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히사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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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배터리를 이뤘던 이토 쓰토무와 함께.[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니어 디렉터 겸 편성부장
와타나베 히사노부 (渡辺久信)
'''생년월일'''
1965년 8월 2일
'''국적'''
일본
'''출신지'''
군마키류 시
'''학력'''
군마 현립 마에바시 공업 고등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 (1984~1997)'''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8)
자난 루카[2] (1999~2001)
'''지도자'''
자난 루카 투수코치 (1999~2001)
세이부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4~2006)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투수코치 (2005~2006)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 (200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2008~2013)'''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감독'''
이토 쓰토무
(2004~2007)

'''와타나베 히사노부'''
'''(2008~2013)'''

이하라 하루키
(2014~2014.6)[3]
1. 소개
2. 학창~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여담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즈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활약한 우완 정통파 강속구 투수.
일본프로야구 이후엔 대만에서 플레잉 코치로 현역 생활을 계속 이어나갔으며, 은퇴 후에는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친정인 세이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2. 학창~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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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 표지모델이 된 와타나베.[4]
중학교 때부터 무려 시속 140km대의 강속구를 던지며 주목을 받았고, 그후 마에바시 공고에 입학해서[5] 야구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러나 코시엔 경험은 1학년 때 하계 코시엔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1차전에서 그해 하계 준우승팀 교토 상고에게 끝내기로 깨졌다(...) 그후 3학년 때 지역예선 결승까지 가서 코시엔 문턱까지 갔으나, 이때도 상대인 오타 공고에게 끝내기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후, 1983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뽑혔다. 다만 세이부에선 본래 타카노 히카루[6]라는 투수를 지명하려고 했으나,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한큐 브레이브스, 야쿠르트 스왈로즈 등 3팀과의 치열한 추첨승부 끝에 야쿠르트에게 교섭권을 넘겨줘야 했고, 결국 꿩 대신 닭으로 와타나베를 지명했다.[7]
신인 때부터 1군에 정착하고 속구와 포크볼을 무기삼아 3년차인 1986년 시즌 최다승과 최다탈삼진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1988년과 1990년에도 최다승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히가시오 오사무, 쿠도 키미야스, 곽태원[8], 이시이 타케히로 등과 함께 선발 마운드를 지키며 세이부 왕조 시대를 지탱했다.
치밀한 제구력보다 강속구와 힘으로 찍어 누르는 타입의 투수였으며, 탈삼진을 많이 뺏어냈지만 반대로 피안타와 피홈런도 많이 허용했다. 이런 스타일의 투수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노쇠화로 인한 구위의 약화가 나타난 이후에도 전성기 시절의 투구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선배 투수이자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히가시오 오사무가 강속구가 통할 때 투구 스타일에 변화를 주라는 충고를 했지만 성공에 이르진 못했다.
1997년 시즌을 마치고 세이부에서 방출 된 후, 노무라의 ID야구를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노무라 카츠야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다. 철지난 것으로 여겨지던 노장 선수들을 잘 활용한다고 해서 '노무라 재생 공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무라 감독 아래에서 부활을 기대했지만, 성적의 향상을 이뤄내지 못하고 시즌 후 전력외통보를 받았다.[9]
이 이후 현역 은퇴를 결정하고, 야구 해설자 계약을 맺었지만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의 추천에 의해 지도자 공부를 위해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10] 투수 코치로 영입되었다. 그러나 의사소통의 곤란으로 인해 한때 세이부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당시 대만프로야구계에서 기술고문을 맡고 있던 곽태원(카쿠 타이겐)에게 통역사를 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와타나베가) 스스로 던져 몸으로 가르치면 좋겠다" 고 조언을 받고 급히 선수 겸 코치로 현역에 복귀했다. 완급조절을 구사한 투구의 결과 입단 1년차에 18승을 거두며 다승, 탈삼진, 평균 자책점 부문 3관왕을 기록하고, 이듬해에도 15승 8패, 방어율 2점대를 기록하며 에이스로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을 대표하는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체중 관리 실패 및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로 인한 노쇠화를 극복하지 못하며 2001년엔 2승 7패 4세이브, 방어율 3점대로 부진했고, 이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11]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에는 TV 해설자, 스포츠신문 평론가를 거쳐 2004년에 세이부 2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 2005년부터는 2군 감독을 겸임, 2007년부터는 2군 감독만 맡았다. 2008년 이토 쓰토무의 후임으로 1군 감독 자리에 올랐다. 2007년 B클래스로 추락한 팀을 취임 1년만에 퍼시픽리그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1군 감독 부임 당시까지만 해도 와타나베에 대한 기대치는 매우 낮았다. 그도 그럴 듯이, 세이부 황금 시대를 지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치고 받으며 퍼시픽리그의 강팀으로 군림하던 2000년대 초를 지나 중반으로 접어 들면서 기존의 리그 붙박이 하위팀이었던 치바 롯데 마린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이 리그를 제패하기 시작하며 호크스 하나만 제끼면 우승이 가능하던 시대가 이미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알렉스 카브레라와 와다 카즈히로 등의 강타자들이 FA 등을 통해 이적을 하고, 이토 쓰토무 말년의 망가진 팀 분위기와 드리워진 '패배'의 그림자를 과연 신임 감독으로 지울 수 있을까 하는 평가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선수에게 친근하게 접근, 칭찬과 동시에 목표 설정을 통한 의식 개혁으로 팀을 바꾸어 나갔고 유격수이자 팀의 간판으로 성장한 나카지마 히로유키를 중심으로 가타오카, 쿠리야마 등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였다. 또한, 장타의 소질은 인정하면서도 정교하지 못한 타격 때문에 번번히 기회를 잡지 못한 '오카와리군(한그릇 더)' 나카무라 타케야에게 "삼진 200개 당하고 홈런 50개 치고 와"라며 레귤러로써의 위치를 확보해 주었고 이에 편안한 마음으로 시즌을 보낸 나카무라는 시즌 중반 이후 폭발적인 타격을 보이며 46개의 홈런으로 커리어 첫 홈런왕이 되었다.
요미우리와 붙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4승 3패로 우승을 차지, 모리 마사아키가 이끌고 본인이 선수로 활약하던 1992년 이래 16년 만에 페넌트 1위 -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였고[12] 같은 해 아시아 시리즈도 제패, 이러한 공적을 높게 평가받아 2008년 쇼리키 마쓰타로 상 수상자가 되었다. 세이부 역대 감독 중 1 년 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것은 히로오카 타츠로, 모리 마사아키, 이토 쓰토무 에 이어 4명째다.
그러나 2009년~2013년 기간 팀을 리그 및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지 못하고 2013년 10월 사임을 표명하였다. 재임 기간 중 천 해 우승에 이어 나카무라 타케야, 아사무라 히데토, 아키야마 쇼고 등 젊은 야수진의 성장에 기여하며 리빌딩에 어느 정도 성공했기 때문에 세이부 감독 시절 평가는 괜찮은 편.
화 내지 않는 것을 지도 방침으로 삼고 있지만, 전문성이 결여 된 사람을 매우 싫어한다. 대만 시절, 신인이면서 소질이 충분해 연습하지 않아도 활약하여 경영진이 참견하지 않았던 투수를 불러내 꾸짖거나 실수를 저지른 후에도 하이파이브 하는 선수를 보고 호통친 적도 있다. 세이부 2군 감독 시절에도 "어엿한 야구 선수가 되기 전에, 우선은 한 사람의 사회인이 되어야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으며, 젊은 선수들의 긴장감이 결여 된 태도에 대해서 엄격하게 대했다. 재미있게도 정작 본인은 현역 시절 엄격한 관리 야구를 추구했던 세이부에서도 다소 자기관리가 모자랐던 선수중 하나로 꼽혔지만...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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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에는 큰 키와 슬림한 몸매, 잘생긴 얼굴로 여성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13] 그러나 탈모가 시작되면서 여성 팬들의 인기는 점차 줄어버렸고, 말년에 대만에서 활동하던 시절 대만 포장마차 음식에 빠진 것이 원인이 되어 체중관리에 실패하면서 지금은 전형적인 대머리 과체중 아저씨가 되었다는 슬픈 일화가 있다. 훗날 감독 시절 선수들에게도 "지금은 믿을 수 없겠지만 옛날에 꽃미남으로 알려졌다"고 자학적으로 농담을 했다.
1980년대 후반, 리그 라이벌이었던 긴테츠 버팔로즈의 주포인 랄프 브라이언트에게 매우 강했다. 브라이언트도 은퇴 후 한참 지난 일본 야구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힘들었던 상대를 묻자 주저 없이 와타나베 히사노부의 이름을 이야기 했을 정도. 하지만 1989년 긴테츠의 시즌 우승을 결정 지은 세이부 vs 긴테츠의 더블헤더에서 나온 전설적인 '브라이언트의 4연타수 홈런' 중 세번째 홈런[14]을 얻어 맞아 한동안 크게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동점인 상태에서 경기 후반에 돌입하자 "기세를 타고 있는 브라이언트를 막을 자는 히사노부 밖에 없다"라는 심정으로 불펜에 투입한 것이기 때문. 이 경기와 바로 다음 경기를 연달아 패함으로써 세이부는 리그 5연패를 놓치고 말았다. 만약 이 해에 우승을 했더라면 85년부터 시작된 리그 10연패라는 ㅎㄷㄷ한 기록이 가능했기에 세이부 선수단과 팬들에게는 너무도 아쉬운 부분이었을 듯.[15]

''랄프 브라이언트의 대형 홈런과 멘탈 나간 와타나베 히사노부''[16]
메르세데스 벤츠를 애용했으며, 당시 팀 내에는 프랜차이즈 최고참이던 도이 마사히로[17]히가시오 오사무 외에 벤츠를 타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지만, 그 룰을 깨고 벤츠를 구입했다고. 그 이후 후배 선수들이 잇따라 벤츠를 구입하여 "내가 벤츠해금의 선구자가 됐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입단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의 관리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와타나베 본인조차, 관리를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감독이되면 절대로 저런 관리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예전 팀 동료였던 쿠도 키미야스기요하라 카즈히로 한테서 "프로 야구 투수로는 최고의 존재"라고 높이 평가 받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흡연을 하는 등 자기관리가 썩 뛰어나지는 않았음에도 폐활량은 남들보다 뛰어났으며, 근육도 강해서 한 시즌 200이닝 이상을 던져도 경기 후 전혀 마사지를 받지 않은 일화가 있는 등 뛰어난 신체능력으로 야구를 했던 스타일. 기요하라는 팀 후배인 키쿠치 유세이와의 대담에서 와타나베 감독과 시오자키 테츠야 코치를 극찬했다.
프로 입단 다음 날 하라주쿠에서 쇼핑을 즐겼고 옷 구입비용으로 한달에 30만엔을 지출했으며, 디스코에서 춤추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등 "새로운 인류"라는 별명이 있었다.
모리와 노무라는 라이벌이지만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고 평하고 있다. 모리는 선수들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잘 돌보며, 질책이 잘 통하는 선수와 통하지 않는 선수를 구분하여 대응하며 선수들이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과 잘 플레이할 수 있을지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실행했다고 한다.
노무라는 심리전에 능해 말빨로 선수들을 설득할 수 있고 '아!이 사람은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1] 둘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한다. 일본야구 그들은 왜, 이토와 와타나베의 악연[2]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에 존재했던 팀.[3] 시즌 도중 해임.[4] 왜 일본프로야구 사진이 미국 스포츠 전문지 표지에 실렸나면, 이 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선수노조 파업 사태로 인해 이해부터 시행하기로 한(결국 95년부터 시행) 디비전 시리즈, 챔피언십 시리즈, 월드시리즈 등 포스트시즌 일정이 '''모조리 다 취소되어 버려서''' 미국 야구팬들이 볼 수 있는 가을야구라고는 일본시리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전 경기가 중계되기도 했을 정도.[5] 다만 와타나베 본인은 본래 당대의 야구 명문고로 소문났던 키류 고교로 입학하려 했고, 입학 수험공부를 위해 가정교사까지 고용했으나.. 정작 본인이 '''공부를 매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3일 만에 입시를 포기해 버렸다(...)'''[6] 4팀의 지명을 받고 추첨으로 야쿠르트에 입단했으나, 1984~86년 3년연속 세자릿수 탈삼진 1984, 1986년 두자릿수 승수, 1987년 두자릿수 세이브 외엔 대부분 7승 정도만 기록하며 이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고, 결국 통산 51승 55패 13세이브, 방어율 4.08, 642탈삼진의 그저그런 성적만 기록한채 1994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은퇴했다. 이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1995~98년까지 2군 투수코치로 일했고, 이후 대만 프로야구 싼상 타이거스에서 1999년 투수코치로 부임했으나, 1년만에 팀이 해체되면서 물러났는데, 이후 정신질환이 발병하며 그 후유증으로 결국 2000년 11월 5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와도 작은 인연이 있었는데 자살 직전인 2000년 현대 유니콘스의 스프링캠프에서 임시 코치를 맡은 적이 있었다.[7] 사실 이것도 다른 선수를 지명하려고 했는데,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가 '''"아직 와타나베가 남아 있다"'''고 말하여, 급하게 와타나베를 1위로 지명한 것이었다. 참고로 그 다른 선수는 결국 세이부에 2위로 지명되었는데, 다름아닌 現 세이부 감독 츠지 하츠히코.[8] 대만 출신의 우완 강속구 투수, 동양의 놀란 라이언,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일본에서는 이름 곽태원을 일본식으로 읽은 카쿠 타이겐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80년대 후반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3명의 대만인 투수 곽태원(카쿠 타이겐, 세이부), 곽원치(카쿠 겐지, 주니치), 장승웅(소 카츠오, 롯데)는 대만과 일본 야구계에서 '이곽일장'으로 불렸다. 이들 중 곽원치와 장승웅은 나중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9] 반면 세이부에서 먼저 이적한 츠지 하츠히코의 경우 1996년에 타율 0.333을 기록해 노무라 재생공장의 훌륭한 사례로 남았다.[10] 1997~2002년까지 대만 프로야구 리그와는 별개로 존재했던 야구 리그. 약칭 '''대만 대연맹'''. 리그 개시 초기엔 당시 검은 독수리 사건 때문에 대만 프로야구 리그의 인기가 개발살난 상태라 상대적 이익을 얻으며 어느정도 잘나갔으나, 결국 갈수록 인기가 줄어들면서 2002년을 끝으로 중단되고 CPBL에 합병된다.[11] 와타나베가 은퇴한 이듬해인 2002년,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이 중단되면서 자난 루카는 해체되었다.[12] 2004년에 이토 감독이, 오치아이 감독의 주니치를 4승 3패로 꺾고 우승했으나 정규 시즌은 2위 였기 때문에 '통합 우승'의 개념에서는 빠진다.[13] 구단 기숙사를 떠나 아파트에서 자취를 시작한 뒤 어느 여성 열성팬이 계속 초인종을 누르고 밤새 기다렸다는 일화도 있다.[14] 더블헤더 첫번째 경기로 이 경기의 결승타였다[15] 참고로, 일본 시리즈에서는 85년 vs 한신 패배, 86년 vs 히로시마 승리, 87년 vs 요미우리 승리, 88년 vs 주니치 승리, 90년 vs 요미우리 승리, 91년 vs 히로시마 승리, 92년 vs 야쿠르트 승리, 93년 vs 야쿠르트 패배, 94년 vs 요미우리 패배... 라는 성적을 올렸다. 요미우리 V9과 함께 NPB 역대 최강의 황금 시대로 세이부 라이온즈의 8~90년대를 꼽는 것이 무리도 아닌 것이다.[16] 첫번째, 두번째 홈런은 당시 선발이었던 곽태원으로부터 였다. 솔로 - 만루홈런의 순서[17] 긴테츠와 세이부에서 활약한 강타자로 통산 465홈런-2452안타를 기록했다. 삼성 라이온스, 세이부, 주니치에서 타격코치를 맡았다. 세이부 타격코치 시절 본인과 같은 18세 4번타자인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성장에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