 오해' [45] 참고로 발라크는 동독 출신인데, 서로의 방송을 절대 보지 못하게 하는 남북한과는 달리 동독에서는 서독 TV를 볼수 있었다. 영토 한복판인 서베를린에서 방송이 송출되는지라 동독 정부가 막는게 불가능했기 때문. 하지만 포어포메른과 발라크의 고향인 괴를리츠를 비롯한 작센 동부는 서독 TV의 전파가 안 닿는 사각지대로 악명이 높았다. 참고로 동서독은 발라크가 14살 때 통일되었다.[46] 뭐야 이 듣보잡은,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한 때 바이에른에서 윙백 유망주로 밀어주려고 했던 선수로 바이에른 방출 후유증으로 2부 리그까지 떨어졌지만 지금은 준수한 수준의 분데스 윙백이다. 헤르타 베를린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국대 재승선 논의까지 오갔다.[47] 슈바인슈타이거와 공식적으로 결별했음을 공표한 시기는 2007년 2월이다. 렐이 말하는 발락과의 스캔들 시점은 2006년이므로 이 때 이미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뜻이다.[48] 아들 3명을 낳을때까지 동거 관계였으나 2008년 7월 유로 준우승 이후 동거녀와 결혼을 했다.[49] 정확히 이 사건이 별거의 발단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레버쿠젠에서 활동하다 스캔들이 밝혀진 시기에 아들 3명을 데리고 부인 지모네 발락은 뮌헨에 따로 거주하기 시작했다.[50] 뢰프는 2010 남아공 월드컵을 기점으로 세대교체를 성공시킨후 과감히 발락을 내치고 람에게 주장직을 넘겨주었다. 그 이후로 아직까지 발락은 저 둘에게 앙금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며 2020년 현재까지 화해하지 않았다.[51] 이에 토니 크로스가 “'''아무래도 그가 대표팀 감독을 하고 싶어서 저러는 것 같다.'''” 라며 대선배에게 빈정 거렸다. 토니 크로스는 뢰프에 의해 2010년 대표팀의 주축으로 떠오른 선수이며 10년 가까이 그의 지도 아래서 대표팀 주전으로 뛴 선수라 뢰프의 편을 들어주는게 전혀 이상한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크로스는 자신이 그런말 할 처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트위터에 2017년 새해 인사를 7-1이라는 대회의 참극을 떠올리며 각각 독일 국기와 브라질 국기로 올리면서 브라질인들을 자극하는 행동을 했다가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에게 2:0으로 탈락하는 바람에 독일은 결국 한세기의 놀림거리로 전략해 버렸다. 거기다 김영권에게 패스까지 해주는 역적까지 취급당한다는건 덤.[52] 이탈리아를 위해 기도하자.[53] 독일을 위해 기도하자.[54] 발락을 위해 기도하자.[55] 물론 반대로 이탈리아 땅에서 독일이 우승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