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츠카 에이지
1. 개요
大塚英志. 일본어 표기법을 따른 표기로는 오쓰카 에이지. 일본의 만화원작자 겸, 편집자 겸, 평론가. 그 밖에도 현직교수이며 박사학위도 가지고 있다.
2. 상세
도쿄 출신이며 아버지가 만주에 전재산을 두고 돌아왔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가난하게 성장했다. 이 아버지는 한 때 일본공산당의 당원이었으며 아버지의 사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본인은 뼈 속까지 전후민주주의자이기 때문에 작품에서 좌파 사상이나 공산주의가 다루어질 경우는 미화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루되 지나칠 정도로 까지는 않는다. 아마도 아버지를 연상하기 때문인 듯.
중학교 시절에는 만화동호회에 입회했으며 그 연줄로 고등학교 1학년때는 만화가의 어시스턴트를 맡게 된다. 다음해 그 만화가의 소개로 데뷔. 이런저런 잡지에서 개그만화를 연재하지만 대학수험과 본인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만두고 말았다.
츠쿠바 대학교 시절에는 민속학을 배웠으며 이 때의 경험이 후에 작품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지도교수가 야나기다 쿠니오의 직계제자였던 탓에 교수 중에 한 명이 야나기다의 사상에 대해서 회의적[1] 인 오오츠카에게 민속학을 그만둘 것을 권하였고 오오츠카도 이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제간의 사이가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니었는지 후에 오오츠카의 작품에 대해서 듣게 된 지도교수가 몇 마디 호의적인 말을 전했다고 한다.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오오츠카는 한 때 일한 만화업계로 돌아가는데 작가였던 경험을 인정받아서 아르바이트 편집장이라는 묘한 직책에 올려진다. 이 때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담당을 맡은 적이 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며 만화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이 배운 좋은 경험이었다고 한다.
정사원이 된 오오츠카는 여러 곳에 얼굴을 내밀게 되는데 이 때부터 논평가의 기질을 보이기 시작한다. 후에 함께 일하게 되는 후지와라 카무이, 아내가 되는 시라쿠라 유미 등과 만난 것도 이 시절. 또한 《강식장갑 가이버》의 편집을 맡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순조롭게 레벨업을 하다가 전업, 잡지사의 폐간 등을 거쳐서 독립하였고 만화원작자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본인 스스로는 그렇게 자신있어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올려서 작품은 게임판, 애니메이션판, 소설판 등 다양한 미디어 믹스로 분화되었고 작품의 권리가 더 이상 혼자서 관리할 수 없을 만큼 되자 자신의 작품을 관리하는 사무소를 차리게 된다. 가끔씩 스토리 전개가 막힌 작가 대신 스토리를 써주거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등의 업무도 맡고 있다.
만화에 있어서의 분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그의 사무소에는 그림 담당, 스토리·아이디어 담당 등이 있다. 나름대로 실적을 쌓으면 자신의 연줄을 써서 만화 연재를 밀어넣어주기도 한다.
3. 특징
아버지가 만주에서 생활을 했던 경험과 공산당에 몸을 담았던 경력과 전공투 운동의 변화를 보아온 경험 때문인지 작품에 70~80년대에 테이스트가 짙게 배어있는 것이 특징.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작가는 오시이 마모루, 야스히코 요시카즈 등이 있지만 어느 쪽과도 다르다. 본인 스스로 좌익운동에 몸을 담기도 했던 탓에 좌익사상에 우호적인 오시이와는 다르게 실패할 만했으니 실패한 것으로 그리지만 반면에 인간적으로 공감이 갈 수 있도록 그린다.
또한 얌전한 오덕들과는 다르게 싸우는 오덕이라는 것도 특징. 주류문학의 지나치게 보수적인 성향을 비꼬아대서 자칭 순문학자라는 사람들과는 사이가 몹시 나쁘며 자주 언쟁을 벌이고는 한다.[2] 그러한 점 때문인지 한 번은 초청을 받은 행사에서 도중에 초청을 취소하는 일이 있었는데 도중에 난입해서 마이크를 장악하기도 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오덕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를 몰랐지만 할 말은 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평론가로서 몇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은 지니고 있다. 다만 원래 서브컬처 쪽 인물인데 그걸 무시하고 주류문학에 대해서 언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류문학측에서는 꽤 미움받는다. 또 평론가로서도 자신의 주장에 고집하고 원래 주류문학측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주류문학의 관행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주류문학에 대해서하는 비평은 관점이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이걸 두고 작가인 고야노 아쓰시는 오오츠카의 문장은 비논리적이고 어설프다기보다는 아무렇지도 않게 논점을 바꾸어 궤변과 직관만으로 글을 쓰는데다가 실증적으로 검증하려는 자세가 없다고 비평했다. 다만 문제의 고야노도 토론에서 밀리면 바로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한다는 협박을 일삼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 비평은 그대로 부메랑이다. 실제로 코야노는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자기항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편집하다 걸려서 그렇다고 만약에 항목에 수정금지를 걸면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는 등의 추태를 보였기 때문에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다만 오오츠카의 평론이 문제가 있다는 점자체는 고야노 이전부터 지적받았던 것이니 만큼 오오츠카가 문학과 서브컬처 양쪽에 이해가 있는 완벽한 평론가라는 것은 아니다.
만화와 아동 포르노가 인간을 그렇게 망쳤다는 식의 보도에 대항하여 미야자키 츠토무의 변호를 맡은 적도 있다. 미야자키와는 따로 개인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다는 모양.
그런 탓에 싸우는 평론가로도 유명. 실제로 금서 지정까지 당한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의 수위조절을 두고 카도카와측과 대판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부 업종에서는 실용적인 창작의 교육서적을 쓴 사람으로도 유명.
4. 순문학 논쟁
팔리지 않는 문학작품은 상품으로서 열등하다는 오오츠카의 말에 주류문학가들이 열폭하여 문예지에서 반론을 제기한 사건. 실제로 일본의 출판업계가 문학위주에서 실용서와 만화, 오락소설 위주로 흐름이 바뀌면서 주류문학작품의 판매량은 매년 저하추세이다. 그러나 출판업계의 위상이 큰 일본에서는 출판사에서 자신들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류문학을 안정적으로 유통하는 한 편 거기에서 오는 적자는 다른 부분에서 메꾸는 관례가 있다. 소매점에서는 안 팔리는 주류문학지라도 출판사의 인기작을 납품시키기 위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납품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소매점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출판사측에서도 손해를 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몇몇 주류문학가, 그러니까 오오츠카 에이지의 말에 따르면 불량채권자들이 반론을 제기하여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실제로 문학작품만이 아니라 오락소설잡지도 적자를 내는 상황으로 활자매체전반이 출판업의 불량채권화했다는 건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오락소설은 단행본을 출간하는 것으로 본전 정도는 뽑아낼 수 있었으나 문학작품은 단행본도 거의 팔리지 않기 때문에 꾸준히 적자를 낸다. 오오츠카는 여기에 대해서 인건비를 조정하거나 출판사와 소매점간의 관행 등을 개선하는 것으로 보다 문학을 보급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팔리지 않는 문학작품을 쓴 쇼노 요리코가 이에 항의했고 처음에는 그나마 토론이었던 것이 점점 더 열이 오르며 쇼노 등을 비롯한 몇몇에 의한 원색적인 비난으로 발전했다. 문학작품이라는 것은 팔리든 안 팔리든 일단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강연이나 원고료, 그리고 작품의 중간에 내는 에세이 등으로 입에 풀칠을 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쇼노의 편을 들어주던 작가도 많았으나 오오츠카가 쿨시크하게 이것을 무시하자 마침내 쇼노가 열폭하여 애초에 순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여성작가의 존재를 묵살하는 남녀차별적인 호칭이다, 하는 일도 없이 비싼 급료를 받는 편집자 따위가 문학에 대해서 뭘 아느냐, 만화잡지는 로리콘이나 보는 거다 같은 망발에 자신의 글에서 주류문학을 비평하는 사람들을 요괴로 묘사하는 등의 망언을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문단에서까지 욕을 먹게 되었다.[3]
그도 그럴 것이 쇼노 요리코는 일단 상을 받은 것으로 작가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비평적으로는 몰매를 맞아서 그냥 남녀평등적인 관점에서 여자작가를 하나 추켜세워주기 위해 선택된 것이 쇼노라는 소리까지 들었고 그것이 콤플렉스가 된 것인지 후일 여류문학상 등의 수상제의가 왔을 때도 여자라는 이유로 이득을 본다고 여겨지는 게 싫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그런 문제를 제외하면 작가로서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여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기까지 약 13년 동안 자립하지 못하여 부모가 보내주는 돈으로 전업작가를 계속한 인물이었다. 한 편 오오츠카 에이지는 당시 마다라 시리즈나 성흔의 조커, 다중인격탐정 사이코 등의 성공으로 평생 놀고 먹을 만큼 벌어들인 상태였기 때문에 힘들게 작가생활을 했던 쇼노가 오오츠카의 불량채권이라는 말에 과민반응을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코야노는 한 편으로 이것을 두고 오오츠카가 제대로 쇼노에게 대응하지 않아서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한 쇼노가 맛이 간거라고 오오츠카를 비난했지만, 문제의 주장은 오오츠카가 1980년대에 쓴 글이고 쇼노는 그것을 자기 이름이 팔린 1990년대에서야 항의한 것이기 때문에 오오츠카에게 정중한 대우를 하라는 것자체가 무리다.
결국 일이 그렇게 되어도 문학이나 출판계의 거물급은 전혀 관심도 주지 않았고 항의를 시작한 쇼노는 쇼노대로 맛이 가서 날뛰고 또 오오츠카도 그렇게 문학을 비평하면서 스스로도 문예지에 글을 쓰고 돈을 받는다는 2중적인 태도나 편집측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여 쇼우노를 토론장에서 끌어내린 점등이 비평을 받아 세인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이 사건은 오오츠카, 쇼노 양쪽에게 있어서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한 편으로 여기서 반사이익을 얻은 것이 고야노 아쓰시로 당시 완전한 무명이었던 고야노는 이 사건으로 이름을 팔아서 작가를 계속하게 된다.
5. 아즈마와의 애증
아즈마 히로키가 동물화하는 포스트 모던으로 큰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당초에는 그렇게까지 인지도가 있는 평론가는 아니었다. 한 편 문학과 서브컬쳐 양쪽에 관심이 있던 오오츠카는 그 후 아즈마에게 주목하고 대담을 진행하거나하는 식으로 일감을 물어다줬고 그 보람도 있어서 아즈마는 평론가로서 자립하여 오오츠카를 능가하게 된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부터 아즈마의 평론관이 바뀐 탓에 오오츠카하고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구체적인 일화를 소개하자면, 2012년에 한국의 동국대학교에서 강의가 이뤄진 적 있었는데, 이때 운을 띄우는 말로 "오오츠카 에이지와 아즈마 히로키를 세트로 부르면, 무슨 만담 콤비 같지 않습니까? 세트로 부를 이유가 있는 겁니까?" 라고 했을 정도다. 오오츠카는 몇 번 아즈마의 생각을 바꾸려고도 해봤지만 실패했고 결국에는 양자의 관계는 파탄났다. 일례로 아즈마 히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서브컬처 비평에 활용하지만, 오오츠카는 일본 서브컬처의 역사적 기원이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디즈니로 대표되는 미국 모더니즘을 결합한 전시 일본 프로파간다 매체에 존재한다고 지적하면서 아즈마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설명에 내포된 몰역사성을 비판한다. 그래도 아즈마는 소싯적에 은혜를 입은 탓인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오오츠카를 어려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6. 기타
일본의 과거사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다. 국내에도 정발된 《리비아썬》에는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장면이 삽입되어 있으며, 《옥타고니언》에서는 731부대가 언급된다. JAPAN은 일본이 재무장하여 세계를 지배하려다가 반감을 사서 핵을 맞고 남은 일본인들은 외국으로 강제이주되어 일본이 아예 사라져버린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731부대에 대한 보복으로 강제이주된 일본인이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흠좀무.
위의 사례를 보면 알수 있듯이 일본의 재무장을 반대하고 평화헌법을 지키자는 호헌파에 속하고, 일본내 개헌 움직임에 대응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다중인격탐정 사이코》 이후 평론쪽 활동에 집중하는 탓에 많이 잊혀졌지만 만화 출신의 편집자라는 점도 있어서 미디어 믹스에는 적극적이다. 실제로 마다라 시리즈나 성흔의 조카 시리즈는 애니메이션화, 오디오 드라마화, 게임화, 소설화 등을 거쳐 일본 서브 컬쳐의 미디어믹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문제는 작법서를 여러권 쓴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정도로 스토리를 맡은 만화들의 스토리가 '''하나같이 끔찍하다는 평'''이 주류다.
오오츠카 에이지가 맡은 장기 연재작인 다중인격탐정 사이코를 보면 그림은 몰라도 스토리에선 좋은 평이 거의 없다. 다중인격탐정 사이코 항목에서 확인 가능.[4] 게다가 다중인격탐정 사이코 스토리를 담당했을때는 2016년 기준으로 그림작가인 타지마 쇼우와 10년동안 직접 만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이때 다중인격탐정 사이코는 막장 스토리로 인터넷에서 까이고 있었고 대부분의 팬들은 떨어져나간지 오래였는데 오오츠카 에이지는 강론,평론이나 하면서 자기 만화의 스토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작가 정신에 의문을 갖게될 지경이다.
다중인격탐정 사이코뿐만 아니라 국내에 정발되었던 리비아썬,탐정의식을 읽어봐도 스토리가 답이 없는 수준. 작법서를 여러권 쓴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스토리를 보여준다. 작법서 작가나 평론가라면 몰라도 스토리 작가로는 평가가 나쁜편이다.
7. 대표작
7.1. 원작자
- 망량전기 MADARA 시리즈
- 도쿄 미카엘
- 성흔의 죠커
- 북신전기
- 키지마일기
- 다중인격탐정 사이코
- 리비아썬
- 쿠로사기 사체 택배편
- 탐정의식
- 언러키 영맨
- 도쿄사건
- 속죄의 성자[5]
- 만화로 배우는 이야기학교(2014년)
7.2. 평론가
- 이야기소비론
- 전후 만화의 표현공간 - 기호적 신체의 주박 (제16회 산토리 학예상 수상)
- 서브컬쳐문학론
- 外교양으로서의 망가 아니메(공저)
- 外이야기 체조(2014년)
- 캐릭터 소설 쓰는 법(2005년 출간, 2013년 外개정판)
- 아톰의 명제
- 오타쿠의 정신사
- 스토리 메이커(2013년, 선정우 번역)
- 캐릭터 메이커(2014년)
- 리얼의 행방 - 오타쿠는 어떻게 사는가(아즈마 히로키와의 대담집)
- 영화식 만화가 입문
- 이야기의 명제
- 우민사회(미야다이 신지와의 대담집)
- 이야기소비론 개
[1] 그도 그럴 것이 야나기다는 개혁이랍시고 일본전통문화를 박살낸 메이지 유신 후에 일본의 민속학을 정립시킨 민속학의 거물로 필드워크 중시의 학문사상으로 중요한 발견을 수없이 해낸 대학자였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빠지던 일본정부와 협력하여 일본내 소수민족문제나 동성애자, 부라쿠민 등의 피차별계급등에 대한 사실은 의도적으로 은폐했다. 그러니 골수 전후민주주의자였던 오오츠카는 그런 야나기다가 아니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2]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 등 정치적으로 무심하며 이에 대해 직시하지 않는(것으로 알려진) 작가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보이는 모습을 보면 어느 한 쪽 진영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성향은 아니다.[3] 오오츠카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쇼노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고야노 아쓰시는 점잖은 표현으로 둘러서 '''맛이 갔다'''고 했다.[4] 심지어 일본쪽에서도 스토리에 좋은 평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5] 예수의 방주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 아내인 시라쿠라 유미가 작화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