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 코르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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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前 기계체조 선수이다.
2. 생애
엔지니어 겸 요리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어렸을 때부터 키가 작았지만 운동에는 소질이 있었다. 자신보다 키가 큰 아이들, 심지어는 또래의 남자아이들보다도 달리기가 빨랐다. 8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체조를 시작하여 3년 뒤 벨라루스에 있는 스포츠 학교에 입학했다.
3. 선수 경력
3.1. 입문
입학한 뒤 그녀의 첫번째 코치는 1964 도쿄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였던 옐레나 볼체츠카야였지만, 1년 뒤 레날드 크니쉬의 그룹으로 옮겼다. 크니쉬 코치는 처음에 코르부트의 게으름과 변덕스러운 성격을 발견했지만 곧 그녀의 재능, 유별나게 유연한 척추,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는 연기와 잠재력을 발견했고 코르부트는 그와 함께 하면서 평균대에서 뒤로 공중제비를 도는 초고난도의 기술을 배운다.
1969년 14살의 나이로 처음 참가한 소련선수권에서 5위를 기록했다. 다음 해인 1970년 열린 같은 대회에 참가해 도마에서 금메달을 따냈지만, 부상으로 인해 1972 뮌헨 올림픽 전에 많은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3.2. 1972 뮌헨 올림픽
부상이 아문 뒤 17살의 나이로 처음 참가한 코르부트는 수준급의 체조 실력과 묘기를 선보였다. 평균대, 마루, 단체 종합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3관왕을 하고, 이단평행봉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특히 평균대에서 뒤로 공중제비를 도는 기술은 '''그녀가 최초로 선보여'''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말하자면 4년 후 나디아 코마네치에 해당하는 체조요정이 되었던 셈.
또한 그녀가 이단평행봉에서 받은 은메달은 아직까지 체조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바로 그녀가 선보인 '''코르부트 플립'''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이단평행봉에서 뒤로 도는 기술을 아무도 선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지금봐도 고난도 기술이다. 게다가 46년 전에 선보인 기술이었으니 한마디로 극강의 초고난도 기술이었으며 역동적이고 획기적이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바로 다음 해에 국제 체조 연맹에서 '너무 많은 선수들이 시도하다가 부상을 입는다'는 이유로 공식적으로 금지시켰을 정도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코르부트는 그런 기술을 조금의 흠도 없이 완벽하게 연기했으니 모두가 '당연히 금메달이겠거니'라고 생각했지만, 점수판에 점수가 발표된 뒤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고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벽한 초고난도 연기를 펼쳤는데도 9.8점[4] 이 나와 그 전에 경기한 9.9점을 받은 동독의 카린 얀츠에 밀려 은메달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관중들은 심판을 향해 야유를 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그대로 얀츠가 금메달, 코르부트가 은메달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기술을 완벽히 연기한 것치고 너무 점수가 낮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왜 올가 코르부트가 최초의 체조 만점자가 아닌지 이해가 안된다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개인 종합 경기에서는 다 잘하다가 이단평행봉 경기에서 시작부터 발이 땅에 걸려 삐그덕대더니 끝날 때까지 이런 큰 실수를 3번이나 해 그야말로 폭망했다. 이 경기로 1위에서 7위까지 추락해 메달이 날라갔다. 결국 개인종합 금메달은 동료인 루드밀라 투리스체바에게 돌아갔고, 본인도 많이 속상했는지 평행봉 경기가 끝난 뒤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개인종합 메달은 놓쳤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1972 뮌헨 올림픽에서만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를 획득함 뿐만 아니라 파격적인 기술, 깜찍한 외모와 웃음 등으로 일약 스타로 떠올랐으며 미국의 전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과 만나기도 했다.
같은 해에 AP통신에서 발표한 '올해의 선수'에도 선정됐다.
3.3.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소련 체조 코치들과 관계자들은 루마니아 출신의 체조 천재 나디아 코마네치를 이길 수 있는 선수로 코르부트를 지목했지만 부상 탓에 막상 경기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36년이나 지난 2012년에 했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원래 본인은 1976년에 올림픽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소련의 에이스인 그녀가 나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억지로 나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1972 뮌헨 올림픽 이후 소련의 친선대사로 발탁돼 세계 각국을 다니느라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사춘기가 지나갈 시기여서 몸이 바뀌는 것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때문에 준비도 되지 않았고 몸도 너무 피곤했다고 한다. 그래도 앞선 대회 챔피언의 명성에 어울리게 단체전에서 금메달, 평균대에서는 나디아 코마네치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코마네치뿐 아니라 동료인 넬리킴[5] 에게까지 그늘이 가려져 1976년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4. 은퇴 이후
1977년, 그로드노 주립대학교를 졸업한 뒤 교사가 됨과 동시에 체육계에서 은퇴한다고 밝혔고, 같은 해 벨라루스의 포크록밴드인 Pesniary의 멤버 레오니드 보트크비치와 결혼하여 다음 해에 아들 리차드를 낳았다.
1988년, 남녀 체조선수를 모두 통틀어 '''최초로''' 체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참고로 두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는 나디아 코마네치다.
1991년,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 거주하던 그녀는 300km 가량 떨어진 체르노빌에서 방사능의 여파가 민스크까지 퍼져 갑상선 기능에 손상을 입었다. 이후 곧 바로 미국 애틀랜타로 이주해 코치 생활을 이어나갔다.
2002년, 그녀는 애리조나 주의 스코츠데일로 이주해 스코츠데일의 체조와 치어리딩 등에서 수석 코치를 맡았다. 2017년부터는 개인 신분으로 체조 코치를 맡고 있다.
5. 수상 기록
6. 기타
6.1. 흑역사
1991년 이전 체르노빌 사고 이후 커진 불안감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갔고, 대표적인 벨라루스계 미국인으로 꼽힌다.
2002년 조지아 주의 한 식료품점에서 치즈, 초콜릿 시럽, 무화과, 조미료 등 19달러 어치의 음식을 훔치다가 기소된 적이 있다.
코르부트의 말로는 차에 지갑을 놓고 내려 차 문까지 카트를 몰고 지갑을 챙긴 다음 다시 가게로 끌고가서 계산을 하려고했다고 해명했는데, 마트의 보안관이 그녀가 가게 밖으로 나가기 전에 핸드백에 진열돼있는 음식을 담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고, 결국 600달러를 현금으로 지불하고나서야 풀려났다.
또한 2006년에는 음주운전으로 추정되는 교통사고를 일으켰다가 머그샷을 찍는 굴욕을 당한 바가 있다.
그리고 이건 코르부트의 흑역사는 아니지만 셋이 살던 집에서 코르부트와 그녀의 남편만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아들 리차드는 계속 그 집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절도 죄를 수사하는 중 마침 리차드가 살고있던 집에서 3만 파운드(한화 약 3369만원) 가량의 위조 지폐가 발견돼 리차드가 기소된 적이 있다.
6.2. 폭로
1999년, 은퇴한지 한참이 된 코르부트가 자신이 15살이던 1972년부터 소련 대표팀 코치였던 레날드 크니쉬의 협박에 강제적으로 그와 성관계를 맺었다고 폭로했다. 그 짓은 크니쉬가 다른 선수를 새로운 섹스파트너로 삼을 때까지 수년 간 반복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1] 벨라루스어로는 '볼하 발랸시나우나 코르부트'[2] 러시아어 기준. 벨라루스어로는 Вольга Валянцінаўна Корбут[3] 선수 시절 기준[4] 10점이 만점이며, 현재는 만점제도가 폐지된 상태이다.[5] 최초로 마루와 도마에서 만점을 받았고, 1976 몬트리올 올림픽,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5개와 은메달 1개를 획득한, 코마네치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체조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