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카이 쓰요시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각료, 내각총리대신.
총리로 재직한 세월은 고작 5개월에 불과하지만, 오랜 세월 정치거물이었고 총리직은 그의 인생의 정점이었다. 무엇보다 1932년 5월 15일 해군 장교들에게 피습당해 '''총리 재직 중''' 죽었다(5.15 사건).
2. 생애
2.1. 총리 이전
이누카이 쓰요시는 1855년 6월 4일, 에도 막부 빗추국(현재 오카야마현)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모쿠도(목당/木堂)이서 모쿠도 선생이라고 많이 불렸다고 한다.
게이오기주쿠대학 입학 후 신문 견습기자로 취직하면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대학 중퇴 후에는 '''신문사를 창간'''해(!) 보호무역론을 옹호했다. 견습기자 시절 알던 선배의 인연으로 통계청에 근무하기도 했었지만 곧 퇴직했다. 이때 오자키 유키오를 처음 만났다. 이후 두 사람은 거의 같이 붙어다니게 된다. 신문사, 정당, 잡지사 등등 같은 회사에 입사와 퇴사 시기가 비슷하다. 그리고 오자키가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문부대신으로 입각하고 얼마 안 있어 공화연설로 사임하자 임시로 문부대신을 맡기도 했다.
2.2. 총리 시절
민정당의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가 모아지지 않는 내각 의견에 빡쳐서 사임하자 입헌정우회에게로 다시 정권이 돌아왔고, 드디어 후임 총리로 결정되었다. 의원들과 원로들이 당시 슬슬 폭주해가던 군부를 잡을 요량으로 이누카이를 선출한 것인데, 결과적으론 악수가 되어버렸다.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21일째)에서 이봉창 의사가 쇼와 덴노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게 된다(사쿠라다몬 의거). 이로 인해 사임하려 했으나 덴노의 반려와 사이온지 긴모치의 중재로 유임했다.[1]
2월 20일에 벌어진 제18대 총선에서는 301:146으로 민정당을 크게 따돌리며 거대 여당이 되었다. 이에 힘입은 이누카이는 원로의원들의 바람대로 군부를 혹독하게 지배하려 들었고, 외교 면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온건주의 노선을 지향하려 노력했다.
물론 정우회는 민정당에 비해서 전반적으로 참전여론이 강했다. 하지만 이누카이 개인은 국제연맹등의 여론이 좋지 않음을 인지하고 만주국 설립을 막고 일본과 중화민국이 모두 합의하는 선에서 만주에 자치정부를 두어 양국이 함께 관리하고 일본은 경제권만을 취하는 방식의 합의를 보려는 주장을 했다고.
여하간 이 시점은 일본이 전쟁에 휩쓸리냐 마냐를 결정하는 마지막 분기가 되었고, 결국 헌정 최후의 보루였던 이누카이의 죽음과 함께 일본은 그대로 파시즘의 나락으로 들어가고 만다.
2.3. 만주사변과 암살
만주사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누카이 내각은 당시 국제연맹 주도의 리튼 조사단에서 내놓은 합의안, 즉 만주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되 일본에 의해 조종되는 지방정부를 성립시키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권익을 보장하는 방안으로 출구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폭주하던 군부는 정우회 내의 실력자인 모리 쓰토무[2] 와 결탁하여 당내 분열을 조장하면서 정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 결과는 5.15 사건이었으니, 우유부단한 총리에게 정권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한 젊은 해군 장교(와 육군 사관생도)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총을 쏜 이는 구로이와 이사무).
당시 해군 군인들은 수상 관저의 정문과 후문으로 나눠 들어왔는데, 정문으로 들어온 장교가 먼저 총리를 발견하고 권총을 쐈지만 불발이었다. 식사 직전이었던 총리는 "기다려, 총은 언제든지 쏠 수 있네. 말로 하면 알아듣네!"라고 하면서 응접실로 이들을 안내했다. 하지만 후문으로 들어온 군인들이 응접실에서 총리를 발견하자마자 "문답무용, 발사!"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번엔 불행하게도 불발이 아니어서 그대로 유언이 되어버렸다. 이후 주모자 11명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전국적인 구명 운동과 35만 명의 서명으로 사면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는 살해 당일 '''찰리 채플린'''을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를 살해한 장교들은 찰리 채플린 역시 죽이려 했으나 찰리 채플린은 살아 남았다. 5.15 사건 문서의 여담 참조
3. 여담
아들 이누카이 다케루는 소설가였다가 그가 총리가 되기 직전에 정계에 입문해 태평양 전쟁 이후 전후 의회에서 일본민주당(1947년) 총재와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법무대신을 지냈다[3] . 전후 일본민주당(1947)이 정우회와는 대립각을 세우던 일본 민정당의 후예격이라는걸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고[4] , 과연 민주당은 다케루 시기 자유당에 합당되고 만다.[5] 이 사건 때문에 아들 다케루가 채플린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란 가정이 떡밥거리처럼 다뤄진다고 한다. 부자가 둘다 끔살…/ 혹은 운 좋게 쓰요시가 살아난다든가 여러 가정이 가능하다.
손녀(다케루의 장녀) 이누카이 미치코(犬養道子)는 일본 가톨릭계의 유명 인물로 여러 종교서적을 저술한 평론가로 유명하다. 다른 손녀 안도 카즈는 안도 사쿠라의 어머니다. 즉 이누카이는 안도 사쿠라에게 외증조할아버지가 된다.
위의 글은 그가 1896년에 쓴 글이다. 일본 정계에서 그나마 입헌, 민주주의의 대표주자로 유명했던 그조차도 이런 시각을 가졌던 것을 보면, 당시 일본 정계와 지식인층이 한반도 민중들에 어떠한 관점을 보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일본인은 남의 노복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까닭에 노동자에 적합하지 않다. 때문에 하늘은 조선인과 같은 순종적인 인민을 만들어 이웃끼리 각자 역할을 다하게 했다. 조선인은 정신은 퇴락했으나 신체는 강건하다."
Hearts of Iron 시리즈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5.15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게임 시작시인 1936년까지 총리직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15일 좌익적인 해군 장교들이 가타야마 센을 암살하는 백색테러의 복수로 그를 암살하며 4년 늦게 5.15 사건이 터지고 흔들리던 일본의 민주주의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
[1] 만약 이렇게 됐으면 그야말로 한 달도 안되는 역대 최단 임기 내각이 되었을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1월 8일에 있었고, 이누카이는 이 의거 당일인 1월 8일에 사임을 주청했으나 덴노가 다음 날 반려했다. 진짜 일본사 최단 재임 총리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총리이다. 그러나 명줄로는 최장수(= 102세) 총리였다. 두 번째로 장수(= 101세)한 총리는 2019년 타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2] 모리 가쿠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3] 다만 자유당과의 합당 추진과정에서 탈당파들이 발생하고 요시다 수상이 강화협상 이후 전범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전면 해제하면서 실세했다. 법무대신은 소수당이나마 연립내각의 총재가 받기엔 그렇게 실권있는 자리는 아니었다고.[4] 근데 그렇게 따지면 또 일본 민정당은 일본 정우회에서 와카자키 레이지로 등의 탈당파들이 외부의 호헌회와 연합하여 세운 정당이다. [5] 다만 합당에 동의하지 않은 잔류파들이 1955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이들이 자유당과 자유민주당을 결성하며 55년 체제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