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타 아르헤리치
1. 개요
1941년생 아르헨티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70이 넘은 나이에도 활발한 연주 및 앨범 발매 활동을 하고 있는 거장 연주자이다. 196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에도 여러 훌륭한 연주로 명성을 떨쳤다.
현란한 테크닉과 강력한 타건으로 상징되는 대표적인 기교파 피아니스트이며, 20세기 피아니스트 중 다섯손가락 안에 반드시 들어가는 전설적 명연주자다. 놀랍게도 70대에 접어든 2010년대에도 그 기교가 녹슬지 않고 최정상급의 연주를 보여주고 있으며, 나이가 든 후에는 협연과 실내악에 매진하고 있다.
그 경이로운 연주실력과 카리스마 등으로 인해 '''피아노의 여제'''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2019년 BBC 매거진에 발표된 피아니스트가 뽑은 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 순위에서 9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2]
2. 생애
교육열 높은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며, 특히 유년 시절 피아노 교육은 어머니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아주 혹독하게 연습을 시켰다고. 아무리 재능을 타고난다 한들 노력까지 하는 자를 이길 수는 없음을 보여준 셈. 15살에 모든 테크닉을 마스터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인생이 열렸다.
특히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어렸을 때 유럽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서 그 먼 유럽이란 곳을 자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국어인 스페인어, 영어, 불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고, 불어는 전 남편 샤를 뒤투아의 영향 때문인지 30대 때 인터뷰들을 보더라도 현지인 수준이다.
또 본인은 평생을 쉼없이 공연을 하며 유럽 및 세계 각지를 유랑민처럼 돌았을 터, 다큐멘터리 <Evening Talks>에서 말하기를 이제 여행이라는 것이 외롭고 지루하다고.
2.1. 유년기~청년기
3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8살 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0번과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데뷔했다고 한다. 또한 젊은 시절에는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굴다, 음의 세공사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등의 거장들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5살인 1956년부터 유럽 각지에서 연주회를 열고, 이듬해 1957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열린 부조니 국제 콩쿠르와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모두 우승하여 유럽의 악단과 음반사들의 주목을 끌었다.[3] 1965년에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3. 연주 스타일
강력한 타건과 스피드, 엄청난 기교, 박력있는 연주로 정평이 나 있다. 연타와 옥타브 테크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연주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보통 연주시간이 30분 정도인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를 26분만에 끝내버리기도 하고, 많은 곡의 연주 길이가 다른 연주자들보다 조금씩 더 짧다.'''"날카롭고 강한 터치, 탁월한 기교에 정열을 더한 피아니스트'''''
― '''Apple MUSIC'''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본격 등장했던 1960년대에 그녀의 연주 스타일은 정말 대단한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24세에(1965년) 제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그녀의 쇼팽 연주에 나타난 정열적이고 당돌한 해석은 기존의 쇼팽해석과 상당히 달랐기 때문에 상당한 화제 및 논란이 되었다.
아래에 링크된 1965년 쇼팽 콩쿨의 영상을 참고해보면 지금 들어보아도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강렬함과 화려한 기교를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그녀의 연주스타일은 당연히 청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녀의 연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조차도 그녀가 20세기 후반기를 대표할만한 거장 연주자 중 한명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레퍼토리는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인 바흐부터 바르톡, 프로코피에프 등의 현대음악까지 다양한데 디스코그래피나 공연 레퍼토리를 보면 쇼팽, 슈만,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등의 낭만파 작곡가들의 작품을 즐겨 연주하며 라벨이나 바르톡의 곡도 많이 연주한다.[5]
1980년대 이후 그녀는 독주보다는 협주나 실내악 연주에 많이 매진하고 있는데, 일전의 인터뷰에서 '독주할 때는 많이 외로움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녀의 연주스타일을 감안했을 때 이런 발언은 좀 의외이긴 하지만 실제로 1980년대 이후 독주 연주는 별로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공연과 별도로 피아노 독주 음반은 종종 나오고 있다.
3.1. 현재
유명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과 듀오 앨범 및 여러 콘서트 연주 등 활발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4. 명연주
각종 실황음반 및 스튜디오 음반을 왕성하게 남겼다. 발매한 대부분의 음반들이 명반으로 평가받는 리빙 레전드라 할만하다.
먼저,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와 함께한 1982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가 매우 유명하다. 아르헤리치 특유의 몰아치는 듯한 빠른 템포와 강렬한 해석이 돋보인다. 실황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최고의 테크니션 답게 전혀 미스터치가 없다(!). 일단 한번 들어보자!링크
대표적인 기교파 피아니스트인만큼, 리스트 소나타,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등 낭만주의 시대 난곡에서 빛을 발한다. 아르헤리치 본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는지 고전주의보다는 낭만주의에 천착했다. 프로코피에프 피아노협주곡 3번, 슈만 피아노협주곡, 리스트 피아노협주곡,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등 아르헤리치가 연주한 대부분의 낭만주의 레파토리는 해당 곡을 즐기고자 하는 클래식 애호가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20세기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는다.
그렇다고 해서 굴다의 제자 답게 고전주의 레파토리도 부족한 게 아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협연한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이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2,3번 역시 매우 우수한 레코딩이라 할만하다. 바흐의 영국 조곡 음반이나 슈만의 어린이정경과 같은 소박한 연주에서도 카랑카랑한 음색으로 만만치 않은 내공을 자랑한다. 대표적으로 스카를라티 소나타 K.141의 연주는 전무후무한 연타 테크닉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그녀의 앵콜 18번 중 하나로 꼽힌다.
최근에는 '기교파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가 무색할만큼 실내악 연주에 힘쓰고 있다. 아르헤리치처럼 화려하고 강렬한 음향을 지닌 피아니스트와 실내악은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협주에서도 좋은 앙상블을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들어서 실내악 음반으로 그래미어워드를 수상하였으며, 2016년에는 이작 펄만과 실내악 음반을 발매하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음악성이 출중한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에 가능한 성과이다.
5. 기타 등등
- 건반을 칠 때의 힘이 대단하다! 1994년 내한했을 때 한 번 줄을 끊어먹은 일화는 이미 유명한 편.
- 골초로도 유명하다. 암수술을 받고 나이가 들면서 좀 줄였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줄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최근에는 폐 수술을 받아 금연 중이라는 소식도.
- 독주 무대에 관하여 '외롭고 공허하다' 하여 협연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1980년대 이후 협연 위주로 공연을 한다.
- 2013년도에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첫 듀오 콘서트로써 한국을 찾으려다 취소되었다. 지병인 저혈압으로 인해 입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 결혼은 3번 했으며 현재는 싱글이다. 젊었을 적 중국 출신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로버트 첸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가 이혼했고, 1969년에 지휘자 샤를 뒤트와와 결혼했고 4년 후 결별했다.[6] 1970년대 말에는 미국의 피아니스트 스티븐 코바세비치와 결혼하였고 현재는 이혼한 상태이다. 3명의 전남편과 각각 1명씩의 딸을 낳았는데 둘째 딸과 셋째 딸은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길렀다. 첫 남편에게서 낳은 딸 리다 첸-아르헤리치는 비올리스트로, 2번째 남편에게 낳은 아니 뒤트와는 음악 저널리스트, 3번째 남편에게서 낳은 스테파니 코바세비치는 사진작가로 활동중이다.
- 주연으로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
는 셋째 딸 스테파니 코바세비치가 감독, 나레이션을 맡았다. 피아니스트, 엄마, 아내로서의 세 모습을 딸의 시각으로 따뜻하게 담아냈다. 2012년 개봉. - 1990년대에 암에 걸려 고생한 적이 있다. 치료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은 악성 흑색종(malignant melanoma)에 걸렸는데 수술을 받았으나 다시 재발하여 재치료를 받는 등 상당히 힘든시기를 보냈다. 다행히 완치되어 2016년 현재 재발하지 않고 있다. 2017년에는 암을 완치받았다고 한다.
- 1980년 쇼팽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는데, 자신이 주목하던 '이보 포고렐리치'가 중간에 탈락하자 강하게 항의하고 위원장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해당 대회 우승자는 베트남의 '당 타이 손'.
- 2016년 6월 5일에 75살 생일을 맞아 베를린 필하모니 극장에서 절친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콘서트를 열었는데, 오케스트라의 생일축하 연주와 함께 당시 관객들에게 케이크를 돌렸다는 유쾌한 일화도 있다.
- 막 주목받던 신인 임동혁을 눈여겨 보고 데뷔 음반을 낼 수 있도록 후원한 적이 있다.
- 2019년 5월 7일 '2019 벳부 아르헤리치 뮤직 페스티벌'의 공연을 위해 9년 만에 내한하였다.
[1] 미국의 피아니스트. 그녀의 3번째 남편이었으며 현재는 이혼했다. 첫 남편은 로버트 첸, 2번째 남편은 샤를 뒤트와.[2] 레코딩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뽑은 것이다, 10위 내의 연주자 가운데 유일한 여성 피아니스트이자 2016년 현재 유일한 생존자이다. 즉 현역 1위라는 뜻. 참고로 순위는 1위부터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 아르투르 루빈스타인(2), 블라디미르 호로비츠(3),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4), 알프레드 코르토(5), 디누 리파티(6), 아르투르 슈나벨(7), 에밀 길렐스(8), 마르타 아르헤리치(9),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10), 크리스티안 지메르만(11) 등 이다.[3] 참고로 1956년 제네바 콩쿠르의 2위 입상자는 아르헤리치와 같이 미켈란젤리의 제자였던 마우리치오 폴리니였다.[4] 공개 연주가 아닌 것으로 보아 결선이 아니라 예선때의 영상인 듯 하다.[5] 특이하게 리스트나 드뷔시의 곡은 많이 연주하지 않으며 베토벤의 연주도 의외로 적은 편이다. 전 남편인 피아니스트 스테판 코바세비치에 의하면 아르헤리치에게 베토벤은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연주하기 부담스러워 했다고 한다. 참고로 코바세비치는 대표적인 베토벤 스페셜리스트 중 한명이며 이 분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은 클래식 애호가들의 애장품목중 하나이다.[6] 이혼 후에도 현재까지 전 남편과 쿨하게 지휘자-협연자의 관계로 연주를 자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