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

 

1. 外食
1.1. 관련 문서
2. 外飾
3. 外式


1. 外食


밖에 나가(주로 식당) 밥을 먹는 것. 법률상의 정의를 빌리면, 가정에서 취사(炊事)를 통하여 음식을 마련하지 아니하고 음식점 등에서 음식을 사서 이루어지는 식사형태를 말한다(외식산업 진흥법 제2조 제1호).
늘 먹던 음식이 아닌 새로운 음식을 먹어 좋고, 요리와 설거지를 하지 않아 편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많이하면 몸[1] 뿐만 아니라 집 경제에도 많은 타격을 입힌다. 캠핑 중이나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는 것은 외식이라 칭하지 않는다. 한국은 역사/ 환경적인 영향[2]으로 인해 외식 산업 자체가 늦게 발달한 편이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국밥주막 항목을 참조해보면 좋다. 어쨌거나 당대에도 절이나 주막에서 외식을 하는 경우는 종종있었지만[3] 참고로 조선시대에 외식이 활성화된것은 대체로 정조시대 즈음으로 손꼽히는데 영조대에 금주령이 수십년이상 시행되어 술집들이 공공연히 영업하지 못하여 외식의 활성화가 이루워지지 못했다가 정조대에 금주령이 풀리면서 술집들이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중국인들은 외식 문화가 매우 발달되어 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외식을 하는 일이 일상화 되어 있다[4] .
1970년대 이전도 외식했던 사람은 외식했지만 외식비가 그리 싸지 않았던 탓에 되도록 집밥을 먹는 것을 권장했었고, 외식이라고 해도 한식집이나 중식집, 분식집을 주로 갔고, 경양식집이나 전기구이 통닭집같은 경우에는 큰 맘 먹고가야했던곳이다. 물론 그 시절에도 술집 문화는 발달해서 외식 개념이 아주 없던것은 아니었지만 가족단위 외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가 소득수준이 점차적으로 향상됨에 따라 1980년대 들어서 패스트푸드점과 피자집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1990년대 들어서 패밀리 레스토랑이 등장하고 전통일식집이 확산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이전의 영향이 남아있다보니 "외식한다"라고 하면 가족 단위로 경양식 레스토랑이나 고기집에 가서 평소 먹을 수 없었던 별미를 먹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imf 이후 정보사회로 점점 발전하면서 핵가족이 증가하고 성인들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1인 가정이 늘어남에 따라 끼니를 사서 때운다는게 일상화 되어서 "외식"이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대신 집에서 해먹는 밥을 "집밥"이라고 부르는 상황 역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맞벌이 가정이 급속도록 늘어나며 가정에서 요리 노동이 줄어들어 국과 반찬까지 주문해서 사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대신 조미료를 덜 쓰고 별미가 별로 없는 평범한 집밥 스타일에 대한 그리움을 표하는 세태가 늘어나자 "집밥"을 컨셉으로 하는 식당과 마케팅이 유행하게 된다. 그래서 밖에서 사먹거나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간단히 사서 먹는 것을 지양하고[5]직접 자신이 손수 재료를 손질하여 요리 노동을 한 후 정갈하게 차려먹는 행위를 "나를 스스로 대접한다"라는 개념으로 해석되어 이런 과정을 즐기는 1인 가구도 늘어났다.
현재와서는 내식적외식(집에서 만들어 밖에서 식사) ,외식적내식(외부음식을 집안에서 가져와 식사[냉동식품도 포함된다]),외식적외식(흔히생각할수 있는 밖에서 식사) 등이 있으며 외식의 범위가 크게 늘어나서 한범위로 규정하기엔 조금 어렵다.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외식으로는 한식당, 중식당, 일식당, 양식당 등이 있다. 특히 외식하면 양식당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은 편.
이외에도 별별 종류의 식당이 있으며, 이태원동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식당이 밀집해 있다.

1.1. 관련 문서



2. 外飾


Οὐαὶ δὲ ὑμῖν, γραμματεῖς καὶ Φαρισαῖοι ὑποκριταί, ὅτι κλείετε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ῶν οὐρανῶν ἔμπροσθεν τῶν ἀνθρώπων: ὑμεῖς γὰρ οὐκ εἰσέρχεσθε, οὐδὲ τοὺς εἰσερχομένους ἀφίετε εἰσελθεῖν.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6]

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다만 최근에 역사적 예수 연구가 진척된 뒤의 시각은 다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여러 율법 연구 학파 중에서는 오히려 율법 해석이 상당히 유연한 편이었고, 딱히 남에게 강요할 권력도 없었다. 그리고 성서 내의 기록만 봐도 예수는 바리사이파와 논쟁도 하고 대립도 하지만 동시에 같이 식사도 하고, 협력도 종종 하는것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23:13(개역개정판)[7]

겉치레. "외식"이란 단어를 이런 의미로 자주 쓰지는 않는데, 성경 개역한글판에서는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식으로 자주 썼다. 예전에 교회 다니던 어르신들 중에서 이걸 1번의 외식으로 알아듣고 외식하러 나가면 죄짓는거라고 주장하시던 할머님들도 종종 계셨다는게 함정.
뭔가 어색해 보이는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원어의 어감에 가깝다. 위선자(hypocrite)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어의 원래 의미가 '연기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3. 外式


주로 KOF에서 보이는 설정. 쿠사나기 쿄야가미 이오리가 사용하는 쿠사나기류 고무술 중 다른 무술의 기술을 따온 것을 외부에서 도입했다고 하여 외식이라고 한다. 설정상 본류의 기술이 아니므로 전부 특수기나 기본기다.
쿄의 외식 기술은 나락 떨구기,굉부 양. 이오리의 외식 기술은 몽탄, 굉부 음, 백합 꺾기, 항(불고자 한정)이 있다. 하나같이 주요 특수기.

[1] 건강식을 파는 경우도 있지만 이건 비싸고 인기가 없는 부류라 예외[2] 기후의 영향으로 집집마다 들어선 아궁이, 생산과 물류 유통의 문제, 어지간한 것은 집에서 때우거나 지인들 간의 협동을 통해 해결하는 생활방식, 그나마 없던 외식문화조차 개발살이 난 격동의 근현대사 등[3] 정확히 얘기하자면 고려시대에는 절이라는 곳 자체가 숙박업이나 외식업을 겸한곳이 적지 않았다. 다만 계울상으로 금지된 오신채가 들어간 음식이나 술을 대놓고 파는 등 불교계의 타락상을 엿볼수있기도 하다. 이러한 절의 숙박이나 외식은 조선시대와서 승유억불로 사라졌다.[4] 이는 중국의 맞벌이 부모가 많아지면서 같이 밥 먹거나 밥을 해줄 시간이 없는 것과 땅이 크다보니 이동거리가 길어서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하기도 때문이다. 때문에 중국은 이른아침부터 식당이나 길거리 음식점이 열리며 간단한 음식들을 먹거나 들고 학교나 일터를 가는 사람을 찾기가 쉽다[5] 특히나 마트나 편의점에서 파는 음식들은 비싼편이기에 꺼려지게 된다.[6] 보편교회에선 바리사이파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의 지식인들로 율법규정을 준수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요하다시피하여 로마 정권과 야합한 사두개(사두가이)인들과 대척점에 있었다. 이들의 겉치레로 가득찬 행동에 대해 예수는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래서 위선자의 대명사로 이들을 들먹이기 한다.[7] 대한성서공회 새번역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라고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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