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도 키미야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역대 감독'''
아키야마 코지
(2009~2014)

'''쿠도 키미야스'''
'''(2015~)'''

현직
'''★'''}}}'''
<colbgcolor=#fcc800> '''쿠도 키미야스
(工藤公康 / Kudo Kimiyasu)
'''
'''생년월일'''
1963년 5월 5일 (61세)
'''국적'''
[image] 일본
'''출신지'''
아이치 현 토요아케 시[1]
'''출신고교'''
아이치 공대 부속 나고야전기고교[2]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1년 드래프트 전체 6순위 (세이부)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 (1982~1994)'''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5~1999)'''[3]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0~2006)'''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007~2009)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10)
'''지도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5~)'''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82
(선수)
'''
'''1983
(선수)
'''
'''1986
(선수)
'''
'''1987
(선수)
'''
'''1988
(선수)
'''
'''1990
(선수)
'''
'''1991
(선수)
'''
'''1992
(선수)
'''
'''1999
(선수)
'''
'''2000
(선수)
'''
'''2002
(선수)
'''
'''2015
(감독)
'''
'''2017
(감독)
'''
'''2018
(감독)
'''
'''2019
(감독)
'''
'''2020
(감독)
'''
<color=#373a3c> '''199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MVP'''
이시이 다케히로
(세이부 라이온즈)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라이온즈)'''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블루웨이브)
<color=#373a3c> '''1999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MVP'''
마쓰이 가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쿠도 키미야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마쓰나카 노부히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86년, 1987년 일본 시리즈 MVP'''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라이온즈)'''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1. 개요
2. 선수생활
2.1. 세이부 라이온스
2.2.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3. 요미우리 자이언츠
2.4.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5. 세이부 라이온스 2기
3. 은퇴
4. 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
5. 기타
6.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전 프로야구 선수. 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통산 '''635경기 3,336과 2/3이닝 224승 142패 ERA 3.44'''의 성적을 기록한 일본프로야구 역사에 빛나는 대투수로, 그가 거둔 통산 224승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1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또한 일본프로야구의 제이미 모이어라 불릴 정도로 선수생활을 오래 지속한 것으로 유명한데, 40세가 넘는 나이로 두자리수 승수를 기록하고, 2009시즌에는 46세의 나이로 승리투수가 되면서 '''일본프로야구 최고령 승리투수''' 기록을 갈아치웠다.
'''일본을 대표하는 우승청부사'''로 선수, 감독으로서 기록한 '''우승 횟수'''가 무려 '''16번'''에 달한다. 세이부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다이에20년짜리 비밀번호를 끊고 퍼시픽 리그의 강자로 거듭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요미우리에서는 노장의 관록으로 요미우리가 센트럴 리그 정상을 되찾는 데 한몫을 했다. 일본시리즈 MVP도 두 번이나 차지했고 현역시절에 획득한 우승반지만으로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우승복도 많았다. 지도자로서도 소뱅을 이끌며 '''일본시리즈 5회 우승 및 4연패'''를 달성[4]했는데 이는 V9을 달성했던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 시대의 요미우리 외엔 어느 팀도 달성하지 못했던 고지로 '''명선수도 명감독이 될 수 있다'''의 예시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2. 선수생활



2.1. 세이부 라이온스


[image]
영광의 1980년대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1981년 고3 때 코시엔 여름대회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 해 드래프트에서 6순위로 지명받아 1982년에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하였다.[5]
1980년대 세이부 황금시대 당시 와타나베 히사노부, 곽태원과 중심투수로 활동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85년 8승3패 평균자책점 2.76을 기록하며 평균자책점 부문 리그 1위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6], 1986년 일본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상대로 '''4차전까지 1무 3패''' 후 치러진 5차전에서 1대1 동점 상황에서 연장 12회까지 역투하고 12회말에 '''끝내기 안타'''를 쳐 팀에 승리를 거둬, '''1무 3패 후 역스윕'''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 주역으로서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한다. 1987년 일본시리즈 마지막 경기인 6차전을 완투승으로 장식하는가 하면, 그 해에 팀 선배인 히가시오 오사무와 평균자책점 1위 쟁탈전을 하여 결국 여기서 승리하기도 했다.

2.2.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image]
팀의 중심투수로 활약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
이후 FA를 선언해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하였으며, 당시 만신창이였던 팀 분위기를 개선하는데 일등공신[7]이 되면서 1999년에는 팀에 35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주게 된다. 당시 상대는 본인의 고향팀이자 선동렬, 이종범, 이상훈 등의 한국인 삼총사가 있었던 주니치 드래곤즈. 1차전에 선발로 나서서 13탈삼진 완봉승을 거두면서 일본시리즈 우승경력 7번의 관록이 허세가 아님을 증명했다.

2.3. 요미우리 자이언츠


[image]
우승 청부사로 불린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호크스를 우승으로 이끌며 다이에의 과감한 투자에 보답한 뒤, 2000년 NPB 선수들 가운데 최초로 2번째 FA 선언을 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2000년2002년에도 리그 우승 -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여 최초로 3개구단에서 우승을 차지한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2004년 8월 17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도쿄돔 홈경기에서는 '''통산 200승'''[8]과 함께 10승 7패를 평균자책점 4.67을 기록, '''40대 나이로는 역대 세번째로 시즌 두자리 승수'''를 거둔 투수가 되었으며,[9] 2006년까지 요미우리에서 뛴 후, 요미우리로 이적한 카도쿠라 켄의 보상선수로 2007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트레이드 되었다.

2.4.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image]
나름 열심히 뛰었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절. 쿠도가 유일하게 우승 반지를 먹는 데 실패한 팀이다.
2009년 5월 26일 교류전에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전에서 구원등판하여 승리투수가 돼 센트럴리그 최고령 승리투수(46세 20일) 기록도 세웠으며, 이후 이 기록은 2009년 7월 1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전에서 승리투수가 되면서 46세 1개월 25일로 다시 경신하였다. 이후, 팀이 3년 연속 꼴찌가 확정되자, 팀 리빌딩 차원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방출 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현역에서 계속 뛰기를 희망 중. 다만 고령이라는 점도 있고 구위도 많이 떨어진 상황이라 타팀에서 오퍼가 올 가능성은 적어보였으나 처음 프로에 입단했던 팀이였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 복귀하는 쪽으로 확정되었다. 실로 16년만의 친정 복귀. 그리고 만 47세의 현역으로 일본 기록을 또 갈아치우게 생겼다(…). 분위기 상으로는 은퇴 직전 친정팀 유니폼이라도 입혀서 은퇴시켜주자는 세이부 팬들의 분위기가 반영된 듯. 당시 감독은 현역 시절 팀 후배(2살 연하)였던 와타나베 히사노부 였다. 세이부의 전성기 시절 배번호 47번은 같은 좌완 투수 호아시 가즈유키가 달고 있어서[10] 대신 55번을 달았다.

2.5. 세이부 라이온스 2기


[image]
16년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결과적으론 유증의 미를 거두지 못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그러나 2010 시즌에는 왼쪽 팔꿈치와 허리 부상으로 10경기에만 등판하여 2패 평균자책점 10.50으로 부진하면서 세이부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다만 본인은 50세까지 뛸 것이며, 일본에서 안 된다면 한국 등 타국리그에 가서라도 뛰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3. 은퇴


그러나 그도 결국 선수생활에 한계를 느끼고, 2011년 11월 24일 자로 선수생활을 접고 베이스타즈의 감독직을 수락했다. 이례적으로 코치 경력 없이 즉시 감독 내정이 된 케이스. 베이스타즈가 다음 시즌 리그 참가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감독 활동 여부는 불확실하나 베이스타즈의 매각협상에서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위해 과감하게 베이스타즈 출신인 쿠도를 낙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 코치진 선임 문제와 선수 겸 감독의 허용 문제로 구단과 이견차를 보이다 끝내 협상이 '''결렬'''되었고, 요코하마 측에서는 요미우리 OB 출신의 나카하타 키요시를 선임하였다. 다만 쿠도 키미야스도 감독직에 대한 큰 집착 없이 선수생활 연장과 감독직 수락 사이에서 고민하던차에 협상에는 들어갔는데, 서로 맞지 않아서 결렬되었으니 크게 아쉬울 일은 없는 셈.
2011년 12월 25일 공식적으로 현역 은퇴를 발표하였다.

4. 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


은퇴 후 3년 동안 야인생활을 했다. 야인생활을 하면서도 쓰쿠바 대학 대학원에 등록하여 운동생리학과 컨디셔닝 등에 대한 강의를 수강하는 등 지도자가 되기 위한 준비는 꾸준히 해왔다. 아내의 병간호 문제로 2014년 시즌 종료 후 사임을 발표한 예전의 동료 아키야마 코지의 뒤를 이어 소프트뱅크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전년도 일본시리즈 우승팀을 이어 받아서 부담이 엄청난 상황임에도 불구, 선수들을 잘 활용하면서 직전 해보다 더 무시무시한 성적으로 퍼시픽리그 사상 최고속 리그 우승 기록을 세우면서 팀을 리그 2연패로 이끌었다.
타 팀으로 가면 1군 주전으로 뛸만한 선수들이 벤치와 2군에서 줄줄이 대기하면서 기회가 없어서 뛰지를 못하는 등 남아도는 선수들을 주체할 수 없는 거대 전력을 받은 데다, 경기 시작부터 철저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경기가 승리로 끝나야 비로소 웃는 표정을 짓던 전임 감독과 는 달리 경기 도중에도 상황이 의도대로 풀리면 기뻐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덕분에 타 팀의 팬들로 부터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덕아웃에 앉아있는 팔자 좋은 팬 아저씨'''라는 야유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지도자 경력없이 갑작스럽게 감독자리를 맡은 초짜라는 취임 당시의 우려와는 달리 마치 감독생활을 10년은 넘게 한 듯한 통찰력과 안목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 하세가와, 혼다 등 주전급이 시즌 아웃 수준으로 빠진 자리에 후쿠다, 다카타, 다카야[11], 가와시마, 아카시 등 백업급 선수들을 기용하면서 완벽하게 메워왔고, 고비나 승부처마다 기용하는 대타는 할 때마다 성공을 거두는 등 절대로 그냥 최강급 전력을 이어받아 편하게 놀고 먹는 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게다가 투수 출신이라서 로테이션과 불펜 운용의 정교함에 있어서는 전임 감독보다 훨씬 나은 수준이며 전년도 까지 유망주 수준에 그치고 있던 투수들을 줄줄이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선발 로테이션을 3개를 꾸려도 될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투수진을 구축하면서 본인이 괜히 명투수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소프트뱅크의 2015년 시즌을 보면 이 사람을 단순히 감독 데뷔부터 막강 전력을 받은 운 좋은 감독으로 평가하는 것은 본인에게는 상당히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이제 남은 것은 페넌트레이스와는 모든 면에서 양상이 달라지는 포스트 시즌의 단기전에서의 운용 능력을 증명하는 것뿐. 그리고 일본시리즈에서 이대호를 제외한 중심타선이 부진했으나 적절한 테이블 세터의 기용 등으로 우승에 성공하면서 단기전에서도 충분히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명장의 자질을 지녔음을 증명해보였다.
2016년 1월 18일, 9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였던 사이토 마사키와 더불어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발표되었다. 후보자격 1년차만에 한번에 통과. 헌액식은 2016년 올스타전 중에 있을 예정. 감독 개인으로서는 그야말로 인생의 최절정기를 맞은 느낌.
그러나 집권 2년 차인 2016년, 현역 시절 모셨던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2년차 징크스에 시달리고 있다. 교류전에서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는 등 6월 30일까지 2위 지바 롯데 마린스와 8.5게임 차, 3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9.5게임 차를 내면서 퍼시픽 리그 3연패가 유력한 듯 싶었으나, 올스타 브레이크 이 후 5연속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는 등 DTD를 시전하면서 교류전을 기점으로 연승 행진을 거듭한 니혼햄에게 8월 25일 자로 선두 자리를 내줬고, 끝내 9월 28일 자로 리그 2위가 확정되었다(...) 아직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남아있긴 하지만 일본시리즈 3연패에 실패할 경우 지도력 문제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을 피하기 힘들 듯 싶다. 그러나 결국 CS에서 2승4패로 패하며 3연패의 꿈은 사그라지며 시즌을 마감했다. 특히나 패배가 결정된 5차전에서 1회 4득점으로 크게 앞서나갔다가 이후 선발 셋쓰 타다시와 후속투수 히가시하마 나오의 대방화로 '''7점이나 내주는''' 와중에도 시즌 마지막 경기인데도 불을 지르는 선발과 두번째 투수를 밀어 붙이는 고집을 부리다대역전극을 허용하는 바람에, 한동안 까여도 할 말 없게 되었다.
2017년에는 다시 절치부심 2015년의 압도적인 모습을 되찾으면서 최단기 리그 우승을 1경기 더 갱신하고, 61년만에 시즌 90승을 돌파해서 91승을 찍었다. 물론 NPB 시즌 세이브 신기록을 세운 마무리 사파테의 팔을 갈다시피 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선발에서 다케다와 와다가 부진과 부상에 신음하고 타선에서도 우치카와가 장기이탈 하는 등 전력누수가 있는 상태에서도 히가시하마 나오를 한사람 몫을 할 선발투수로 성장시켰고, 필승조에서 이와사키 쇼를 발굴했다. 호소카와가 빠진 포수자리에는 육성선수 출신인 카이 다쿠야를 발탁해서 주전으로 성장시켰고 외야에서는 2년 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우에바야시 세이지가 완전히 우익수 자리를 꿰차는 등 우승을 하면서도 세대교체도 차근차근 진행시키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혼다의 은퇴 후 여전히 안정이 되지 못한 2루수 자리의 주인을 찾는 것과 노쇠화의 조짐을 보이는 우치카와와 역시 나이를 먹어가는 마쓰다, 그리고 근속피로가 걱정되는 마무리 사파테의 후계자를 발굴하는 일이 될 듯.
결국 2019년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승하면서 그야말로 2010년대를 소프트뱅크의 시대로 마무리시켰다. 그것도 역대급 현질을 하면서 하라 감독을 복귀시키는 카드까지 꺼내든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4:0 스윕 떡실신을 시키며 왕조를 세웠다.
2020년에는 다소 위태롭긴 했으나, 시즌 내내 1위를 지켜내며 결국 파리그 우승을 기록했다. 그동안 후보였던 슈토와 구리하라까지 주전급으로 발돋움하게 한 것은 덤. 여세를 몰아 33-4를 연상시킬 정도의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2년 연속 4연승의 기세로 쓰러뜨리면서 일본시리즈 4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제까지 일본시리즈를 4년 이상으로 연속 우승한 것은 1965년~1973년까지 V9을 달성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외엔 없었는데, 바로 그 요미우리를 희생양 삼아 금자탑을 쌓아올리게 됐다.

5. 기타


  • 노무라 카츠야가 세운 기존 1군 시즌 연속 출장기록인 26시즌을 넘어선 무려 29시즌 동안 활약하면서도[12] 승리를 거두지 못한 시즌은 단 3시즌(1984년, 2008년, 2010년)뿐일 정도로 철저한 자기 관리로 유명하다. 선동열과 같은 1963년생인데 선동열이 은퇴한지 10년을 넘어서도 계속 현역에 있었으니.[13]
  • 하지만 정말 의외의 사실은 이 사람 지독한 골초다(...). 물론 투수라서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14] 그래도 46세까지 프로 생활하는 사람치고는 대단히 놀라운 일. 본인도 몇 번이나 '담배를 끊어야지' 하고 결심하고 실행한 적이 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결국 그냥 포기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대신 다른 쪽으로 몸관리는 철저해서 이미 1984년 시즌 종료 후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갔다온 이후 농가와 직접 계약해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야채만 주문해서 먹는가 하면 웨이트 트레이닝에도 큰 공을 들이는 등, 버는 만큼 자기 몸에 투자하는 것도 아끼지 않았다.
  • 이러한 몸 관리에 대한 관심은 은퇴 후에도 이어져, 야인 생활 동안 츠쿠바 대학 대학원에 등록해서 주로 수강한 과목이 스포츠 생리학과 컨디셔닝 관련 과목이었으며 감독이 된 현재도 가장 최우선시 하는 것이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이다. 감독으로서의 지론 중 하나가 "부상을 당하면 아무리 좋은 기량을 가지고 있더라도 소용 없다."이며 "1군 레벨의 선수쯤 되면 기술 향상보다 본인이 다치지 않고 한 시즌을 치르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감독 취임 첫 해 투수 운용과 관련하여 "불펜 투수가 한 시즌에 60경기 이상 등판 하는 것은 무리다. 내가 재임하고 있는 동안에는 불펜 투수의 등판을 시즌 60경기 내로 제한하겠다"라고 선언하고 그대로 실천 중이며 부상이 잦은 선수들에게는 트레이닝 방법의 전환이나 식생활 개선법을 직접 고안해서 추천하는 등 본인 괜히 현역 시절 장수만세의 커리어를 쌓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 "감독은 경기를 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상을 당하는 것도 아니라서 쉴 필요가 없다"면서 휴식일에도 1, 2군을 오가면서 정력적으로 선수들의 컨디션과 부상 여부를 부지런하게 체크하고 있다. 선수들이 특별한 부상이 없더라도 피로의 조짐이 보이면 과감하게 엔트리에서 제외해서 휴식을 주고 그 기간 중에 2군에서 기회를 엿보며 노력하는 선수들로 하여금 그 빈 자리를 채우게 함으로써 컨디션 관리와 선수단에의 동기부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중이다. 컨디션 관리에 관해서는 "(구단에서 돈질로 선수들을 긁어 모아서) 선수층이 그렇게 두터우니까 가능하지"라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까'들도 선수들에 대한 동기부여에 대해서는 다들 인정할 정도. 그러한 선수단 운영이 그 전까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깜짝 스타들이 속속들이 등장하여 물샐 틈 없는 시즌 운영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 투수로써는 타격이 꽤 좋았다. 장타력은 없었지만 퍼시픽리그 출신이었음에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후에 선발로 나올때마다 타석에서도 꼭 1안타씩은 뽑아내고 심지어 요미우리 암흑기 시절 선발 라인업 타자들이 8회까지 무안타일때 혼자 3타수 3안타라는 진기한 기록도 냈을 정도.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NPB)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82
세이부
27
28.2
1
1
0
0
3.41
22
22
29
1.50
1983
23
33.1
2
0
0
0
3.24
30
13
24
1.29
1984
9
12.1
0
1
0
0
2.92
10
11
8
1.62
1985
34
137.0
8
3
0
0
2.76
84
75
104
1.15
1986
22
145.1
11
5
0
0
3.22
111
57
138
1.15
1987
27
223.2
15
4
0
0
2.41
181
66
175
1.10
1988
24
159.0
10
10
1
0
3.79
164
71
94
1.47
1989
33
118.0
4
8
2
0
4.96
126
78
94
1.71
1990
13
85.2
9
2
0
0
3.36
58
48
89
1.21
1991
25
175.1
16
3
0
0
2.82
124
75
151
1.13
1992
25
150.2
11
5
0
0
3.52
140
72
133
1.39
1993
24
170.0
15
3
0
0
'''2.06'''
129
67
130
1.14
1994
24
130.2
11
7
0
0
3.44
120
47
124
1.26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95
다이에
22
163.0
12
5
0
0
3.64
137
48
138
1.13
1996
29
202.2
8
15
0
0
3.51
207
71
178
1.37
1997
27
161.1
11
6
0
0
3.35
153
51
146
1.25
1998
15
93.2
7
4
0
0
3.07
90
30
65
1.26
1999
26
196.1
11
7
0
0
2.38
143
35
196
0.90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0
요미우리
21
136.0
12
5
0
0
3.11
127
17
148
1.05
2001
5
21.1
1
3
0
0
8.44
35
7
8
1.97
2002
24
170.1
9
8
0
0
2.91
157
28
151
1.07
2003
18
117.0
7
6
0
0
4.23
117
25
115
1.19
2004
23
138.2
10
7
0
0
4.67
160
34
128
1.39
2005
24
136.0
11
9
0
0
4.70
159
45
130
1.49
2006
13
70.0
3
2
0
0
4.50
69
22
52
1.26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7
요코하마
19
103.2
7
6
0
0
3.91
118
32
73
1.41
2008
3
13.2
0
2
0
0
5.27
21
6
7
1.90
2009
46
37.1
2
3
0
10
6.51
53
14
24
1.79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0
세이부
10
6.0
0
2
0
0
10.50
11
4
7
2.50
'''통산'''
29시즌
635
3336.2
224
142
3
10
3.45
3056
1195
2859
1.25
[1] 출생지는 나고야시 텐파쿠구이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이곳에서 나왔다.[2] 흔히 '아이치 메이덴'으로 불리는 고교야구의 강호. 후배로 양대리그 홈런왕인 야마사키 타케시와 NPB, MLB 레전드인 '''스즈키 이치로'''가 있다.[3] 이전 버전에는 1994~1999로 적혀있었으나 같은 팀 선배이자 호크스 전 감독인 아키야마가 1994년 트레이드로 이적한 후 94년 시즌 종료후 FA를 선언하여 95년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하였다.[4] 2016년 시즌은 오타니 쇼헤이가 활약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일본시리즈에 진출했다.[5] 당초 사회인야구팀 쿠마가이구미(熊谷組, 일본 내 대형 건설사) 입단을 천명했으나 네모토 리쿠오 단장이 강행지명했다고 한다. 지명에 회의적이던 네모토에게 지명 강행을 관철한 것은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였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세이부의 1순위는 쿠도와 배터리를 이루게 될 이토 쓰토무였다.[6] 하지만 이해 일본시리즈 역적원톱으로 찍힐 정도로 호랑이 핵타선에 X털렸다.[7] 특히 자신의 승수를 포기해가면서 웬 당돌한 신인급 포수를 조련한데 큰 공을 들인 것으로 유명하다.[8] 7회말 승부를 결정짓는 2점 홈런을 날려 결국 그 홈런이 결승타점이 됐고, 4-2 완투승을 거두며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당시 쿠도가 친 홈런은 자신의 프로생활 첫 홈런이었으며, 이는 데뷔 후 최고령 첫 홈런 기록이기도 하다.[9] 1번째는 한신 타이거스와카바야시 타다시, 2번째는 롯데 오리온즈무라타 쵸지.[10] 호아시는 쿠도에게 양보하겠다고 했으나 쿠도가 정중히 사양하였다.[11] 사회인 야구에서 하쿠오 대학을 거쳐 프로에 진출, 주전포수 자리를 잡지 못하고 통산 타율도 1할대에 머물러있으나 2008년 이후 무려 '''2504일'''만에 홈런을 기록하였다.[12] 세계 프로스포츠를 둘러봐도 29년차는 엄청난 경력이다. 그런 쿠도 옹의 29년차 기록을 뛰어넘는 이가 있으니 체코의 전설적인 아이스하키 골리인 도미니크 하섹의 31년차(실제로는 2010년 말 기준 28시즌 째 활약 중). 그리고 주니치 드래곤즈야마모토 마사가 2014시즌에 31번째 현역 시즌을 맞아 선발투수로 뛰었다. 오오오.[13] 당시 선동열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다.[14] 물론 하체 발달을 위해 그만큼 러닝을 많이 하겠지만, 그걸 빼곤 투수가 경기 중에 전력을 뛰어야 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사토자키 토모야는 타자도 사실 많이 뛰어야 현실적으로는 50M 정도가 최대로 오래 뛰는 것이기 때문에 타자도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사토자키는 정작 비흡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