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노모리 쇼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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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설적인 만화가 중 한 사람. 초기 펜네임은 이시모리 쇼타로(石森章太郎)[4] 였다가 데뷔 30주년을 맞아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로 펜네임인 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로 바꾸었다.[5]
참신하고 실험적인 표현 기법을 창조해서 만화를 발전시켰고, 만화의 독자층을 넓혀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 일본 경제 입문>이나 <만화 일본의 역사> 등의 정보 만화, 학습 만화 장르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당시 SF 만화라고 하면 로봇이 등장하면 되는 정도였는데, 문명론을 다루는 하드 SF 장르를 개척했고, 당시엔 생소했던 사이보그, 뮤턴트 등의 최신 과학용어를 누구보다 일찍 도입한 첨단을 걷는 센스가 있었다.
'''만화의 신'''인 데즈카 오사무와 비교하여 그의 별명은 '''만화의 왕(漫画の王様) 또는 만화의 제왕(漫画の帝王)'''. 51살 때는 '망가 선언'을 하며, 본인을 만화가(萬畵家)라고 칭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만화(漫畵)의 만자가 만(漫)[6] 자가 아니다. 만화는 상상뿐만이 아닌 현실을 포함해 '''삼라만상 모든 것'''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라며 일만 만(萬)자를 붙였는데, 그 자칭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현 개인 만화에 한정하여 최다 출판을 한 기네스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복간 닷컴에서 미공개 작품까지 다 모아서 총정리 출판을 하니 '''500권, 770작품'''이 나왔다.(...)
그런데 정작 어릴 적의 꿈은 '''영화 감독'''. 그 꿈은 이나즈맨에서 이루었다.[7]
가면라이더 시리즈를 비롯해 인조인간 키카이다, 변신닌자 아라시 등의 수많은 특촬물의 원작과 디자인을 맡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사후에도 그가 남긴 러프나 초기안 등을 참고해서 헤이세이 라이더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가면라이더 블레이드. [8] 슈퍼전대 시리즈의 초기작 비밀전대 고레인저, 잭커 전격대의 원작과 디자인을 맡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고레인저와 잭커를 이후의 슈퍼전대 시리즈가 원작자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별개의 작품으로 구분하는 견해도 많았다. 그 외에도 사이보그 009, 가면라이더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스컬맨과 같은 작품들을 그렸다. 참고로 괴기 막장 소설 가축인 야프의 만화판을 그리기도 했으며, 이 매니악한 소설의 팬들에게는 최고의 만화판(이라고 해도 만화판 자체가 두 명의 작가가 그린 것 밖에 없다.)으로 평가받는다.(...)
다작을 했지만 인기가 없어서 잘리거나 잡지 문제로 중단된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은 완결을 냈다. 다만 좀 뒤가 찜찜한 결말이 많다. 대신에 자신의 라이프워크로 삼은 사이보그 009를 제외하면 장편 연재를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짧고 굵게가 이 사람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특촬물들은 꽤나 밝은 분위기이지만 이시노모리가 직접그린 원작 만화는 니힐리즘에 근거해 꽤나 음울한 세계관이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그의 지인들 말로는 누나 요시에가 일찍 죽은 것을 계기로 현실에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 생애
소개 영상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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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9살 때 데즈카 오사무의 <신 보물섬>을 읽고 감명을 받아 만화를 그리게 된다. 중학생 때 친구들을 모아 만화 동인지를 만들기도 했으나 2호로 폐간했다. 중2때는 <마이니치 중학 신문>에 4컷 만화를 응모해서 입선,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월간 잡지 <만화 소년>의 독자 투고란에 투고하던 동료를 모아 '동일본 만화 연구회'라는 모임(아카츠카 후지오와 치바 테츠야 등이 회원으로 소속) 을 만들어 육필 회람 동인지 '먹물 한 방울'을 만들었고 이것을 출판사에게 읽어보라고 돌렸는데, 이것은 당대 최고 인기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도 읽어보고 칭찬했고 미야기현 내에 천재가 있다는 소문이 났다.
이후 현립 사누마고등학교 2학년 때(1954년 5월)는 그를 주목한 데즈카 오사무가 전보를 보내 철완 아톰의 원고 에피소드 1화분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런데 조수는 배경이라든가 먹물칠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쇼타로는 데즈카 오사무가 부재한 상황에서 그가 초안을 잡아놓은 원고를 보고는 데즈카 오사무의 그림체를 그대로 흉내내서 캐릭터까지 그려서 원고를 완성해 버렸다. 이것을 나중에 온 데즈카가 알게된 후 그 원고는 폐기하고 다시 그린 일화가 있다. 그 원고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같은 해 데즈카의 소개로 옴니버스 단편 연재작 <2급 천사>를 월간 잡지에 연재, 프로 만화가로 데뷔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봄, 부모님의 맹반대를 물리치고, 만화를 그려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서 대학교에 가겠다고 큰소리 치고 무작정 도쿄로 상경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세상사는 쉽지 않아서, 믿었던 연재처 월간잡지가 폐간을 해버려서 비좁은 자취방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원고 의뢰를 걱정하고, 가진 돈도 떨어져서 어머니와 누나가 보내 준 용돈을 받고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교육직 공무원이었던 고지식한 아버지는 아들이 만화를 그리는 것을 맹렬히 반대했고, 그때마다 동생을 적극 지지해 준 이는 누나 요시에였다. 세살 위였던 누나는 생애 지병인 천식으로 병약해서 외출도 못했고, 어릴 적 쇼타로가 그린 만화를 가장 처음으로 읽는 독자였고 조언을 해주는 조력자였다. 누나는 훗날 병 치료와 자취 생활을 하는 남동생을 돕기 위해 그가 살고 있던 토키와 장으로 왔다. 미인이었던 누나는 토키와 장의 '마돈나'같은 존재였으나, 안타깝게도 상경한지 1년도 채 못 가 갑자기 하루 만에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1958년 4월 4일에 사망했다. 그날 누나를 병원에 입원시킨 뒤 기분 전환을 위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돌아와서 누나의 부고 소식을 들은 쇼타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여하튼 1956년 5월 4일 토기와 장에서 먼저 살고 있던 테라다 히로오의 권유로 친구인 아카츠카 후지오와 함께 토키와 장의 방 한 칸으로 입주하여 소녀 잡지에 몇 편의 단편을 게재하면서 본격적인 프로 만화가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만화 전문 잡지도 거의 없었고, 여성 만화가도 거의 없던 시기로 순정 만화도 남성 만화가가 그렸다. 그 내용도 주로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세상 풍파에 시달리는 신파조의 이야기가 주류였다. 쇼타로는 자신은 그런 순정 만화를 그릴 줄 모른다며 셜록 홈즈 시리즈의 '얼룩끈'이라든가, SF, 개그 등의 소재를 순정 만화 스타일로 그려서 게재했다. 당시 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잡지에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뛰어난 그림 솜씨와 스토리텔링으로 곧 인기 만화가가 되었다. 토키와 장 멤버들에서는 가장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어 아카츠카 후지오는 자기 만화를 그리는 시간보다 이시노모리의 작업을 돕는 시간이 많았었고, 작화 속도도 다른 만화가들을 압도한 수준이어서 훗날 후지코 후지오와 나가이 고 등이 자신의 만화에서 그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후지코 후지오 A의 <만화의 길>에서는 그들이 하루에 5, 6장씩 그렸을 때 이시노모리가 혼자서 15-20장을 그린 일화를 언급했다.
1959년에는 토에이 동화는 데즈카 오사무의 '나의 손오공'이라는 만화를 원작으로 장편 만화영화 <서유기>를 제작하기로 했고, 데즈카는 시나리오와 설정 자료 등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의뢰받은 만화 원고가 너무 많아 직접 찾아 갈 수 없는 상황이라, 제자였던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츠키오카 사다오를 보내 영화 제작을 도와 주도록 했다. 이때 애니메이션에 매력을 느껴 토에이 동화에 입사해서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당시 토에이 동화의 스텝이었던 시라카와 다이사쿠가 이시노모리의 그림체는 개성이 강해서 애니메이터로는 맞지 않는다며, 만화가로 성공하면 그 원작을 우리가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설득해서 수긍하고 포기했다. 이런 인연이 계기로 훗날 인기 만화가가 된 이시노모리의 작품은 토에이에 의해 차례차례 영상화되었다.
한편, 집안이 극장을 운영하던 츠키오카 사다오는 어릴 적부터 디즈니의 영사기 필름을 직접 보면서 자라서 애니메이션의 원리를 터득하고 있었고, 애니메이터로서의 재능을 사서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스카웃했고,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첫번째 TVA 늑대소년 켄을 원화를 거의 혼자서 그리고 연출을 하고, 나중에는 독립해서 광고나 예술 단편 애니메이션 작가가 된다.
누나의 죽음으로 우울증 비슷한 증상을 가지게 된 그는 기분전환도 할 겸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다. 출판사에게 미리 원고료를 땡겨받는 형식으로 여행 자금을 조달하고, 출판사의 취재 기자 신분으로 탐사보도를 한다는 식으로 비자를 얻어서 당시로서는 해외 여행이 힘들던 시절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 이 여행 중에 우연히 보게 된 잡지 LIFE의 기사에서 사이보그라는 낱말을 알게 되고, 세계 일주 체험에서 여러 국적의 인물을 등장시킨 사이보그 009 아이디어를 착안했다. 1964년 7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사이보그 009는 그의 대표 인기작이자 라이프워크작이 되었다.
1965년 그가 쓴 '만화가 입문'과 후속작 '속 · 만화가 입문' 등은 세부적인 만화 기술론에서 부터 스토리 구상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작성된 당시엔 무척 획기적인 만화가 입문서로 수 년간 만화가 지망생들한테 바이블 역할을 했다. 특히 단편 <용신늪>은 잡지에 게재한 원고를 다시 싣고 직접 해설을 달았는데, 그 뛰어난 연출은 이 만화를 읽고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하는 유명 여성 만화가(타케미야 케이코 등)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만화가가 많다(하기오 모토 등).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데즈카 오사무가 창간한 만화 잡지 COM에 연재한 옴니버스 단편 연재작 《쥰, 환타지 월드》는 대사가 거의 없고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다양한 그림만으로 표현해서 일본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연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치바 테츠야는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라며, 이 작품의 영향으로 만화에 계절 묘사과 생활 감각을 의식해서 그리게 되었다고 밝혔다.
1971년엔 가면라이더의 원작 만화를 그렸으며, 프로그램 기획 과정에 설정들과 캐릭터 디자인을 만들어내었다. 이런 가면라이더의 성공을 계기로 토에이 특촬들의 원작을 맡기도 했다.[9]
1981년엔 일본 만화가 협회의 이사를 맡았으며, 4년 뒤 만화가 데뷔 30주년을 계기로 이름을 지금의 이시노모리 쇼타로로 개명했다.
1998년 1월 28일 세상을 떠났는데, 사인은 심장마비, 1992년에 림프종 진단을 받아 일을 쉬었고, 60번째 생일을 맞은지 정확히 3일 후였다.
장남은 배우인 오노데라 죠, 차남은 현 이시모리 프로 대표인 오노데라 쇼이다.
2018년 8월 25일에 니혼TV에서 그의 일생과 가면라이더의 탄생을 그리게 되는 '''이시노모리 쇼타로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이시노모리 쇼타로 역은 나카지마 켄토, 아카츠카 후지오 역은 하야시 켄토.
3. 특징
그의 작풍은 데즈카 오사무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아이들을 위한 만화(원시소년 류, 사루토비 사스케 등)와 어느 정도 성인 취향의 만화를 병행하였는데, 그의 후배이자 제자, 어시스턴트였던 나가이 고와는 달리 폭력이나 성적인 표현 등은 극도로 자제하고[10] 기본적인 분위기를 아예 낮게 가라앉히는 디스토피아를 묘사하는 데 더 뛰어났다. 특촬물에서 역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색감과 디자인보다는 개성과 이형을 중시했으며 이것이 현 일본 특촬을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기점이 되기도 했다. 또한 현실적 문제에도 관심을 많이 보였던 만큼 경제학이나 역사에 관한 만화도 많이 적었다.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처럼 현실에 직접적인 비판을 보인다던가 하지는 않고 객관적으로 그릴 수 있는 것에만 손댄 점 등을 미루어 볼 땐 그다지 정치적인 성향은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위에 언급된 대로 누나 요시에의 죽음으로 그는 현실에 큰 희망과 낙관론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희망적인 내용보다는 니힐리즘, 절망, 체념을 다룬 작품이 많다. 환마대전처럼 누나가 큰 비중으로 나오거나 히로인이 주인공보다 정신적인 면에서 성숙한 여성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상당한 시스콘이었던 듯.
데즈카 오사무 사단 중에서 유일하게 데즈카에게 인정받은 사람이다.[11] 실제 데즈카 오사무의 다작 경향상 어시스턴트가 많이 필요했는데 이때 그의 아파트에 불러들인 인물이 이시노모리 쇼타로로서 자신의 작풍 뿐 아니라 아이디어 등 많은 것을 흡수하는 그를 보고 경악했다고 한다. 이시노모리 쇼타로 본인은 데즈카를 '''외계인'''의 이미지로 많이 묘사했는데 정작 데즈카 본인도 이시노모리를 그러한 식으로 많이 묘사했다.
그런데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의 뒷담화를 보면 데즈카가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작풍에 대해 엄격하게 비판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 속사정이란, 1967년부터 데즈카 오사무가 창간한 만화잡지 'COM'에 이시노모리는 이제는 '만화로 쓴 시(詩)'라는 평을 듣고있는 <쥰>이라는 실험적인 연작 단편을 발표한다. 이 작품에 대해 데즈카 오사무는 스토리도 대사도 없는 그런 것은 만화가 아니다라고 어떤 독자와의 편지에서 속내를 털어냈고, 그 독자는 그 사실을 이시노모리에게도 알렸다.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작품 연재를 중단하겠다고 출판사에게 전했다. 그 사정을 알게 된 데즈카 오사무는 이시노모리 쇼타로를 찾아가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사과했다.
본래 COM은 당시 청년과 지식인층에게 지지를 받던 만화 잡지 가로를 의식해서 데즈카 오사무가 그 대항마로 불새를 대표 간판작으로 하고 만든 잡지였는데, 이시노모리의 <쥰>이 훨씬 퀄리티가 높고 실험적이고 예술성이 뛰어나 불새보다 인기가 더 많았다. 질투심이 강한 데즈카는 이것이 못마땅했을 수도 있다. 더구나 <쥰>은 다른 연재작도 많아서 바쁜 가운데도, 스승인 데즈카가 내가 만든 잡지에 작품을 연재해 달라고 부탁해서 그린 건데, 이건 만화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으니 이시노모리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것이다.
스컬맨 리메이크로 원작자에게 양해를 구하러 온 사이인 시마모토 카즈히코 역시, 60에 가까운 나이로는 걸맞지 않는 아이디어와 위압감에 자신이 순식간에 쫄아버렸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참고로 원래 처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이시노모리 쇼타로 본인이었다. 스컬맨에 미련이 많았던 그는 자신의 후속작을 자율적으로 시마모토에게 맡도록 했고 평소 그를 존경하던 그는 오마쥬의 형식으로 그의 작품 상당수, 특히 시마무라 죠의 등장으로 상당 부분 사이보그 009와 크로스시켰으며 이는 애니메이션 스컬맨에도 반영되었다.
데즈카 오사무의 회고록에서는 꽤 털털한 성격이라고 한다. 한번은 데즈카 본인이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일정이 너무 바빠 결국 왔을 땐 결혼식이 끝나 있었다고 했다. 그 뒤 이시노모리 쇼타로 본인은 '''"원래 만화가라는 게 그래. 특히 선생님(데즈카) 정도면."'''이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고. 그리고 생각보다 근성이 강하여 이틀에서 사흘 정도 밤샘 작업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하며 골초에 커피 광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커피와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문구에 "그럼 팔지 말던가!"라고 투덜댔다고.[12] 또한 그의 만화를 맨 처음 읽어주는 사람은 그의 가족들이었다고 하며 작중 그가 코멘트를 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데즈카 오사무처럼 딱히 작업실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택에서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아내의 말에 의하면, 갈아입으라고 속옷을 갖다주기 전에는 속옷도 갈아입지 않고 밥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생활에는 무심했고, 장남 오노데라 죠의 말에 의하면 언제 자는지 자신이 보기엔 하루 종일 만화만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어시스턴트였던 나가이 고는 바쁠 때면 2주 정도는 하루 2, 3시간만 자고 밥도 "가끔" 먹고 화장실 갈 시간 빼고는 원고에 치여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화장실에서 기절한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13]
이를 두고 동료 작가였던 미즈키 시게루는 "이시노모리는 과로를 해서 죽었다."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나가이 고의 만화 '게키만'에선 보통 만화가의 5배 속도로 만화를 그렸다고 회고된다. 나가이 고는 이시노모리 선생님이 하루에 1~2시간만 자면서 만화를 그려서 만화가는 저렇게 사는 게 당연한가보다 하고 자신도 그렇게 했다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시노모리가 비정상인 거였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면서도 저러고도 60세까지 산 건 거의 기적이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아들 오노데라 죠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버지가 가면라이더의 디자인을 정할 때 아이들이 좋아할 것을 고르기 위해 오노데라 죠에게 고르라고 했을때 지금의 메뚜기 헬멧 디자인을 골라 가면라이더의 제2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가면라이더 블랙 RX에서 조연 고로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가면라이더 SD에서는 RX의 성우를 맡았으며, 진 가면라이더: 서장에서는 미야시타 준이치와 함께 각본을 쓰고 아버지와 함께 카메오 출연을 했다. 그리고 울트라맨 다이나의 나카지마 츠토무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울트라맨 다이나 최종화에서 한 대사가 가정에 무심했지만 최고의 만화가였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담겨있다는 해석도 있다.
4. 주요 작품
- HOTEL
- 가면라이더 시리즈[14]
- 괴인동맹
- 길가메쉬
- 대철인 17
- 로봇 형사
- 만화 일본 경제
- 만화 일본의 역사
- 미라클 자이언츠 도무군[15]
- 미래구조대 아스가드 7
- 미야모토 무사시
- 변신닌자 아라시
- 보이스랏가
- 불타라 어택
- 빙하전사 가이스러거
- 사루토비 사스케
- 사부와 이치의 체포조
- 사이보그 009
- 성운가면 머신맨
- 슈퍼전대 시리즈
- 스컬맨
- 아쿠마이저 3
- 안드로이드 V
- 우주로부터의 메세지 은하대전
- 우주철인 쿄다인
- 원시소년 류[16]
- 이나즈맨
- 이상하고 이상하고 이상한 그 아이 / 사루토비 엣쨩[17]
- 인조인간 키카이다
- 젤다의 전설[18]
- 초신 비뷴
- 칫쿤 탓쿤[19]
- 쾌걸 하리마오
- 쾌걸 즈밧토
- 토에이 불가사의 코미디 시리즈
- 투명 도리쨩
- 하늘을 나는 유령선#더빙판 영상[20]
- 형제권 바이크롯서
- 환마대전[21]
- 힘내라! 레드 빅키즈
- 힘내라!! 로보콘
- 그 외 만화 입문서 다수
5. 관련 항목
- 나가이 고 - 제자.
- 나카지마 츠토무 - 아들 오노데라 죠가 울트라맨 다이나에서 연기한 배역.
- 데즈카 오사무 - 선배이자 라이벌.
- 시마모토 카즈히코 - 추종자, 동업자.
- 아카츠카 후지오 - 토키와 장의 동료이자 막역한 사이.
- 우에하라 쇼조 -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신뢰한 각본가.
- 콘노 나오유키 - 이시노모리 쇼타로 애니메이션 전문 애니메이터.
[1] 가면라이더 디케이드의 '''오노데라''' 유스케, 가면라이더 W의 주인공 히다리 '''쇼타로'''가 바로 여기서 따온 것.[2] 現 토메시[3] 1998년 사후 수훈[4] 태어난 고향 마을 이름 이시노모리에서 따왔는데, 한자로는 石森로만 표기해서 일반적으로는 이시모리로 읽어서 본인의 희망과는 달리 이시모리로 정착된다. 데뷔작 '이급천사'나 쇼와 라이더 초기작 등에서 이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5] 생전의 고인은 이 ノ자를 일반적인 크기의 2/3정도의 작은 크기로 표기하는 것을 고집하였다. 1998년 타계 이후 현재도 고인의 뜻을 존중하여 출판물 등에서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이름을 표기할 때 고인의 표기방식을 지켜줄 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지켜지지 않을 경우 이시노모리 프로덕션 차원에서 정정요청을 보내고 있다고.[6] 원래 일본에서 '망가'할때 '만' 자는 '마음 내키는대로'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스케치'와 일맥상통한다.[7] 이전에 가면라이더 스트롱거 최종화에서 이루었다고 되어있었는데, 사실 이전에 이나즈맨 11화에서 감독 겸 각본을 맡은 적 있다. 그 화에서 본인과 아들인 오노데라 죠도 특별출연.(이나즈맨이 1973년작, 스트롱거는 1975년작) 참고로 이시노리 선생이 감독을 맡은 이 11화는 당시 토에이에 조감독으로 재직하던 나가이시 타카오(長石多可男, 마스크맨 극장판, 극장판 가면라이더 덴오 이 몸, 탄생!의 감독)가 감독보로 참여했다.[8] 다만 그 러프도 이젠 바닥나가는지 이제는 이시노모리와 별개로 새로 디자인하는 게 많아지고 있다.[9] 실사 프로그램에서 출연한 게스트 캐릭터 디자인의 대부분은 이시노모리가 간단한 설정을 구상해 밑그림을 그려, 그 러프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진들이 시나리오와 인형들을 만들었다고 한다.[10] 일례로, 이시노모리가 그린 성인 취향의 (즉 에로틱한) 작품만을 묶은 문고집이 발간된 적이 있는데, 책들을 모두 합쳐서 반뼘 정도의 두께밖에 안된다.[11] 데즈카는 자신의 동세대 만화가인 요코야마 미츠테루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모든 현역은 라이벌'''이라는 생각 때문에.[12] 근데 커피는 적당히만 마신다면 건강에 좋다. 뭐 어떻게 생각하면 커피는 말이 음료지 사실상 약에 가깝다. 다만 담배는 건강에 하나도 좋을건 없다.[13] 그래서인지 사이보그 009의 헤이세이 애니판 완결편 3부작에서도 자택에서 HOTEL 원고 작업 도중에 깜빡 잠들었다가 길모어 박사가 깨워서 일어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14] 이시노모리 사후 라이더 시리즈 또한 오프닝에 원작자가 이시노모리로 표기되나 본 문서에서는 제외했다.[15] 우리나라에서는 야구왕 펑키라는 제목의 비디오로 알려졌다.[16] 한국에서는 '원시소년 돌치'라는 제목으로 로컬라이징 방영되었다.[17] 전자는 만화판 후자는 TV판의 제목이다. 나중에는 단행본도 사루토비 엣쨩으로 통일된다.[18] 젤다의 전설 신들의 트라이포스의 만화판을 닌텐도 파워 1992년 1월호부터 12월호까지 연재. 참고[19] 한국에선 치쿤 타쿤이란 이름으로 91년경 렌탈 비디오로 출시된적이 있다.[20] 1969년작으로 애니판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화 일부를 담당하였다. 한국에서는 1975,1977,1990년 이렇게 세차례 방영되었다.[21] 히라이 카즈마사와 공동 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