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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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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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을 토대로 복원된 그의 말년의 얼굴.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이자 가톨릭 사제. 당시 주류였던 지구중심설(천동설)을 뒤집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주장했다. 이는 천문학 사상 가장 중요한 재발견으로 여겨지고 있다.
본명은 폴란드어로 '미코와이 코페르니크(Mikołaj Kopernik) 독일어로 니클라스 코페르니히크(Niklas Koppernigk).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라틴어식 이름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어, 독일어, 라틴어에 능통했고 이탈리아어와 그리스어도 어려움 없이 구사했다.
당연히 폴란드에서는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평가한다. 독실한 가톨릭인 폴란드의 상황상 가톨릭 주교일 뿐만 아니라, 지동설을 재발견했고, 오늘날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과의 분쟁에서도 폴란드 측의 승리에 한몫을 했기 때문.[2]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재발견'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려 '''1700년 전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타르코스(BC 310? ~ BC 230?)가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인데, 그는 심지어 (비록 결과값은 틀렸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지구, 달, 태양 간의 거리도 계산한 인물이다.[3] 다만 이후 천동설에 완전히 묻혀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 때에서 가서야 재발견된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이탈리아 유학 중에 아리스타르코스의 저작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사실 그는 흔히 알려진 천문학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철학자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는 아직 제대로 된 천체망원경도 없던 때이며[4] , 티코 브라헤의 방대하고도 체계적인 관측자료가 쌓이기도 전이었다.
실제로 그가 지동설을 주장한 근거는 관측결과가 아니라 일종의 철학적 직관이었다. 천동설의 가장 큰 문제는, 명색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아름다운' 철학적 사조에 기반한 이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관측결과에 끼워맞추다 보니 '''쓸데없이 복잡해지고, 전혀 아름답지도 않아졌다'''는 것. 천동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행성들의 복잡한 움직임을 천동설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주전원 등 Ad Hoc을 마구 갖다붙여야 했다. 반면 지동설을 도입하면 이런 복잡성들이 상당히 간단히 설명되었던 것.
물론 그도 다 맞은 건 아니었다. 지동설은 기본적으로 이렇듯 철학적 사유의 결과였기 때문에 모든 천체의 궤도가 완벽한 원이라고 주장했던 것. 하지만 단순 원운동만으로 행성 궤도를 설명하는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과 이심을 갖다가 행성궤도를 설명하게 되었고 덕분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도 적잖이 더러워졌다... 물론 나중에 요하네스 케플러에 의해 원이 아니라 '''타원형'''이라는 게 밝혀지고 나서야 좀 깨끗해졌다.
사실 의외로 그의 당대에 가톨릭계는 지동설은 별로 탄압하지 않았다. 그의 이론을 규탄한 쪽은 오히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맹신하고 있던 속세의 교수들이었지, 가톨릭계는 오히려 지동설을 하나의 가설로 받아들였었다.[5] 코페르니쿠스는 강단의 교수들의 비난이 두려워 저서 출간을 40년이나 미루었는데, 이 출간도 사실은 그의 새로운 발견이 학계에 알려지게 해 달라는 그의 학설에 매료된 가톨릭계 인사들의 아주 간곡한 부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조르다노 브루노의 화형[6] 이나 갈릴레이의 종교재판 등으로 대표되는 지동설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그보다 반 세기에서 한 세기 뒤, 본격적으로 근대로 들어서며 종교의 권위가 위협받자 종교가 더욱 보수적 색채를 띠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특히나 대중인식 때문에 그렇지 갈릴레이 건은 자세히보면 종교적 탄압이라기엔 이견이 많은 편.
그때 갈릴레이의 오만함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도 금서목록에 들어가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나마도 꼴랑 4년(1616~1620) 뒤에는 아홉 문장만 삭제하는 조건하에서 재출판 가능하다는 결정이 나와 큰 의미는 없다. 그나마 6권이나 된 분량 중 아홉 문장을 찾기도 어려워서 검열관이 몇 권 수정하고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영향은 없었다.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왕국 왕령 프로이센[7][8] 의 토룬(Toruń)[9] 에서, 독일계 상인 아버지 슬하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10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인 바체르로데 신부[10] 밑에서 자랐다. 1491년 신부가 되기 위해 입학한 크라쿠프 대학에서 철학교수인 불제프스키에게서 수학과 천문학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천동설)과 알폰소항성목록 사이의 불일치를 알게 되었다. 당시의 천문학에는 교회력(敎會曆)의 시정과 항해력의 개량이라는 2개의 큰 문제가 미해결로 있었다.
1512년에 외삼촌이 죽자, 바르미아 영주성이 있던 하일스베르크를 떠나 수도사제로서 바르미아 교구의 주교좌인 프라우엔부르크 대성당에서 기거하였다. 그때부터 야간에 옥상의 망성대에서 스스로 만든 측각기를 이용하여 천체관측을 시작하였다. 그가 지동설을 착안하고 그것을 확신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전 4권)》는 1525∼1530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다만 출판을 주저한 것은 종교적으로 이단자가 된다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책이 출판된 것은 그의 말년에 가서였으며, 심지어 제자의 명의로 출간했다. 게다가 제자인 레티쿠스의 이름으로 살짝 뿌려보다가 반응이 좋자 본격적으로 출간하기로 했는데, 이때엔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가톨릭 주교에 대한 얘기는 좋다고 해놓고선 정작 출판의 발판을 마련한 레티쿠스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레티쿠스는 지인인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11] 에게 넘겨줬고, 오시안더는 신학자라서 종교의 잣대에 맞춰서 조금씩 바꿨다고 한다.
1516년 바르미아 주교령과 알렌슈타인, 멜사크의 재정 담당관이 되어 알렌슈타인으로 이동했고, 1521년 튜튼기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알렌슈타인의 수성 책임을 맡아 도시를 지켜내기도 했다. 1522년에 다시 프라우엔부르크 대성당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image]
젊은 시절 초상화.
[image][1]
유골을 토대로 복원된 그의 말년의 얼굴.
1. 소개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이자 가톨릭 사제. 당시 주류였던 지구중심설(천동설)을 뒤집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주장했다. 이는 천문학 사상 가장 중요한 재발견으로 여겨지고 있다.
본명은 폴란드어로 '미코와이 코페르니크(Mikołaj Kopernik) 독일어로 니클라스 코페르니히크(Niklas Koppernigk).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라틴어식 이름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어, 독일어, 라틴어에 능통했고 이탈리아어와 그리스어도 어려움 없이 구사했다.
당연히 폴란드에서는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평가한다. 독실한 가톨릭인 폴란드의 상황상 가톨릭 주교일 뿐만 아니라, 지동설을 재발견했고, 오늘날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과의 분쟁에서도 폴란드 측의 승리에 한몫을 했기 때문.[2]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재발견'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려 '''1700년 전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타르코스(BC 310? ~ BC 230?)가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인데, 그는 심지어 (비록 결과값은 틀렸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지구, 달, 태양 간의 거리도 계산한 인물이다.[3] 다만 이후 천동설에 완전히 묻혀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 때에서 가서야 재발견된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이탈리아 유학 중에 아리스타르코스의 저작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사실 그는 흔히 알려진 천문학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철학자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는 아직 제대로 된 천체망원경도 없던 때이며[4] , 티코 브라헤의 방대하고도 체계적인 관측자료가 쌓이기도 전이었다.
실제로 그가 지동설을 주장한 근거는 관측결과가 아니라 일종의 철학적 직관이었다. 천동설의 가장 큰 문제는, 명색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아름다운' 철학적 사조에 기반한 이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관측결과에 끼워맞추다 보니 '''쓸데없이 복잡해지고, 전혀 아름답지도 않아졌다'''는 것. 천동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행성들의 복잡한 움직임을 천동설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주전원 등 Ad Hoc을 마구 갖다붙여야 했다. 반면 지동설을 도입하면 이런 복잡성들이 상당히 간단히 설명되었던 것.
물론 그도 다 맞은 건 아니었다. 지동설은 기본적으로 이렇듯 철학적 사유의 결과였기 때문에 모든 천체의 궤도가 완벽한 원이라고 주장했던 것. 하지만 단순 원운동만으로 행성 궤도를 설명하는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과 이심을 갖다가 행성궤도를 설명하게 되었고 덕분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도 적잖이 더러워졌다... 물론 나중에 요하네스 케플러에 의해 원이 아니라 '''타원형'''이라는 게 밝혀지고 나서야 좀 깨끗해졌다.
2. 가톨릭에서 지지받은 지동설
사실 의외로 그의 당대에 가톨릭계는 지동설은 별로 탄압하지 않았다. 그의 이론을 규탄한 쪽은 오히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맹신하고 있던 속세의 교수들이었지, 가톨릭계는 오히려 지동설을 하나의 가설로 받아들였었다.[5] 코페르니쿠스는 강단의 교수들의 비난이 두려워 저서 출간을 40년이나 미루었는데, 이 출간도 사실은 그의 새로운 발견이 학계에 알려지게 해 달라는 그의 학설에 매료된 가톨릭계 인사들의 아주 간곡한 부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조르다노 브루노의 화형[6] 이나 갈릴레이의 종교재판 등으로 대표되는 지동설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그보다 반 세기에서 한 세기 뒤, 본격적으로 근대로 들어서며 종교의 권위가 위협받자 종교가 더욱 보수적 색채를 띠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특히나 대중인식 때문에 그렇지 갈릴레이 건은 자세히보면 종교적 탄압이라기엔 이견이 많은 편.
그때 갈릴레이의 오만함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도 금서목록에 들어가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나마도 꼴랑 4년(1616~1620) 뒤에는 아홉 문장만 삭제하는 조건하에서 재출판 가능하다는 결정이 나와 큰 의미는 없다. 그나마 6권이나 된 분량 중 아홉 문장을 찾기도 어려워서 검열관이 몇 권 수정하고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영향은 없었다.
3. 생애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왕국 왕령 프로이센[7][8] 의 토룬(Toruń)[9] 에서, 독일계 상인 아버지 슬하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10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인 바체르로데 신부[10] 밑에서 자랐다. 1491년 신부가 되기 위해 입학한 크라쿠프 대학에서 철학교수인 불제프스키에게서 수학과 천문학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천동설)과 알폰소항성목록 사이의 불일치를 알게 되었다. 당시의 천문학에는 교회력(敎會曆)의 시정과 항해력의 개량이라는 2개의 큰 문제가 미해결로 있었다.
1512년에 외삼촌이 죽자, 바르미아 영주성이 있던 하일스베르크를 떠나 수도사제로서 바르미아 교구의 주교좌인 프라우엔부르크 대성당에서 기거하였다. 그때부터 야간에 옥상의 망성대에서 스스로 만든 측각기를 이용하여 천체관측을 시작하였다. 그가 지동설을 착안하고 그것을 확신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전 4권)》는 1525∼1530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다만 출판을 주저한 것은 종교적으로 이단자가 된다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책이 출판된 것은 그의 말년에 가서였으며, 심지어 제자의 명의로 출간했다. 게다가 제자인 레티쿠스의 이름으로 살짝 뿌려보다가 반응이 좋자 본격적으로 출간하기로 했는데, 이때엔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가톨릭 주교에 대한 얘기는 좋다고 해놓고선 정작 출판의 발판을 마련한 레티쿠스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레티쿠스는 지인인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11] 에게 넘겨줬고, 오시안더는 신학자라서 종교의 잣대에 맞춰서 조금씩 바꿨다고 한다.
1516년 바르미아 주교령과 알렌슈타인, 멜사크의 재정 담당관이 되어 알렌슈타인으로 이동했고, 1521년 튜튼기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알렌슈타인의 수성 책임을 맡아 도시를 지켜내기도 했다. 1522년에 다시 프라우엔부르크 대성당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4. 그 외
- 112번 원소 '코페르니슘'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도 등장했다.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의 DLC인 코페르니쿠스의 음모론에서 등장. 원래는 템플 기사단원이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체자레 보르지아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지만 당시 지나가던 에치오 아우디토레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 대항해시대 3에서 이벤트로 등장한다. 바르샤바에 가면 천문학 연구소에서 코페르니쿠스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을 방문하면 코페르니쿠스를 딱 한 번만 만날 수 있다. 지동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인공에게 무엇을 믿는냐고 질문한다. 지동설을 믿는다고 하면 항해도구인 아이템 망원경을 주고 사라진다. 만약 천동설을 믿는다고 하거나, 지동설을 믿는다고 해도 과학 레벨이 2 이상이 아닐 경우 망원경을 받지 못하며 다시는 코페르니쿠스를 만날 수 없다. 망원경은 1500년 이후 신대륙 지역 시장에서 구입할 수도 있다. 한 가지 옥의 티라면 게임 시작 년도인 1480년을 기준으로 하면 코페르니쿠스는 어린 시절이란 점이 지적받는다.
- 지동설의 충격 효과 때문인지 충격적인 발상의 전환을 가리키는 '코페르니쿠스적'이라는 관용어가 있다. 이는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사용한 개념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독)Kopernikanische Wendung / (영)Copernican Revolution)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식이 대상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 형식이 대상의 인식을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개념이다. 가장 좋은 예는 역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을 처음 제시했을 때 대다수가 씹었던 것과 달리 많은 학자들[12] 이 높게 평가했다.
- 지동설 재발견이라는 압도적인 공헌 덕분에 묻힌 사실이 하나 있는데, 화폐론과 금융학 분야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둔 인물이다.[13] 화폐론에 대한 연구성과를 요약하자면 귀금속 화폐의 가치는 귀금속 자체의 내재적 가치가 아닌, 다른 재화와의 상대적 교환가치에 의해서 결정된다.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시장에 유통되는 통화량이 2배로 증가하면 금화의 가치는 절반이 된다는 것이다. 현대 경제학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정확한 연구성과를 내놓은 셈이다. 실제로 수십년 후, 아메리카에서 대규모의 금이 유입되면서 유럽 전역의 물가가 폭등했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연구결과가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다만 천문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 이라고까지 주목받은 것에 비하면 화폐론의 연구는 그렇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당시의 상인들부터가 화폐의 가치가 상대적 가치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기존의 이론(귀금속이 가진 고유한 내재적 가치에 의해 화폐의 가치가 결정된다) 역시 신비주의와 연금술 사상이 결합된 형태[14] 였기 때문에 은근히 비웃음거리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5] 결국 독창적인 개념을 제시했다기보다는 이미 사람들이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하고 있던 개념을 정립하여 다듬는 정도의 연구였던 것이다.
- 크라쿠프 대학에서 천문학을, 볼로냐 대학과 페라라 대학에서 신학을, 파도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여 사제이자 궁중의사, 천문학자, 경제학자로 일했다. 천문학에만 능통했던 게 아닌 먼치킨...
- 그가 계산했던 항성 간 거리 측정(항성 년도 측정)은 세월이 지나 약간 어긋난게 드러났다. 사실 이 계산법은 약간 오차가 있긴 한데 코페르니쿠스는 1526년 계산으로 365.2570370 ...으로 D = 365 D 6 H 10 m 8 으로 30초 오차를 내고 계산했다. 기계나 컴퓨터도 없던 그 시대에 이 30초 오치는 대단한 것이다. 다만, 세월이 지나 그보다 더 오차를 줄여 계산한 사람이 코페르니쿠스보다 90년전에 나왔다는 게 밝혀졌던 것, 바로 그 인물은 티무르 제국 황제이던 울루그벡. 1437년 그는 오차를 25초로 줄인 계산으로 거리를 측정했다는 게 드러났다.
- 가수 미나의 곡 "돌아"에서 등장한다. 해당 가사는 "지구는 돈다고 말했던 사람, 코페르니쿠스"
- 기동전사 건담 SEED 시리즈에서는 달에 있는 월면도시의 지명으로 등장한다. 중립 도시국가다.
[1] 출처[2] 이 시기 폴란드는 극전성기를 구가했으며, 프로이센은 폴란드에 복속된 터였다. 동쪽의 러시아와 남쪽의 오스만 제국과도 맞짱뜨는 등 당시 유럽에서 폴란드를 위협할 수 있었던 나라는 얼마 안 되었다.[3] 여담으로 아리스타르코스의 친구였던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측량했다. 시에네의 우물(시에네는 북회귀선상에 위치한 도시다. 따라서 춘분날 정오에는 햇빛이 똑바로 떨어져서 우물 속이 다 보인다.)과 자신이 사는 동네의 거리를 '''낙타 걸음'''으로 계산, 그곳에서 막대기가 정오에 드리우는 그림자의 각도를 보고 지구가 구형이라는 가정하에 계산을 했다.[4] 쓸만한 천체망원경은 한 세기 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발명했다.[5]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은 부활인데,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죽고 부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탓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천체가 바로 태양이기도 하다. 그래서 태양(신)의 주위를 지구(인간)이 도는 지동설이 가톨릭적으로는 더 선호되었다.[6] 사실 브루노가 화형당한 주된 이유는 지동설이라기보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반교회적 범신론'''을 주장했기 때문이 크다.[7] 흔히 서프로이센이라 불리는 곳으로 1466년 독일 기사단국과 폴란드 왕국이 체결한 제2차 토룬 조약의 결과 폴란드 왕국 영토로 편입된 독일 기사단국의 서쪽 절반. 동쪽 절반은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계속 존속하다가 1525년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이 루터교로 개종, 세속화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으로 국명을 변경하고 1618년 같은 가문이자 혼인관계를 맺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동군연합을 이루면서 이후 프로이센 왕국의 기원이 된다. 왕령 프로이센은 폴란드 왕국의 뒤를 이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로 남아있었으나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로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가 된다.[8] 다만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 토룬은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 때 프로이센 왕국으로 편입된다.[9] 독일어로는 토른(Thorn).[10] 1489년 바르미아 주교 겸 영주로 선출.[11] 튜튼 기사단장이었던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에게 신학적 영향을 주어 독일 기사단국이 프로이센으로 재편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12] 막스 보른, 막스 플랑크, 마리 퀴리, 민코프스키 등[13] 사실 코페르니쿠스의 시대에는 본격적인 경제학이나 천문학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무렵이라서, 금융학을 전문적으로 파고들었다기보다는 실증주의 연구에 의해 거둔 하나의 성과라고 보는게 올바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14] 황금을 다른 모든 금속보다 가치있는 금속이라고 생각하며 영원불변한 진리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이 대표적인데, 이는 연금술과 연관이 깊다.[15] 그나마 중세 유럽 사회에서 물가변동이 거의 없었던 탓에 결정적인 반박을 당하지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