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쓰키 레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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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25·28대 내각총리대신
와카쓰키 레이지로
若槻禮次郞 | Wakatsuki Reijir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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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66년 3월 21일
이즈모국 오우군 사이카정
(現 시마네현 마츠에시)
'''사망'''
1949년 11월 20일 (향년 83세)
시즈오카현 이토시
'''재임기간'''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1]
1926년 1월 28일 ~ 1926년 1월 30일
제25대 내각총리대신
1926년 1월 30일 ~ 1927년 4월 20일
제28대 내각총리대신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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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와카쓰키 도쿠코
'''자녀'''
아들 와카쓰키 아리노리
딸 다하라 시게코
'''학력'''
제국대학 (법학 / 학사)
'''정당'''

'''약력'''
대장성 관료
제2·4대 대장차관[7]
귀족원 의원
제15·17대 대장대신
제41-42대 내무대신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
제2대 헌정회 총재
제25대 내각총리대신
제2대 입헌민정당 총재
제28대 내각총리대신
호세이대학 고문
일불회관 이사장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1차 내각
2.3. 2차 내각
2.4. 이후
3.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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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정치인, 관료. 제15, 17대 대장대신, 제48, 49대 내무대신, 제25, 28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내무대신을 지내다가 전임자 가토 다카아키 총리가 재임 중 사망하여 이틀간 권한대행을 하다가 총리직을 승계했고, 1차 집권기에 다이쇼 덴노가 붕어하여 다이쇼 시대 마지막 총리인 동시에 쇼와 시대 첫 총리가 되었다. 입헌민정당(현 자유민주당의 전신 격) 출신이다.

2. 생애



2.1. 초기


이즈모노쿠니(出雲国) 마쓰에(松江)(現 시마네현 마츠에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시마네현을 다스리고 있던 마쓰에번 소속이었는데, 많은 일본 근대화 시기 정치인들처럼 좋지 않은 무사 집안 막내로 태어났으나 제국대학(현 도쿄대학)[2] 테크를 타서 대장성에까지 간 사람 중 한 명이다. 전간기 일본 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경제관료이자 정치가이며, 몇 안 되는 평화주의자로서 유명하다.

2.2. 1차 내각


[image]
25대 총리 취임 후
집권 직후 비리 사건에 연루되었다. 검찰에게 수사를 받으면서 위증죄로 기소를 당하는 등 정치적 수모를 겪은 끝에 무죄가 되었으나, 이미 내각의 도덕성은 큰 타격을 입은 뒤였다. 1926년 12월 25일 다이쇼 덴노가 사망하고 히로히토 친왕이 즉위함에 따라 다이쇼에서 쇼와로 연호를 개원했으며 새 시대가 열렸으나, 예산을 통과시킬 수가 없어 곤경에 처한 와카쓰키는 정우회의 다나카 기이치와 타협을 시도하여, 새해 1월 7일 귀족원의 거물인 아오키 노부미쓰 자작을 통해 예산만 넘겨주면 알아서 물러가겠노라는 의사를 밝혔고, 다나카가 이를 받아들여 예산이 통과되었으나, 정작 예산이 통과시켰더니 이번에는 금융위기가 터져서 물러날 타이밍이 보이질 않았다고 한다. 와카쓰키는 일단 터진 봇물부터 막고 5월-6월 즈음에 사임하려는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정우회에서는 그보다 일단 약속부터 지키라며 협력을 거부하고 정부가 거짓말쟁이라며 욕을 해대던 판이었다.
이 금융위기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었던 1927년 3월 14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와타나베 은행이 실제 파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재무장관 카타오카 나오하루가 '''도쿄 와타나베 은행이 드디어 파산을 했습니다.''' 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러한 발언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무역량의 감소, 관동대지진의 여파 등 불안정했던 당시 경제 상황과 맞물려 경제 불안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쇼와 금융공황'''이 발생하였다. 정우회의 태도로 보아 야당이 의회에서 협력을 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와카쓰키는 의회를 제끼고 직접 천황을 통해 칙령을 내려서 일본은행을 위한 구제금융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의회가 멀쩡히 있으니 의회에서 상의하지 무슨 칙령을 내리냐며 추밀원이 위헌 딱지를 놓았다. 와카쓰키는 정책 수행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 이로 인해 내각 총사퇴를 하게 된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출범한 다나카 내각은 와카쓰키와 똑같은 내용의 구제안을 의회에 제출했고 멀쩡히 잘 통과가 되었다. 그래서 법안을 제출조차 하지 않았던 와카쓰키의 실책이라며 구설수가 많았다.
이후 1930년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 수석대표로 참여해서 각국 군비 축소를 주장했는데, 이로 인해 일본 국내의 군부 및 우익 세력에게 단단히 찍히게 된다.

2.3. 2차 내각


1931년 다시 총리대신 직에 올랐으나, 그해 9월 18일 일어난 류탸오후 사건을 계기로 만주사변이 발생하였다. 당시 일본 국내의 강경파는 불경기에 대한 돌파 수단으로 만주 및 몽골에 대한 침략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는데, 와카쓰키는 이에 거세게 반발하였다.[3] 의회를 무시하고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군부, 특히 육군[4][5]은 노골적인 항명을 하였으며, 심지어 내각의 일원이었던 아다치 겐조 내무대신이 "거국일치"를 주장하기에 이르자 내각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상실했음을 깨닫고 사임하게 된다.[6]

2.4. 이후


침략 시대와 제2차 세계 대전 시대를 거쳐 계속 반전 운동을 해 왔으나, 영향력이 미미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끝낸 이후는 중신 회의의 일원이 되어 쇼와 덴노의 측근으로 지냈으며,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시기에 와서는 도조 히데키의 경제 파탄을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1945년 패망이 짙어지자 스즈키 간타로 당시 총리에게 항복을 권고하였으며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하는 회의에도 참석했다. 이후 도쿄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평화주의자로서 전후 그의 식견은 재평가를 받았다.

3. 수훈



[1] 전임자인 가토 다카아키 총리가 급사하여 내무대신으로서 총리 권한대행을 하다가 이틀 뒤에 총리직을 승계하였다. 그러나 총리 취임 후에도 내무대신은 계속 겸임했다.[2] 현 도쿄대학은 도쿄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개교 당시의 이 도쿄대학을 구제 도쿄대학, 현재를 신제 도쿄대학으로 구별해 부른다. 도쿄대학은 1886년 제국대학으로 개칭되고 예과가 제1고등학교로 분리되었으나 1897년 교토제국대학이 개교하자 제국대학 간 구별을 위해 도쿄제국대학으로 또 한 번 개칭되었다. 그러나 종전 후인 1947년 제국대학령이 폐지되어 식민지를 제외한 각지의 제국대학들은 '제국'이 삭제되었다. 그리고 2년 뒤에 제1고등학교를 비롯한 구제고등학교들을 도로 통합하여 모두 신제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와카쓰키가 졸업할 당시는 도쿄제국대학으로의 개칭 전이니 제국대학이라는 이름이 맞다.[3] 당시 중국정부에 만주침략에 대한 2차성명으로 군대철수까지 제안할 정도였다.[4] 만주사변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애초에 그 자체가 육군의 자작극이었으니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5] 사족으로 이 당시 육군대신은 미나미 지로로 훗날 조선 총독이 되어 시행한 내선일체와 창씨개명으로 악명 높다.[6] 생각해보면 그 자신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의 후임이었던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는 군부의 반발로 암살당한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이지만 2차 와카쓰키 내각 직전의 전임자였던 제27대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도 암살 미수를 당해서 116일간 직무를 쉬었다가 피격 10개월 만에 후유증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