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디 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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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축구선수 출신 전 감독, 축구경영인. 2005년에 바이어 04 레버쿠젠 감독을 맡았고, 2011년부터 바이어 04 레버쿠젠 단장을 맡고 있다.
선수시절엔 80년대 독일 축구의 황금기를 이끈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지도자 시절엔 독일 축구의 암흑기에 대표팀을 이끌면서 홀로 고군분투하다가 빛을 발휘하지 못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요약하자면 선수 시절엔 황금기에 걸맞는 활약을, 감독 시절엔 암흑기에 묻힐 수밖에 없었던 영광과 굴욕의 순간을 공존했던 인물.
참고로 과거에는 완성형 시스템하에서 '푈'의 출력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지라 '펠'을 대신 쓰거나 혹은 '푀일러'라고 돌려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2002 한일 월드컵 때는 유니코드가 사용되기 시작한 무렵이라 대부분 제대로 표기했으나 아직 완성형으로 출력하던 언론에서는 'D러'라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독일 대표팀에서 클린스만과 투톱으로 많이 기억되지만 실제로 두 선수가 함께 투톱으로 뛴 기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90 월드컵 우승 때 함께 투톱으로 뛴게 사람들의 뇌리에 너무 많이 남아 그렇지만, 그때 푈러는 대표팀 커리어의 후반이었고, 클린스만은 주전으로 자리잡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때였다. 푈러는 실제로 월드컵에서의 활약만 따지면 클린스만보다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때는 독일에 너무 기라성 같은 스타가 많았고, 짬빱도 많지 않던 푈러는 대표팀의 리더로 부각되지 않는 선수였고 때문에 실력, 활약에 비해 의외로 과소평가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일단 외모부터가 뽀글머리 때문에 별명이 독일에서도 아줌마였고, 당시 금발머리의 미남 스트라이커로 인기가 대단했던 젊은 클린스만에 비해 주목도가 떨어졌다. 경기에서도 클린스만이 금발을 휘발리며 길다란 다리를 휘적이며 멋지고 때로 우아한 모습을 보였다면, 푈러는 민첩하지만 저돌적이고 투박한 움직임을 보여 게르트 뮐러처럼 비주얼적으로는 그다지 인기있는 스트라이커가 아니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여섯 살의 나이에 TSV 1860 하나우라는 축구 클럽[2] 에 가입 후 유소년 생활을 했다. 열다섯살인 1975년 키커스 오펜바흐 유소년 팀으로 옮겼고 1977년 정식으로 2부리그에서 프로 데뷔를 한다. 데뷔 시즌엔 5경기에 출전 1골, 그 다음시즌인 1978/79시즌에는 31경기 출전 11골을 넣으며 가능성을 보여준 루디푈러는 1979/80시즌에는 38경기에 출전, 무려 40골을 넣는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다. 루디 푈러의 이러한 활약에도 오펜바흐는 당시 리그 8위를 기록하며 1부리그 승격에는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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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81시즌 TSV 1860 뮌헨에서 루디 푈러를 영입하며 1부리그 무대를 밟고 주전 선수로 33경기에 출전 9골을 넣으며 그럭저럭 활약을 하지만 리그 16위를 기록하며 2부리그로 강등되어 루디 푈러의 1부리그 경험도 1년만에 끝난다. 1980/81시즌에는 37경기에 출전 37골을 기록하며 팀을 2부리그 4위로 이끌지만 1860뮌헨의 재정적인 문제로 1부리그 승격실패는 물론이고 아마추어 리그로 강등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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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루디 푈러는 그 직후 1982/83 시즌에 오토 레하겔 감독이 이끄는 베르더 브레멘 으로 이적한다. 브레멘에서는 다섯시즌동안 활약했으며 1985/86시즌을 제외한 시즌에는 리그 30경기 이상 활동하며 다섯시즌동안 리그 137경기에 출전 97골을 넣는 파괴력을 보여줬다. 그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열리는 시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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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88 시즌 AS 로마로 이적하는데 브레멘 시절보단 득점력이 줄긴 했지만 오히려 팀의 공격전술적 측면에선 주요선수가 된다. 명실공히 로마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하며 1990/91 코파 이탈리아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팀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UEFA컵 준우승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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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3 시즌 프랑스 리그 1의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3] 한다. 유러피언 컵이 UEFA 챔피언스 리그로 개편된 첫 1992/93 대회에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고[4] 리그까지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하고 그 다음 시즌인 1993/94시즌에는 리그 준우승을 차지한다. 다만 그 당시 푈러를 제외한 모든 마르세유 선수들이 다름아닌 약을 빨며(...)[5] 각종 대회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 게다가 팀의 구단주가 승부조작에 관여되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며 팀이 강등되자 루디 푈러도 팀을 떠난다. 1860뮌헨 시절에는 성적 부진으로 2부 리그로 강등되고 그 다음엔 재정난으로 2부 리그에서 아마추어 리그로 강등되더니 마르세유때는 승부 조작으로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어 루디 푈러는 강등만 가지각색의 이유로 3번 당한셈.
1994/95 시즌에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하였고 1995/96시즌 까지 두시즌동안 활동하며 36살의 나이로 1996년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2.2. 국가대표
브레멘 이적 후인 1982년 국가대표에 처음으로 발탁되었다.[6] 국가대표에서 주전으로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UEFA 유로 1984였다. 그리고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도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준우승의 기여했다.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에게 0-2로 일방적으로 발리고 있었는데 당시 독일 감독이었던 프란츠 베켄바워가 비장의 카드로 푈러를 투입시켰고 푈러는 여기서 1골 1어시스트로 동점까지 따라붙었다. 하지만 디에고 마라도나 - 호르헤 발다노 - 호르헤 부루차가의 삼각 편대를 푈러 혼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 결국 부루차가에서 결승골을 내주고 2-3으로 패했다. 다만 푈러는 1986년 월드컵 전체를 통털어 마라도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유일한 선수가 되긴 했다. 이후 UEFA 유로 1988에선 스페인과의 경기에 혼자 두 골을 넣는 등 맹활약했지만 4강에 당시 오렌지 삼총사가 이끄는 역대 최강인 네덜란드에게 패하면서 대회를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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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 서독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맹활약하며 서독의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곱슬머리와 콧수염을 기른 외모는 비주얼적으로도 시선을 끌었기 때문에 서독 경기에서 유난히 더욱의 그의 활약을 눈에 띄게 했다. 16강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동시 퇴장은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레이카르트와 설전이 있었는데 레이카르트는 푈러의 머리에 침을 뱉고 귀를 비틀고 발을 밟는 행동을 보였다. 사실 이건 네덜란드와의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서독 국대를 이끈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이 네덜란드를 강하게 디스하면서 심리전을 벌였고 결국 네덜란드 선수단이 여기에 동요한 까닭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7] 안 그래도 선수 시절 다혈질적 성격으로 유명했던 레이카르트는 베켄바워의 말에 심하게 동요된 셈. 다만 푈러도 경기 도중 골키퍼를 피하기 위해 다이빙을 하며 페널티킥을 유도하는 행동을 보였고 결국 푈러와 레이카르트는 동반 퇴장을 당한다.
레이카르트는 추후에 사과를 하며 푈러와의 일을 잘 마무리가 되었고 나중에는 같이 광고 촬영도 했다.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에서는 페널티킥을 유도했는데, 이 페널티킥의 성공으로 우승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UEFA 유로 1992에서도 출전했지만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여 남은 경기에 모두 출전하지 못했다.
그후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 참가했으나 이때는 노쇠한 상태라 주로 교체로 출전했다. 94년 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는 위르겐 클린스만과 칼 하인츠 리들레였다. 16강전 벨기에 전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을 8강에 진출시켰다.
서독/독일 국가대표로서 통산 90경기에 출전하여 47골을 기록했다. 독일 국대에서도 역대급이라 할 수 있는 기록이지만 기록에 비해 임팩트가 약하게 느껴지고 있다. 그가 국대에서 활약한 시기의 전반기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후반기에는 위르겐 클린스만이 있었기 때문에 국대에서 푈러는 원톱이라는 롤을 수행한 적이 거의 없고 대부분 루메니게나 클린스만과 투 톱을 이루어 출전했다. 특히 월드컵에서의 득점이 루메니게나 클린스만에 밀리다 보니 임팩트가 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국대에 통산 108경기에 출전하여 47골을 넣은 클린스만과 비교하면 경기당 득점은 오히려 푈러가 뛰어나다. 클린스만이 푈러보다 출전 횟수가 많다고 클린스만이 대표팀에서 푈러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푈러가 국가대표로 활약한 시기는 서독이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세 번 연속 월드컵 결승에 올랐던 전성기와 거의 일치하는 반면에 클린스만은 1987년에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여 녹슨 전차 시절인 1998년까지 독일 대표팀에서 활약했다. 푈러는 대표팀 시절 루메니게는 물론이고 클라우스 피셔, 클라우스 알로프스, 디터 뮐러, 등 쟁쟁한 스트라이커들과 경쟁하며 출전했지만 클린스만의 경우 대표팀 암흑기 시절이라 별다른 경쟁 없이 대표팀에 출전했고 때문에 클린스만은 선배들과 달리 대표팀 포크츠 감독에게 마테우스를 뽑으면 자기가 출전하지 않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던 독일 대표팀 역사상 전무후무한 갑질을 하며 출전할 수 있었던 선수였다.
3. 감독 경력
은퇴 이후 바이어 레버쿠젠에서 기술고문 자격으로 활동하던 루디 푈러는 UEFA 유로 2000에서 실망스러운 경기력과 1무 2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8강 진출에 실패하자 에리히 리베크에 이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에 오른다. 사실 루디 푈러보다 후보에 오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인물이 크리스토퍼 다움. 크리스토퍼 다움은 중위권에 머무르던 1. FC 쾰른을 2차례의 리그 준우승과 한번의 리그 3위를 기록하며 팀의 도약을 이끌며 VfB 슈투트가르트에서는 리그 우승, 바이어 레버쿠젠에서는 무려 3번의 리그 준우승을 기록하며 비록 바이에른 뮌헨 같은 리그의 최강팀을 맡진 못했지만 리그 중상위권 팀을 이끌며 최대의 성과를 낸 감독이었다. 다만 크리스토퍼 다움이 독일 국가 대표 감독 후보에 오르던 시기에 다름 아닌 약을 빨았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크리스토퍼 다움의 독일 감독직은 취소되고 독일 축구협회는 루디 푈러에게 감독직을 제의한다.
처음엔 지도자 라이선스가 없이 감독직을 수행하였지만 급하게 라이선스를 취득 후 감독직 활동을 시작한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지역 예선에서는 비록 뮌헨에서 마이클 오언에게 해트 트릭을 얻어맞고 1:5로 대패 당하며 당시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루디 푈러의 부친이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안습한 일화가 있지만 그래도 그 경기를 제외하곤 무패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다. 월드컵 본선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8:0으로 잡고, 아일랜드와는 무승부, 카메룬은 2:0으로 잡으면서 16강에 진출했으나 16강 파라과이전, 8강 미국전 에서는 올리버 칸의 미친듯한 선방과 미하엘 발락의 원맨 활약으로 4강에 진출했고 4강에서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1:0으로 겨우 승리를 거두고 결승전에 진출하지만 브라질에게 0:2로 패하며 월드컵 준우승에 머무른다.
이 후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이루며 스타텀에 오르나... 천운이 따른 대진운과[8] 주야장천 3-5-2의 고집 및 어쩡정한 4-4-2 전술로 여전히 못 미더운 경기력을 보여주며 평가절하된 경우가 많았고 이 후에도 루마니아에게 1-5로 깨지질 않나 심지어 유로2004 예선에서 탈락한 헝가리에게도 0-2로 지더니 결국 유로 2004에서 조별리그 2무 1패 최하위로 처참히 망가지면서 대표팀 감독 자리에 물러나게 된다.
결과적으론 2002 한일 월드컵 준우승이 있기 때문에 그리 실패라고는 볼 수 없지만 에리히 리베크에 이어 독일 축구의 암흑기를 상징하게 되는(...) 감독으로 남게 된다.
사실 오히려 리베크 시절보다도 이 시기가 바로 독일 축구의 암흑기라 볼 수 있는데 리베크 감독 당시 독일 국가대표의 멤버는 나쁘지는 않았다. 올리버 칸, 메멧 숄, 옌스 예레미스, 토마스 헤슬러, 토마스 링케, 세바스티안 다이슬러, 카르스텐 얀커, 옌스 노보트니 등 수준급 선수들도 있었고 분데스리가는 리베크 시절엔 어느 정도 유럽클럽 대항전에서 나름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9] 거기에 선수들은 분데스리가와 각국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멤버들이었다. 다만 독일은 전통적인 3백에서 당시 현대축구의 흐름인 4백으로의 전환이 늦어지게 되었고 루디 펠러 감독 시절엔 세대교체의 실패[10] , 이전 세대보다 못한 스트라이커진의 부진, 독일 축구의 희망으로 떠오른 세바스티엔 켈과 세바스티안 다이슬러 등이 잔부상에 시달리는 것이 당시 독일 축구 암흑기에 크게 작용했다. 게다가 펠러가 감독직을 맡을 시절엔 분데스리가조차 유럽무대에 빌빌거리던 시절이였으니 진정한 독일축구의 암흑기.
루디 푈러도 나름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2002 월드컵이 끝난 후부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프레디 보비치[11] , 마르코 보데[12] 와 같은 노장 선수들을 국가대표로 불러들이는 한편 다니엘 비에로프카[13] , 티모 힐데브란트[14] , 한노 발리티쉬[15] , 마누엘 프리드리히[16] , 마르쿠스 슈로스[17] , 벤야민 라우트[18] , 케빈 쿠라니[19] , 파트릭 오모엘라[20] 같은 떠오르고 있는 유망주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위에 언급한 선수들이 활약한 분데스리가는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빌빌거리며 맛탱이가 간 시절이었기 때문.[21]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서 사직한 이후 AS 로마의 사령탑이 되었다. 하지만 당초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후임으로 예정된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이 부인의 건강 문제로 갑자기 사임하는 바람에 선임된 상황이었기에 선수들과 전술 및 훈련 등 호흡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고, 여전히 영 좋지 않은 전술, FC 디나모 키예프와의 챔피언스리그 홈 경기에서 홈 관중이 심판에게 이물질을 던져 부상을 입히는 바람에 해당 경기 몰수패에 챔피언스리그 나머지 홈경기 무관중 징계를 당하는 불운[22] , 안토니오 카사노와 같은 주요 선수와의 불화로 어수선한 팀 분위기 속에서 결정적으로 두 명이 퇴장당한 볼로냐에게까지 1-3로 지자 결국 사퇴한다. 2005년 이후 지도자 생활에 거리를 두며 뚜렷한 활동을 하지 않던 루디 푈러는 2011년 레버쿠젠의 단장으로 선임이 되면서 지금까지 직책을 이어나가고 있다. 2005년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조 본프레레 감독이 사퇴하면서, 후임 감독 후보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3.1. 2002년의 성과
게르만 순혈주의를 무너뜨리면서 다양한 선수기용과 실험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2010년대의 황금세대가 등장하게 된 원동력을 만들어준 감독이다. 선수를 보는 눈이 탁월했으며 폴란드계의 클로제와 가나 혈통의 게랄드 아사모아, 나이지리아인인 오우오모엘라 등 과감한 선수기용으로 보수적인 독일축구를 타파한 감독이였다. 특히 당시 무명이였던 클로제와 당시 독일 최고의 선수인 노보트니, 숄, 다이슬러의 공백을 라멜로프, 베른트 슈나이더로 매우는 등 나름 전술적 플랜에 대해선 폭이 넓은 감독이였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독일의 3-5-2전술의 고착화를 시킨 감독으로 인해 저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 것은 '''당시 독일 대표팀의 인재가 고갈''' 및 그 당시 '''대세 전술인 4-4-2를 쓰기엔 특정 능력에만 특화된 독일선수들의 능력이 한계'''를 보인 상황이였고[23] 이에 퓔러 감독은 고육지책으로 3-5-2 전술을 썼는데 이 것이 어느정도 2002년 월드컵에선 효과를 보이는데 2002년도 월드컵에 참가한 팀들 대체로 투톱을 썼기에 쓰리백으로 돌리기에 충분했으며 이 덕에 월드컵 결승까지 가게된다.
따지고 보면 2002년도까진 독일대표팀에 그리 인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였다.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한 '''옌스 노보트니, 크리스티안 뵈른스, 세비스티안 다이슬러, 메멧 숄'''은 당시 어느정도 유럽에서 알아주는 수준급 선수들이였다.[24]
3.2. 2004년의 몰락
문제는 2002년 직후로는 원톱이 유행하면서 더 이상 3-5-2를 쓸 수 없게 되었단 거고, 4-4-2로 어찌어찌 갈아타게 되지만, 이번엔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 대표적으로 미하엘 발락의 파트너를 엉뚱한 선수로만 배치시키면서 독일의 3-5-2 시스템의 고착화를 시킨 것이다. 여기에 대표적으로 희생된 선수가 바로 옌스 예레미스, 디트마어 하만 그리고 토르스텐 프링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무리하게 4-4-2를 가동하기 위해 발락의 파트너로 예레미스를 기용했고 예레미스 본인은 어느 정도 제 몫은 해주었으나. 그 주변의 선수들이 전부 공수 부분에서 엇박자를 내면서 영 좋지 않은 경기력을 선보였고 결국 펠러 감독은 다시 한번 3-5-2로 돌아섰다. 하만의 경우 2004년까지 발락과 중원의 파트너로 어느정도 활약을 해주었으나 이는 과거 마르코 보데라는 파이팅형 풀백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보데가 대표팀에 은퇴를 하고 푈러 감독은 그 자리에 예레미스를 배치시키지만 경기력만 망가지고 특히 UEFA 유로 2004에서는 기형적인 5-4-1 포메이션을 선보이며 예능을 시전하였다.
하만의 경우 데드볼 스페셜리스트였다. 중장거리 킥이 정확하고 강력한 선수였으며 그렇기에 리버풀 시절에도 어느 정도 명성을 날릴 만큼 유럽에서 알아주는 미드필더이다. 문제는 포지션 상성을 받는 선수이기에 여기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는다면 그의 장기는 계륵이 되어버리는 상황이란 거다. 발락처럼 포지션 상성을 전혀 받지 않는 선수라면 모를까 볼 배급과 조율을 장기로 하는 이런 선수에게 4-4-2 시절에는 박스 투 박스를 맡겼고 5-4-1 포지션엔 '''혼자서 중원을 버텨라''' 라고 떡하니 놓으니 좋은 플레이가 나올리 없다. 하만은 이후 클린스만 체제에서 전술적 문제로 인해 2006 FIFA 월드컵 독일 엔트리에서 제외되고 만다.
그렇다고 푈러가 감독으로서 그렇게 무능한 건 아니였다. 미하엘 발락을 가장 잘 활용한 감독이였으며, 앞에 언급한 미로슬라프 클로제, 필립 람,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를 발굴했고 이 후에도 많은 선수들을 등용했다. 그리고 그 악명 높은 유럽예선에서 두 번이나 통과하면서 당시 망가진 대표팀을 꾸역꾸역 이끌었고 특히 이 시기 독일의 마땅한 풀백 자원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파트릭 오모엘레라, 크리스티안 슐츠, 아르네 프리드리히 등 당시 신예들도 꾸준히 기용하면서 어떻게든 트랜드에 맞게 포백을 갖출려고 노력했었다.
만악의 근원은 이 시기가 '''독일 축구의 암흑기'''였다는 것. 인재가 없으니 4-4-2의 열쇠를 쥐고 있는 프링스를 울며 겨자먹기로 풀백으로 세우며 과거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고 결국 위와 같은 극단적인 포메이션은 과거 90년대 말 전성기 시절 뮌헨이 선보인 전례가 있기는 했으나, 문제는 발락과 하만이 상성상 전혀 맞지 않았다는 점.
이후 클린스만이 프링스를 발락의 새로운 파트너로 내정함과 동시에 프리드리히-메르테자커-메첼더-람의 포백이 안정화되면서 독일 축구의 암흑기가 끝나게 된다.[25] 힌마디로 '''선수 시절엔 시대를 너무 잘 타고났으며, 감독 시절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으리의 모 감독과도 비교될 수 있는데 푈러의 경우 누구처럼 으리로 기용하진 않았다. 당장의 클로제의 폼이 하락하자 바로 케빈 쿠라니와 안드레아스 힌케를 대체 선수로 기용한 것만 봐도...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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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루디 푈러, 울리 슈틸리케, 노버트 마이어.[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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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레버쿠젠의 한국 투어 당시 차범근과 함께.
차범근과는 매우 절친한 사이. 차범근의 아들 차두리가 '''푈러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 파라과이전 당시 차범근과의 디스전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는데, 지루한 경기 끝에 종료 직전 독일이 결승골을 넣어 1-0으로 이긴 것을 두고 차범근이 '''"지금까지의 (독일 대표팀) 경기중에 오늘 경기를 가장 내용도 나쁘고 선수들의 준비가 안된 경우로 꼽겠다." / "이런 경기는 한강 둔치에서도 볼 수 있는 경기다."'''라는 혹평을 하였다. 그러자 푈러는 '''"(차범근이) 과거 레버쿠젠에서 뛸 당시 아스피린[27] 을 너무 많이 먹은 것 같다."'''라고 되받아친 것.[28]
그렇잖아도 파라과이 상대로 맥없는 졸전을 펼친 것에 격앙되어 있던 독일 축구팬과 언론은 '''차범근이 맞는 말 했는데 뭘 잘했다고 말대꾸냐'''며 푈러 감독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고 이게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자 8강전 미국과의 경기가 열리는 울산 문수 축구 경기장에서 차범근과 직접 만나 오해를 풀었다.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29] 다만 오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두 사람이 언론에 해명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앞서 말했다시피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언론에서 보도한 것과는 달리 애초부터 싸움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 차범근이 혹평한 것 자체가 '''독일 대표팀의 경기 내용'''이었지 푈러를 직접적으로 깐 것도 아니었던지라 푈러 입장에서 감정적으로 되받아칠 리도 없었다.
즉 평소에 친한 차범근이 16강전에 대해 혹평을 하자 푈러가 농담 섞인 맞디스를 했을뿐인데 독일 현지에서 팬들의 비난까지 빗발치고 이게 한국에서도 보도되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꼬였던 것이다. 이에 울산에서 차범근과 만난 푈러는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 실수했다."'''라는 말로 사과했고 차범근 또한 이를 이해해주면서 훈훈하게 끝났다. 실제로도 푈러의 과거 소속팀 중 하나가 바로 바이엘 레버쿠젠이기 때문에 아스피린 드립을 치는건 결국 셀프디스일 수밖에 없다.
월드컵 커리어를 보자면 1990년 월드컵 우승 멤버이긴 한데 '''선수와 감독 모두에서 준우승이 있다.''' 1986년 월드컵에서는 결승전에서 그렇게나 압도적인 맹활약을 하고도 결국 마라도나의 벽은 지나치게 높았던 탓에 준우승을 했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초반부터 끝판왕들인 지단의 프랑스와 이적료 총합 1위인 아르헨티나 등이 대거 광탈하면서 토너먼트가 꿀대진으로 점철되었으나 당시 기준으로 가진 게 별로 없었던 독일로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승후보인 브라질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을 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1.1. 선수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2~1994)
- UEFA 챔피언스 리그: 1992-93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90
5.1.2. 감독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2000~2004)
- FIFA 월드컵 준우승: 2002
5.2. 개인 수상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84
- UEFA컵 득점왕: 1990-91
- 분데스리가 득점왕: 1982-83
-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1982-83, 1983-84, 1984-85, 1994-95
- 2. 분데스리가 득점왕: 1981-82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83
- AS 로마 명예의 전당: 2014
[1] 2002년 수훈, 독일 공로십자장 Verdienstkreuz am Bande[2] 우리나라로 치면 차범근의 축구교실을 생각하면 된다.[3] 이 당시가 바로 마르세유가 지롱댕 보르도로 떠났던 디디에 데샹이 돌아왔고, 마르셀 드사이를 영입했으며 장 피에르 파팽이 팀을 지탱하던 때였다.[4] 현재까지도 마르세유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유일한 프랑스 클럽'''이다.[5] 그러나 당시 도핑 테스트에서 음성반응이 나왔고, 마르세유의 수비수였던 마르셀 드사이도 약물 의혹에 부정하는 말을 하였기에 의혹은 있어도 사실이라고는 볼 수 없다.[6] 그때 현역으로 같이 뛴 것이 前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울리 슈틸리케다.[7] 기자가 "16강에서 네덜란드를 만난 것이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까?"란 질문에, "우린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고, 조별리그에서 형편없는 경기력으로 간신히 16강에 진출한 네덜란드가 부담이 될 것입니다."라고 디스했다.[8] 16강이나 8강은 그렇다 쳐도 4강에서 대한민국을 만난건 천운이라고 밖엔 설명이 안된다.[9] 바이에른 뮌헨과 레버쿠젠이 유럽 챔피언스리그에 좋은 모습을 보였고 샬케04와 도르트문트 역시 UEFA컵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인다.[10] 대표적으로 브레메와 타르니트 등 풀백 자원이 고갈되면서 미드필더에 특화된 프링스를 불가피하게 윙백으로 배치하게 된다[11] 1990년대 중반 슈투트가르트의 주전 스트라이커였으나 98년을 기점으로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보였고 도르트문트에서도 자리를 못잡아 볼튼 원더러스로 임대가갔으나 볼튼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해 자유계약으로 하노버 96으로 팀을 옮겼다. 루디 푈러가 재직할 당시 31살의 나이에 2002/03시즌 27경기 14득점을 하며 제2의 전성기를 보냈다.[12] 선수시절 오로지 브레멘에서만 활약한 백전노장 풀백으로 브레멘의 90년대 중 후반 전성기의 기반을 닦은인물[13] 당시 23살,2002년 레버쿠젠 소속의 좌측 윙. 당시 분데스리가 최고의 좌측윙어인 제호베르투의 공백을 메꾸고자 레버쿠젠에서 영입한 선수. 운동량과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았다.[14] 2002년 당시 23살로 후에 분데스리가 무실점 기록을 갱신할 정도로 제2의 올리버 칸으로 주목받고 있었으나.. 2007년 발렌시아 이적 후 로날드 쿠만을 만나면서....[15] 2002년 당시 21살로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2의 마테우스'라는 소리를 들으며 촉망받던 레버쿠젠의 중앙 미드필더, 미하엘 발락의 공백을 메꾸고자 영입되었을정도로 촉망받는 유망주였다.[16] 2002/03 시즌 23살의 나이에 베르더 브레멘에 데뷔한 센터백[17] 유망주라고 하기에 2002/03시즌 27살의 나이였으나 17득점을 기록하며 벤야민 라우트와 함께 1860 뮌헨의 공격을 이끌며 주목받았다.[18] 2002/03시즌 1860뮌헨에서 본격적으로 리그 데뷔를 하며 32경기 13득점을 하며 당시 마땅한 독일 공격수가 없을 당시 촉망받던 유망주였다.[19] 2002/03 시즌 20살의 나이에 슈투트가르트 소속으로 32경기 15득점으로 독일인 최다 득점을 기록[20] 2004년 24세의 나이에 브레멘 더블크라운의 주역이 된 나이지리아 혈통의 독일 선수. 당시 독일국대의 라이트백을 책임질 선수로 기대를 모았으나. 국대에선 영 좋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푈러 감독은 4-4-2의 키를 쥐고 있는 프링스를 주야장천 라이트백으로 써먹게 된다.[21] 요즘처럼 다시 유럽클럽대항전에서 어느정도 포스를 보이고 있다면 모를까 03/04시즌 유럽 리그 랭킹 포인트를 달랑 2점밖에 얻지 못한 리그에 팬들이 관심을 가질리 만무했다. 골수 분데스리가 팬들도 한숨만 쉬던 시기.[22] 결국 푈러 사임 후 레알 마드리드 CF와 TSV 04 바이엘 레버쿠젠에 밀리며 탈락했다.[23] 대표적인 선수가 디트마어 하만 테크니션이 조금 부족했을 뿐이지 전성기 시절엔 레지스타로 불릴 정도로 나름 수비형 미드필더의 교과서 였으나 4-4-2전술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박스 투 박스 형 능력이 없는 선수 그렇기에 발락과의 호흡에 크나큰 문제를 보이데 된다.[24] 다이슬러나 숄의 클래스는 이미 입증되었고 노보트니나 뵈른스 역시 2001/02 유럽클럽대항전에서 최고의 폼을 보여주며 각각 레버쿠젠과 도르트문트를 UCL과 UEFA컵 결승에 올린 인물들 이였다. 단 두 선수 모두 유럽클럽대항전의 4강전에 십자인대 부상으로 2002/03시즌의 절반을 날리면서 기량이 하락하게 된다.[25] 그러나 그 프링스는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 나가서 아르헨티나의 백업 스트라이커인 훌리오 크루스를 '''아무 이유 없이 때려서''' 그게 원인이 되어 국대에서 퇴출당했다. 이후에 UEFA 유로 2008에서 다시 복귀하긴 했지만.[26] 노버트 마이어는 차두리가 뒤셀도르프에서 뛰던 시절의 감독이기도 했다.[27] 링크를 눌러보면 알겠지만 아스피린은 레버쿠젠의 모기업인 바이어사의 대표적인 상품이다.[28] 즉 차범근이 아스피린을 많이 먹은 탓에 말을 잘못했다는 식의 농담이다.[29] 당시 차범근은 MBC 축구 해설위원이었기 때문에, 지상파에서는 MBC가 보도했다.
분류
- 헤센 주 출신 인물
- 1960년 출생
- 독일의 축구선수
- 독일의 축구감독
- 축구경영인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SV 베르더 브레멘/은퇴, 이적
- AS 로마/은퇴, 이적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은퇴, 이적
- 바이어 04 레버쿠젠/은퇴, 이적
- AS 로마/역대 감독
- 바이어 04 레버쿠젠/역대 감독
- 독일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참가 선수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 1994 FIFA 월드컵 미국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4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8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2 참가 선수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감독
- UEFA 유로 2004 참가 감독
- FIFA 월드컵 준우승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