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 무하

 

'''Alphonse Maria Mucha'''
('''1860 ~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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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비화
4. 화풍
4.1. 자포네스크, 아르누보, 무하, 그리고 망가
5. 기타
6. 매체물의 등장
7. 관련 문서


1. 개요


'''세기말의 보헤미안.'''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체코화가.

2. 생애


아르누보의 태동기부터 쇠퇴기까지 수많은 작품과 디자인을 선보인 아르누보 시대의 대표 화가이다.
체코 모라비아의 이반지체에서 출생. 법원의 하급 직원이었던 온드르제이 무하의 재혼으로 태어났다. 재밌는 점은 무하의 어머니는 '''독신주의자''' 였다, 그럼에도 무하가 태어날 수 있었던 일화가 있었는데. 무하의 어머니는 30대까지 독신을 해왔지만 어느 날 꿈에서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내려온다, 천사는 무하의 어머니에게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길 부탁한다. 때마침 그녀의 친척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마지막으로 중매를 권하는 편지였다. 그녀는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온드르제이 무하와 결혼하여 두 여자아이들의 어머니가 되고 남편 사이에서 알폰스 무하를 포함한 1남 2녀(안나, 안젤라)를 낳는다. 이러한 사연으로 무하의 어머니는 알폰스 무하를 굉장히 아끼고 사랑하며 키우게 된다. 어릴 적 어머니는 무하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싶었지만 그들이 살던 곳은 시골이라 방편으로 연필이 달린 목걸이를 만들어 선물한다. 그렇게 알폰스 무하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렸으며,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년기에는 성화를 주로 그렸다. 성가대로 뽑혀 브르노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으로 상경해 무대 배경을 그리는 등의 일을 하다[1] 모리비아로 귀향해 초상화를 그렸다. 이후 카를 쿠헨 백작의 눈에 들어 그의 후원으로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 다니게 해주었지만 2년 후, 그는 보수적인 교육에 싫증을 느껴 줄리앙 아카데미를 나가고 콜라로시에 아카데미에 다니게 된다.
쿠헨 백작은 무하가 1년 넘게 그림을 내주지 않아 그가 불성실하다는 생각을 해 지원은 이제 더 이상 해주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당시, 자유주의 사상에 매료된 합스부르크 제1 왕자였던 루돌프 왕자가 불행한 결혼을 비관해 자살로 인한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체코 민족주의자인 무하는 그가 왕위를 즉위 하면 제국 내에서의 슬라브 민족에 대한 위치가 조금은 나아질 것을 기대 했지만 일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려 큰 충격을 받은 듯 하다.
이후 파리로 가서 잡지와 광고 삽화를 그리며 생활했는데, 우연한 계기로 유명 배우 사라 베르나르[2]의 연극인 지스몽다(Gismonda)의 광고용 포스터[3]를 만들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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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 하나로 당대 최고의 배우와 '''6년 계약'''을 맺게 된다.
이후 각종 포스터와 사계 등의 작품을 제작했고,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만난 이후로는 조각도 제작하였다. 이때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서, 쏟아지는 장신구 디자인 주문에 지친 무하가 컨셉 디자인을 담은 책인 <공식 자료집> 까지 출판할 정도였다. 본인은 '''밑천 다 퍼줄 테니 이거 먹고 떨어져라'''라는 태도였지만, 이를 통해 무하의 디자인이 더 알려지는 역효과를 초래해 더욱 요구가 쇄도했다고(...).

3. 비화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체코를 대표하는 애국자, 민족주의자이기도 하다. 체코 독립에 있어 열성적이었으며, 독립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우표, 화폐 디자인을 손수 하기도 했다. 또한 말년에는 슬라브 민족의 정체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슬라브 서사시>라는 이름의 연작을 제작했다.[4]
이로 인해 1939년 프라하가 독일에 점령된 이후 불온인물로 찍혀 자주 검문받았고, 79세나 되는 고령임에도 게슈타포가 비밀리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결국 게슈타포가 건강상의 문제로 무하를 풀어주긴 하였으나, 기존에 악화되고 있었던 폐렴과 겹쳐서 며칠만에 사망하였다. 나치는 무하의 장례식에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그럼에도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무하가 이렇게 고생하다 죽은 뒤에도 체코는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오히려 무하를 저평가하다가, 1990년대가 되어서야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를 재평가했고 그의 역작이었다가 한동안 잊혀진(...) 슬라브 서사시 역시 다시 재발굴되었다.
체코의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였던 이반 렌들은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엄청난 양으로 수집하기로 유명했고, 이를 가지고 종종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마이아트뮤지엄에서 2020년 3월 1일까지 전시할 예정이다.

4. 화풍


그의 스타일은 극도로 이상화된 인물(주로 여성)과 그를 장식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사물로 구성되며, 소위 말하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화풍의 알파이자 오메가. 또한 배경과 장식에 매우 공을 많이 들이는 화풍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이 상업적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기에 석판화가 많다. [5] 이러한 특징은 초기의 연극 포스터부터 말기의 작품들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초기 아르누보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무하의 감각적인 화풍은 사회적 급변으로 인해 그의 말년에는 지나치게 민족적인 구형 예술이라며 프라하 미술계에서 무시당하기 시작했고, 모더니즘 이후에는 아예 그 존재가 잊혀지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부터 무하의 작품들이 재평가 받기 시작해 현대에서 명성을 되찾았다. 도리어 현대에는 일반인에게는 거부감이 심한 현대미술(추상, 행위예술 등)과 달리 취향을 덜 타는 편이라 인기가 좋다. 특히 기호화된 자연물과 인물의 형태는 디자이너일러스트레이터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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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가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 체코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프라하의 프라하 성 내부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 좌측면에 그가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그의 독특한 화풍 덕에 보통 스테인드 글라스와는 달라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일반적인 스테인드 글라스가 조각난 색유리를 조합해 하나의 그림으로 구성하는 반면, 무하는 유리에 직접 그림을 그린 후 가공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사실 그의 화풍에서 자주 나오는 후광 묘사나 모자이크 패턴, 자수 등은 죄다 슬라브 문화와 정교회 출처였다고 한다(...)

4.1. 자포네스크, 아르누보, 무하, 그리고 망가


자포네스크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서 탄생한 아르누보의 거장 무하의 화풍은 후에 일본의 망가 화풍, 특히 미소녀 그림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과거 뿐만 아니라 현대의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도 무하 특유의 화풍을 모방하거나 오마주하는 경우가 많다.[6] 덕분에 아르누보의 유행기간은 짧았지만,[7] 현재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 사이에선 여전히 이 아르누보가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아담 휴즈, 야마다 아키히로, 아소 미코토, 이즈부치 유타카 등이 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CLAMP로도스도 전기 일러스트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꽃과 도안,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과 옷자락에 둘러싸인 미소녀 캐릭터의 일러스트와 알폰스 무하의 그림들을 비교하면 유사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순정만화에도 영향을 많이 끼쳐서, 주로 인물들이 꽃이나 화려한 장식 배경과 함께 나오는 장면들을 잘 보면 무하의 장식미를 강조하던 화풍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즈부치 유타카는 한국 강연 중에 (아르누보와 무하에 영향받은 자신의 일러스트는)파쿠리라는 너스레를 떨기도 하였다. 이런 관계는 현대에도 찾아볼 수 있는데, 서구는 일본의 망가 화풍을 받아들인 만화, 반대로 일본은 서구의 카툰 화풍을 받아들인 만화가 제작되기도 한다.[8]
해당 작품이 연소자 관람 불가인데다 너무 오래 된 작품이라 국내에 알려져 있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일본 애니매이션의 시조인 데즈카 오사무무시 프로덕션에서 내놓은 70년대 초 극장판 애니 시리즈인 아니메라마 3편도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다.
2016년 12월에 국내 전시회 오프닝 데이에 손자인 존 무하[9]일본일러스트레이터 이즈부치 유타카 특강이 있었다. 그리고 해당 전시회에서 알폰스 무하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했으며, 임주연, 고야성, 추혜연[10], CLAMP, 이즈부치 유타카가 참가했다.

5. 기타


이복누나들인 첫째 누나 아로이시아와 둘째 누나인 안토니아와 어머니인 아말리에가 각각 1879년과 1880년에 세상을 떴다.
쿠헨 백작이 후원을 끊기 전에 무하와 티롤과 북이탈리아를 함께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런 그가 1년 조금 넘게 작품을 내지 않았다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후원을 끊는 것에 의아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후원을 끊었던 이야기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치열한 세상 속에서 독립심을 기르라는 뜻에서 후원을 끊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당시 쿠헨 백작은 무하에게 1달에 200프랑씩이나 지불하고 있었고, 늦어도 6~8개월이면 모를까, 1년 넘게 그 돈을 받으면서 작품을 내지 않았다는 건 지원자에 대한 성의를 다하지 않았단 소리다. 쿠헨 백작이 후원을 끊는 건 타당한 입장이다. 그러나 현대인이 그들의 사정을 어떻게 알까.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추측을 해 보아도 이미 지나간 일들인데다 그들만의 이야기이다.
1906년에 결혼한 아내로 미술학도였던 마리 히틸로바(Marie Chytilova, 1882-1959)는 남편의 매니저이자 딜러로 활동했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 중 하나인 아들 이르지(Jiri, 1915-1991)는 번역가이자 작가로 아버지에 대한 전기를 썼으며 딸 야로슬라바(Jaroslava, 1909-1986)는 화가로 활동하면서 아버지의 작품들을 복원한다. 두 아이들은 무하의 작품에 모델이 되기도 했다.
현대 미술에 끼친 지대한 영향 탓인지 현대 일러스트레이터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6. 매체물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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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Gray-man 1기 오프닝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삽화. '''《Monaco-Monte-Caarlo》'''.
이 작품은 파리-모나코까지 여행을 홍보하는 모나코 몬테 카를로 철도 포스터이다. 디그레이맨의 작중 배경과 등장 인물들이 기차를 타고 다니는 걸 생각해보면 비록 '''가상 19세기'''이지만 알폰스 무하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시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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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죠의 기묘한 모험 TVA 4부에서 츠지 아야 편(20화)에서는 중간중간 알폰스 무하의 화풍을 오마쥬한 장면들이 나오는데, 이는 츠지 아야가 들고다니는 아르누보풍. 그중에서도 무하의 화풍으로 신데렐라 동화책 같은 느낌을 내기 위한 연출인것으로 추측된다.
이외에도 그의 화풍을 오마주한 느낌의 애니/만화 관련 공식 일러들이나 굿즈들이 간간히 등장하는 편.

7. 관련 문서



[1] 성가대로 활동을 했지만 변성기때문에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2] 19세기를 풍미했던 대 배우로, 연기 뿐만 아니라 보불전쟁 시의 사회적 공헌으로도 유명하다. 햄릿 연기로 '여신 사라'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사고로 인해 다리를 자르게 된 후에도 극작가들이 그녀를 위한 각본을 제작해 주었다.[3] 2미터가 넘는 거대한 벽보다. [4] 이 슬라브 서사시는 잘 알려진 섬세하고 화려하기만 한 화풍과는 좀 거리가 있는 편. 장엄하고 화려한 그림도 속해있지만 의외로 죽음이나 슬라브 역사의 음울한 묘사도 상당하다고(...)[5] 후기에는 유화도 상당히 그렸다. 대표적으로 슬라브 연대기.[6] 일단 무하를 비롯한 아르누보 계열 작품들의 특징이 '''딱 봐도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이목을 끌기 쉽기 때문'''. 즉 대중이 접근하기에 진입장벽이 낮다.[7] 20년쯤 된다(...)[8] 이는 일본 망가체의 영향을 짙게 받은 한국/중국의 만화나 일러들도 마찬가지다. 극화 > 모에 > 세미체로 일러계의 흐름이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9] 2013년 전시회에서도 내한했었다. 당시 인터뷰. # [10] 웹툰 창백한 말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