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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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21대 군주. 위선공과 이강의 손자. 소백 완(頑)과 선강의 아들. 위혜공의 이부동생, 위대공의 친동생. 초명은 희벽강(姬辟疆), 나중에 희훼로 개명했다. 그는 망하고 혼란한 나라를 잘 다스려 위(衛)나라가 춘추시대 내내 중간은 가게 만들었다.[1]
2. 생애
2.1. 군주가 되기 전
위의공이 적족의 손에 죽은 뒤 그 형인 위대공이 그 뒤를 이었으나 금방 죽었다. 자식 유무는 불분명하나 아무튼 제(齊)나라에 있었던 동생인 그가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2]
2.2. 백성과 함께하는 군주
위문공 원년(기원전 659년), 위문공은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적게 내리며, 스스로 부지런히 정사를 돌봐 백성들과 괴로움을 같이하여, 민심이 위문공을 따랐다.[3] 그 결과 위나라는 날로 날로 국력이 회복되었다.
2.3. 제 환공과 함께 행동하다
위문공 4년(기원전 656년), 봄 위문공은 제나라, 노(魯)나라, 송(宋)나라, 진(陳)나라, 정(鄭)나라와 함께 채(蔡)나라를 쳤다.[4] 그 결과 채나라 군대는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그리고 채나라의 상국인 초(楚)나라를 치기 위해 형 땅에 주둔했다. 여름에 초성왕(楚成王)이 굴완(屈完)을 보내 소릉에서 회맹하고 돌아갔다. 12월 위문공은 제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함께 진(陳)나라를 쳤다.
위문공 5년(기원전 655년), 위문공은 제나라, 노나라, 송나라 ,진(陳)나라, 정나라와 수지 땅에서 회맹했다. 주나라에서는 태자 정(鄭)을 보냈다. 그 까닭은 낙읍의 안정과 태자를 부탁하기 위해서다.
위문공 6년(기원전 654년), 여름 위문공은 제후들과 함께 도중에 회맹에 빠진 정문공 때문에 정나라를 쳤다. 그리고 정나라의 수도인 신정을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가을에 초 성왕이 병사를 보내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 허나라를 쳤다. 그러나 제후들이 허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서자 초군이 물러났다.
위문공 8년(기원전 652년), 위문공은 주 왕실, 제나라, 노나라, 송나라와 함께 군 땅에서 왕실을 안정시킬 계획을 논하는 회맹을 개최했다.
위문공 9년(기원전 651년), 위문공은 제나라, 노나라, 송나라, 정나라 군주와 규구에서 회맹을 가졌다.
위문공 13년(기원전 647년), 적족들이 위나라를 쳤다. 여름 위문공은 제나라, 노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함 땅에서 회맹했다. 그 이유는 기(杞)나라가 회족들의 준동을 우려하는 것과 주 왕실의 안정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다.
위문공 15년(기원전 645년), 초나라는 서(徐)나라가 중원의 제후들에게 기울어 서나라를 쳤다. 3월 위문공은 제나라, 노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목구 땅에서 회맹했다. 이것은 규구의 회맹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서나라를 구원할 목적도 있었다.
2.4. 진(晉)나라 공자 중이를 박대하다
위문공 16년(기원전 644년), 진(晉)나라의 공자 중이[5] 이 방랑 중에 위나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위문공은 공자 중이에게 무례하게 대우했다. 12월에 위문공은 제나라, 노나라, 송나라, 정나라 등과 함께 회 땅에서 회맹했다. 증나라에 회이 족이 침입해 군사를 내기 위해서다.
2.5. 제 환공 사후
위문공 18년(기원전 642년), 제 환공이 죽었다. 그리하여 제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 이에 위문공과 송양공(宋襄公), 조(曹)나라, 주(邾)나라4개국이 제나라를 쳤다. 5월 제후 연합군이 언 땅에서 제군을 박살내고, 제효공을 송나라에서 데려왔다.
2.6. 형나라와 싸워 형나라를 멸망시키다
같은 해 겨울 형(邢)나라가 적족과 연합해 위나라를 쳤다. 그리고 위나라의 면포를 포위했다. 위문공은 군민들에게 격려의 말을 하며, 적족의 무리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위문공 19년(기원전 641년), 위문공은 그 일을 벌인 형나라를 쳐서 면포 땅을 포위한 것에 보복을 했다.
위문공 20년(기원전 640년), 활나라가 정나라를 배신하고 위나라를 섬겼다. 가을 제나라와 적족이 형나라에서 회맹해 위나라를 칠 것을 도모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위문공은 형나라를 멸망시킬 뜻을 품었다.
위문공 21년(기원전 639년), 적족이 위나라를 쳤다.
위문공 22년(기원전 638년), 위문공은 송나라, 허나라 등(滕)나라와 정나라를 쳤다.
위문공 25년(기원전 635년), 정월 위문공은 병사를 풀어 형나라를 대대적으로 쳤다. 정월 20일 위군은 형나라를 멸망시켰다. 4월 계유일 위문공이 죽었다. 그리하여 그 아들 세자 정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성공이다.
3. 공자 개방과의 동일인물설
위문공의 원래 이름은 벽강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발견된 청화간에는 벽자와 유사한 한자를 사용한 계방이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여기서 계방이라는 이름에서 계라는 글자가 한경제의 이름과 같아서 대체된 글자가 개(開)자로 제환공의 삼간이라고 알려진 공자 개방과 같은 이름이 된다. 위나라 종실에서 가까운 촌수의 두 인물이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에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이런 의견에 따르면 제환공이 왕위에서 거리가 있는 개방을 대신으로 삼았으나 그가 즉위해야할 상황이 되자 위나라를 재건하는 것을 도와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삼간 취급을 받은 것은 위나라를 재건시켜줬음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에 영향을 끼친 개방을 제나라 입장에서 비난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국어 위키에는 이름이 실전된 위나라의 공자를 실수로 개방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사료가 나와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 물론 전국시대가면 위영공 같은 암군들의 여파와 체급 차이 때문에 그런 거 없다[2] 제환공이 위(衛)나라를 되살려주려는 배려 덕분이었다.[3] 군주 자리를 탐해 형제를 죽였을 뿐 아니라 거듭된 전란으로 나라를 피폐하게 한 이부형이자 숙부인 위혜공과 학을 위한답시고 녹봉과 벼슬을 내리고 고급 사료를 먹이면서 사치를 한 학덕후 조카 겸 사촌인 위 의공과 대조되는 행보를 보이니 당연히 따를 수 밖에 없다.[4] 그 이유는 초(楚)나라를 섬기면서 제나라와의 회맹을 저버렸기 때문에 응징하는 차원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다.[5]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훗날 진문공(晉文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