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게 히로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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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일본프로야구 선수로 80~90년대 세이부 라이온즈의 황금기를 지탱했던 팀의 캡틴이자 내야 사령탑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 후 선수생활을 마감했으며, 다이에의 2군 감독과 오릭스의 1군 감독을 역임했다.
선수시절에서는 최강 세이부의 주장으로서 황금시대를 이끌었지만, 감독으로서는 '''선수시절 훌륭했던 캡틴이 반드시 명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해버린 케이스이다. 캡틴으로서의 리더십과 감독으로서의 리더십이 극명하게 대비된 케이스이며 똑같이 리더십이라고 불려도 두 리더십은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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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엔 출전 경력은 없으며, 고등학교 졸업반 때 드래프트에서 롯데 오리온즈의 6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을 거부하고 코마자와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팀을 전일본 대학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미-일 대학야구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세이부 라이온즈의 모기업 세이부 측에서 운영하는 프린스 호텔에 입사해 프린스 호텔의 사회인 야구부에서 뛰었다.[5]
1980년 드래프트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와 한큐 브레이브스의 1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경합 끝에 세이부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1981년 신인으로 개막 스타팅 라인업(유격수)에 이름을 올렸고 롯데의 강타자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수위타자 경쟁을 펼쳤지만 오치아이에게 수위타자를 내줬다. 같은 해에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이후 세이부 팀의 리더로 급부상해 많은 활약을 펼쳤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격돌한 1983년 일본시리즈에서 6차전 9회말 1사 만루 상황에서 동점이 되는 내야안타를 날렸고 팀은 연장전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7차전을 승리하며 4승 3패로 왕좌 자리에 올랐다. 1986년에는 타격 3관왕을 차지한 오치아이와 데뷔 시즌부터 각종 고졸 신인 기록은 갈아치우며 신인왕을 차지한 팀 후배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제치고 정규시즌 MVP를 차지했다. 그 이후, 무릎 부상 경력으로 유격수에서 3루수로 전향하고 주전 유격수 포지션은 타나베 노리오에게 내준다.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1988년 일본시리즈에서는 다시 유격수로 총 5경기에 출전했고 일본시리즈 MVP를 획득했다. 이 해에 퍼시픽리그 야수 최초로 연봉 1억엔 플레이어가 됐다.
현역 시절의 전반은 주로 1번 타자로 활약하고 있었지만, 키스톤콤비 츠지 하츠히코의 성장과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입단 등으로 현역 시절 후반에는 2번, 6번 등 다른 타순을 맡기도 했다. 베스트나인은 8회 선정, 준수한 수비력으로 골든글러브(NPB) 10회를 차지했다. 통산 200홈런, 200도루에 200 희생타도 기록한, 공-수-주 3박자를 모두 갖춘 선수이기도 했다.
1994년 시즌을 마치고 사임한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후임으로 추천되었으나 이를 고사하고 FA를 행사해[6] 1995년부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노쇠화로 인해 1981년부터 1994년까지 14회 연속 올스타게임 출전 행진도 끊겼고, 연봉도 대폭 삭감. 결국 1996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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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에도 다이에에 적을 두고 1997년에는 LA 다저스로 코치 유학을 갔으며 1998년 다이에 2군감독으로 취임하지만, 1년만에 사실상 해임되었다. 1999 년부터 2001년까지는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2002년에는 오릭스 블루웨이브 1군 감독에 취임했으나 같은 해 39년만에 오릭스는 퍼시픽리그 최하위에 그쳤다. 2003년 개막부터 부진하여 20경기(7승 12패 1무)를 마친 후 4월에 해임되었다.
그 후 독립리그 출범에 나서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설립, 간사이 독립 리그 고문 활동 등을 했다. 현재는 아마추어 학교들의 기술 고문을 맡아 부원들을 수시로 지도하고 있다.
1. 소개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로 80~90년대 세이부 라이온즈의 황금기를 지탱했던 팀의 캡틴이자 내야 사령탑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 후 선수생활을 마감했으며, 다이에의 2군 감독과 오릭스의 1군 감독을 역임했다.
선수시절에서는 최강 세이부의 주장으로서 황금시대를 이끌었지만, 감독으로서는 '''선수시절 훌륭했던 캡틴이 반드시 명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해버린 케이스이다. 캡틴으로서의 리더십과 감독으로서의 리더십이 극명하게 대비된 케이스이며 똑같이 리더십이라고 불려도 두 리더십은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4]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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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엔 출전 경력은 없으며, 고등학교 졸업반 때 드래프트에서 롯데 오리온즈의 6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을 거부하고 코마자와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팀을 전일본 대학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미-일 대학야구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세이부 라이온즈의 모기업 세이부 측에서 운영하는 프린스 호텔에 입사해 프린스 호텔의 사회인 야구부에서 뛰었다.[5]
1980년 드래프트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와 한큐 브레이브스의 1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경합 끝에 세이부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1981년 신인으로 개막 스타팅 라인업(유격수)에 이름을 올렸고 롯데의 강타자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수위타자 경쟁을 펼쳤지만 오치아이에게 수위타자를 내줬다. 같은 해에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이후 세이부 팀의 리더로 급부상해 많은 활약을 펼쳤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격돌한 1983년 일본시리즈에서 6차전 9회말 1사 만루 상황에서 동점이 되는 내야안타를 날렸고 팀은 연장전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7차전을 승리하며 4승 3패로 왕좌 자리에 올랐다. 1986년에는 타격 3관왕을 차지한 오치아이와 데뷔 시즌부터 각종 고졸 신인 기록은 갈아치우며 신인왕을 차지한 팀 후배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제치고 정규시즌 MVP를 차지했다. 그 이후, 무릎 부상 경력으로 유격수에서 3루수로 전향하고 주전 유격수 포지션은 타나베 노리오에게 내준다.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1988년 일본시리즈에서는 다시 유격수로 총 5경기에 출전했고 일본시리즈 MVP를 획득했다. 이 해에 퍼시픽리그 야수 최초로 연봉 1억엔 플레이어가 됐다.
현역 시절의 전반은 주로 1번 타자로 활약하고 있었지만, 키스톤콤비 츠지 하츠히코의 성장과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입단 등으로 현역 시절 후반에는 2번, 6번 등 다른 타순을 맡기도 했다. 베스트나인은 8회 선정, 준수한 수비력으로 골든글러브(NPB) 10회를 차지했다. 통산 200홈런, 200도루에 200 희생타도 기록한, 공-수-주 3박자를 모두 갖춘 선수이기도 했다.
1994년 시즌을 마치고 사임한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후임으로 추천되었으나 이를 고사하고 FA를 행사해[6] 1995년부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노쇠화로 인해 1981년부터 1994년까지 14회 연속 올스타게임 출전 행진도 끊겼고, 연봉도 대폭 삭감. 결국 1996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3.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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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에도 다이에에 적을 두고 1997년에는 LA 다저스로 코치 유학을 갔으며 1998년 다이에 2군감독으로 취임하지만, 1년만에 사실상 해임되었다. 1999 년부터 2001년까지는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2002년에는 오릭스 블루웨이브 1군 감독에 취임했으나 같은 해 39년만에 오릭스는 퍼시픽리그 최하위에 그쳤다. 2003년 개막부터 부진하여 20경기(7승 12패 1무)를 마친 후 4월에 해임되었다.
그 후 독립리그 출범에 나서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설립, 간사이 독립 리그 고문 활동 등을 했다. 현재는 아마추어 학교들의 기술 고문을 맡아 부원들을 수시로 지도하고 있다.
4. 기타
- 다이에 2군 감독 시절, 주전을 사다리타기와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 발각되어 해임되었다. 2군으로 내려 간 선수가 다시 컨디션이나 기량이 올라왔다고 보고를 받아도 "아니, 그 녀석은 이제 됐어. 이미 알고 있으니까"라고 좀처럼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다양한 타순을 경험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2군에서 주포로 활약해도 1군에서 번트를 지시받았을 때 실패하지 않도록 하는 의도가 있었다. 또한 해고된 원인은 주전 선택이 아니라 다이에 구단의 관리부장의 팀 전력 강화 방안을 듣고 건의한 내용에 있었다고 한다. "(세이부는) 네모토 리쿠오씨가 우선 소재가 좋은 인간을 모았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조직의 일이다 '라는 부분이 다이에의 선수 또는 스카우트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돼서 다이에 구단 측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 오릭스 1군 감독으로 취임하여 "전임 오기 아키라 감독은 선수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는 회의를 여는 대신 지시는 선수에게 개별적으로 전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구단 매니저에게 미팅 장소를 확보시켰다. 이시게는 오기 감독의 방식에 대해 "작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면에서 오기 씨가 9년간 지휘했던 오릭스가 모든 면에서 다소 미지근하게 되고, 그 결과 약해져 갔다"라고 생각했다. 오기 씨는 노모 히데오, 스즈키 이치로, 하세가와 시게토시, 요시이 마사토, 다구치 소 등 좋은 선수를 키워 그들에게 좋은 지도자 이었던 건 모르지만, 모두 미국에 진출시켜 객관적으로 보면 일본 야구계에게 재산이라고도 할 수있는 인재를 모두 내보낸 건 무슨 생각일까 하는 생각도 있다. 오기 씨는 우승 경험도 있는 명장이고 내가 모르는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선수에게 개별적으로 지시를 전달하는 방식은 팀, 조직으로서 과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가"하고 비판하였다.[7]
- 신인왕을 획득한 다음 해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다츠로가 운좋게 신인왕이 된 거라고 평가절하 했다. 히로오카는 후일담으로, "수비는 그렇게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타격에서 활약하고 의기 양양했다. 좀 더 잘 될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자극을 주려 했다."고 했다. 또한 센트럴리그의 하라 다쓰노리와 비교하면서 더 공부에 매진할 것을 주문했다.
- 오릭스에서 감독을 맡던 때 구대성이 투수진 중 한 명 이었다.
[1] 우노 마사루의 모교와는 이름만 같다. 그쪽은 시립이 아닌 치바 현립.[2] 도중해임[3] 시즌 도중 해임.[4] 이시게의 신인시절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가 이시게의 팀을 이끄는 주장으로서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감은 아니다"'''라고 비판한 적도 있다.[5] 당시 세이부에선 전망이 좋은 프로 유망주들을 프린스 호텔의 사회인 야구부에 먼저 들여보낸 뒤 드래프트에서 지명하는 방식으로 긁어모았다. 현재는 프린스 호텔 사회인 야구부가 해산되었다.[6] 아직도 일본프로야구계 최고의 GM이라 평가받는 네모토 리쿠오가 세이부에서 다이에로 옮겨간 뒤 그를 스카우트 했다. 세이부 시절 동료였던 구도 기미야스와 아키야마 고지도 다이에 유니폼을 입었다.[7] 하지만 이것은 아무리 봐도 자신이 오릭스 시절 2년연속 최하위를 찍어대다 시즌도중 짤린 것을 오기 아키라 감독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일단 키운 선수들을 전부 미국으로 진출시켜 버린다고 비난한 것부터 오류인데 노모 히데오는 긴테츠 버팔로즈 시절 오기의 후임 감독 스즈키 케이시와의 불화로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택한 것이고(동료의 자서전에서 "꼭 거기서 뛰고 싶었던 건 아닌데 그(스즈키) 감독 밑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고 주장) 요시이 마사토의 경우는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거쳐서 미국에 진출했기 때문에 오기와는 전혀 상관없다. 더군다나 오기 재임 동안 오릭스가 약해져 가서 마지막 재임 3년은(2000~2001, 2005) 4위로 B클래스였다고 해도 일단 엄연한 퍼시픽리그 우승 2회 - 일본시리즈 우승 1회를 안겨다준 인물인 데다, 3년 B클래스 중 2005년을 제외한 블루웨이브 시절 2년은 5할 승률을 찍은 데다 2005년에도 이시게 이후 3년연속 최하위이던 팀을 4위로 끌어올린 게 이 정도다. 사실상 오릭스를 박살낸 건 이시게라고 봐도 되는데 본인이 적반하장스럽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