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러드 밴 오먼 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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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0세기 미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언어철학, 형이상학, 인식론 등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분석철학적 전통이 미국 철학계의 주류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1] 을 하며 지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생애
1908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콰인은 오벌린 대학에서 학부를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화이트헤드의 지도하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직접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여 논리 실증주의자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이후 1978년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아 도널드 데이빗슨, 데이빗 루이스, 솔 크립키, 대니얼 데닛 등 수많은 철학자들을 직간접적으로 지도했고, 많은 저서와 논문들을 발표했다. 은퇴한 이후 고령의 나이에도 연구를 계속하며 저서들을 냈고 2000년 사망한다.
3. 주요 업적
3.1. 언어철학
- 1951년에 발표한 "경험론의 두 독단(Two Dogmas of Empiricism)"에서 크게 다음과 같은 주장들과 논증들을 제시함으로써 논리 실증주의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 1960년 출판한 『단어와 대상(Word and Object)』에서 두 개의 다른 언어 간의 유일하며 객관적으로 올바른 번역 편람을 구축하는 것이 원리상 불가능하다는 '번역 불확정성 논제'를 제시한다.[2] 이를 보이기 위해 제시한 다음 사고실험이 유명하다.
> "가바가이"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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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언어학자가 원시부족의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 오지로 들어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원주민과 함께 있는데, 마침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원주민이 "가바가이"라고 말했다. 언어학자는 "가바가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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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식적인 대답은 이때 "가바가이"가 한국어의 "토끼"와 의미가 같은 것으로 해석하는게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근거는 무엇인가? "가바가이"가 "토끼의 이데아"와 의미가 같다고 보지 못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원시부족이 플라톤주의 철학에 깊은 조예가 있어서 "저기 토끼의 이데아가 뛰어가고 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고 단정할 근거가 있는가? 이게 너무 극단적이라면 "토끼의 귀"가 아니라고 단정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fMRI를 동원해서 "가바가이"라는 말소리가 한국어 "토끼"와 생물학적으로 동등한 신경 신호를 유발하는 것을 확인한다 한들, 이는 "가바가이"와 "토끼"의 의미가 같다는 것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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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선 "토끼", "토끼의 이데아", "토끼의 귀" 등을 구별할 수 있는 상황에서 다시금 원주민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들어봐야한다. 하지만 문제는 결국 다시 반복된다. 이를테면 "가바가이"와 "토끼"가 의미가 같은지 다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어 "~의 이데아", "~의 귀"와 의미가 같은 원주민 언어 단어가 결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즉 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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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주어진 경험적 데이터만을 근거로 삼아 "가바가이"가 "토끼"와 의미가 같은지 결정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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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언어학자가 원시부족의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 오지로 들어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원주민과 함께 있는데, 마침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원주민이 "가바가이"라고 말했다. 언어학자는 "가바가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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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식적인 대답은 이때 "가바가이"가 한국어의 "토끼"와 의미가 같은 것으로 해석하는게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근거는 무엇인가? "가바가이"가 "토끼의 이데아"와 의미가 같다고 보지 못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원시부족이 플라톤주의 철학에 깊은 조예가 있어서 "저기 토끼의 이데아가 뛰어가고 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고 단정할 근거가 있는가? 이게 너무 극단적이라면 "토끼의 귀"가 아니라고 단정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fMRI를 동원해서 "가바가이"라는 말소리가 한국어 "토끼"와 생물학적으로 동등한 신경 신호를 유발하는 것을 확인한다 한들, 이는 "가바가이"와 "토끼"의 의미가 같다는 것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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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선 "토끼", "토끼의 이데아", "토끼의 귀" 등을 구별할 수 있는 상황에서 다시금 원주민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들어봐야한다. 하지만 문제는 결국 다시 반복된다. 이를테면 "가바가이"와 "토끼"가 의미가 같은지 다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어 "~의 이데아", "~의 귀"와 의미가 같은 원주민 언어 단어가 결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즉 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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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주어진 경험적 데이터만을 근거로 삼아 "가바가이"가 "토끼"와 의미가 같은지 결정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 '가바가이' 사고실험을 토대로 콰인은 여러 언어철학적 견해를 전개했다.
- '가바가이' 사고실험은 특정한 경험적 상황(예. 숲 속에서 토끼가 뛰어가는 상황)과 특정한 언어적 표현(예. "가바가이")의 의미가 일대일로 대응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곧 언어 표현의 의미는 바로 그 개별 표현 층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 체계 전체를 참조할 때에만 비로소 결정될 수 있다.
-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 관용적인 표현, '그 녀석 참 진국이야'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어떤 외국인이 한국어 언어체계에 대한 이해 없이 감각경험 만으로 이 문장의 의미를 추론하고자 한다면, 그 추론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어 언어체계에서 '진국'이라는 표현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 언어학자의 현 과업은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원주민 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원주민들의 언어 체계를 밝혀내는 것이다("원초적 번역(radical translation)"). 그런데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언어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가바가이' 등 개별 표현의 의미를 먼저 밝혀내야 한다. 곧 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 콰인은 번역 불확정성을 타개할 수 있는 돌파구로 자비의 원칙을 제안한다.
- 비형식 논리학에서 자비의 원칙은 다음과 같이 거칠게 요약될 수 있다: '저 논증을 보니까 허점이 많군. 하지만 저 논증을 제안한 사람이 바보는 아닐거야. 그러니까 내가 최대한 저 논증의 허점을 메꿔줄 필요가 있어'라고 거칠게 요약될 수 있다.
- '가바가이' 상황에서 자비의 원칙은 다음과 같이 응용될 수 있다: '원주민 부족 사람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같은 생리학적/심리학적 기전을 띠고 있어. 그리고 이런 공통점을 고려하면 "가바가이"라는 말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토끼"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는게 합당해. '
- 물론 이 방법은 번역의 불확정성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고, 콰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콰인은 그러한 상황이 안타깝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같은 것으로 간주한다(bite the bullet). 더 정확하고 세부적인 논쟁이 궁금하다면, 데이빗슨과 콰인의 논쟁을 찾아보자.
- '가바가이' 사고실험은 특정한 경험적 상황(예. 숲 속에서 토끼가 뛰어가는 상황)과 특정한 언어적 표현(예. "가바가이")의 의미가 일대일로 대응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곧 언어 표현의 의미는 바로 그 개별 표현 층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 체계 전체를 참조할 때에만 비로소 결정될 수 있다.
3.2. 인식론
- 「자연화된 인식론(Epistemology Naturalized)」에서 과학을 비롯한 여러 지식에 해당하는 명제들을 순수하게 경험적인 명제들로 환원하는 경험주의적 환원주의가 실패하므로, 곧 지식 일체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하는 전통적 인식론이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3.3. 과학철학
- 콰인이 제시한 인식론적 전체론은 상기한 바처럼 어떤 명제든 모종의 경험에 의해 반증될 수 있다는 함축을 갖는다. 이는 반대로 그 어떠한 경험적 데이터가 주어진다한들, 적절한 (혹은 Ad Hoc한) 보조가설을 추가하기만 한다면 그 어떤 과학적 가설이든 여전히 반증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즉 경험적 데이터가 아무리 쌓인다 한들, 무엇이 참된 과학적 이론인지는 논리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혹은 "과소결정된다(underdetermined)"). 이는 일찌기 피에르 뒤앙이 지적하기도 했던 사항이므로, 흔히 두 사람의 이름을 함께 따서 "뒤앙-콰인 논제"라고 불린다. 그리고 뒤앙-콰인 논제는 토머스 쿤의 과학철학에 핵심적인 기틀 중 하나가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포퍼는 과학이론의 정당화를 위와 같은 형태로 단순화한다. 그리고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과학이론이 감각경험에 의해 입증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위의 추론이 후건긍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류가 아닌 타당한 논증으로 바꾸어서, 즉 (전제1)의 전건과 후건을 위치를 바꾸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정당화의 문제를 (전제1)의 정당화 문제로 바뀌는 것에 불과하다. 즉, (전제1)의 주장을 '현상 P가 관찰되면, 어떤 가설 H가 참이다'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현상 P가 관찰되면, 가설 H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부담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에 포퍼는 논리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과학적 추론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추론만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전제1) 어떤 가설 H가 참이라면, 현상 P가 관찰될 것이다.
(전제2) 현상 P가 관찰될 것이다.
(결론) 따라서, 가설 H는 참이다.
포퍼의 형식화가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현상 P가 관찰된다면, 가설 H는 반박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H가 참이라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 판단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후건긍정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현상 P가 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가설 H는 논박된다. 가설 H가 논박된다면 과학자들은 논박되지 않는 새로운 가설을 고안해야 할 것이다. 포퍼는 현재 우리의 가진 과학 지식이 수많은 논박의 시도로부터 살아남은, 신뢰할 만한 지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과학이 이러한 추측과 논박의 과정을 통해서 성장해왔다고 주장한다.(전제1) 어떤 가설 H가 참이라면, 현상 P가 관찰될 것이다.
(전제2) 현상 P가 관찰되지 않는다.
(결론) 따라서, 가설 H는 거짓이다.
그런데, 콰인의 인식론적 전체론의 측면에서 포퍼의 주장은 불완전하다. 실제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어떤 현상을 예측하는데 단순히 가설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설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정의하고 있는 과학이론 T,[3] 그리고 보조가설들(h1, h2, ... )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설 H를 전자(electron)의 본성에 대한 명제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현상 P를 관찰하려면, 가설 H가 가진 의미를 오독하지 않도록 가설 H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들을 정의하는 과학이론 T가 있어야 한다. 또한, 현상 P를 관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관측장비들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 관측장비를 사용하는 실험절차가 오류없이 꼼꼼하게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그러면, 위의 추론은 다음과 같이 변화한다.
위의 논증은 타당하다. (전제1)의 전건은 '가설 H가 참이고, 과학이론 T가 참이고 관측장비에 오류가 없고 실험절차에도 오류가 없다'는 연언 문장이었으므로, 후건 부정에 의해서 전건이 부정되면, '가설 H가 거짓이거나, 과학이론 T가 거짓이거나, 관측장비에 오류가 있거나, 실험절차에 오류가 있다'는 선언 문장이 도출되기 때문이다.[4] 이것은 관찰을 통해 임의의 가설을 반증하려고 할 때, 무엇이 반증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증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네 가지 것들이 모두 참인 것은 아니라는 것 뿐이다.(전제1) 가설 H가 참이고, 과학이론 T가 참이고 관측장비에 오류가 없고 실험절차에도 오류가 없다면, 현상 P가 관찰될 것이다.
(전제2) 현상 P가 관찰되지 않는다.
(결론) 따라서, 가설 H가 거짓이거나, 과학이론 T가 거짓이거나, 관측장비에 오류가 있거나, 실험절차에 오류가 있다.
토머스 쿤은 과학지식이 패러다임 의존적임을 주장한다. 이것을 콰인의 논제와 연결시켜서 생각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위의 추론에서처럼 경험이 반증되는 상황에서 당대에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과학이론을 의심하지 않는다. 즉, 반증된 것이 이론인지 혹은 다른 보조가설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현재까지 참으로 인정하는 패러다임(과학이론 T)을 의심하지 않고, 시험 대상이 되는 가설 H나 보조가설이 거짓일 것(관측장비에 오류가 있거나, 실험절차에 오류가 있다)이라고 추론한다는 것이다.
3.4. 형이상학 / 수리논리학
- 1936년 논문 "규약적 참(Truth By Convention)"에서 논리적 참이 논리상항의 규약적 의미에 의해 참이 된다는 입장에 대한 영향력 있는 반론을 제시했다. 이는 이후 '분석-종합' 구분을 비판하는 것의 토대가 됐다.
- 1937년에 집합론의 한 형태인 "새 기초론(New Foundations)"를 제안했다.
- 1948년 발표한 「있는 것에 관하여(On What There Is)」에서 "$$x$$는 있다" 혹은 "$$x$$는 존재한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이론 $$T$$가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예. 최첨단 물리학)이라고 가정하고, $$T$$의 모든 명제들을 1차 술어 논리 언어로 번역하자. 이때 "$$x$$는 존재한다"는 것은 곧 $$x$$가 $$T$$의 각 명제들이 참이 되기 위한 변항의 값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 이를 두고 흔히 "$$T$$가 $$x$$에 존재론적으로 개입한다(ontologically commit)"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입장은 흔히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란 곧 변항의 값이 되는 것이다(To be is to be the value of a variable)"라는 말로 압축적으로 표현된다.
- 예를 들어 최선의 이론 가운데 '$$\exists x (Fx \wedge Gx)$$'라는 명제가 포함될 경우, 변항 $$x$$에 할당된 것이 없으면 해당 명제는 참이 될 수 없으므로, 곧 $$x$$의 값은 존재한다.
- 위와 같은 방법론에 입각하여 콰인은 오직 물리적 대상들, 그리고 집합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전통적인 '보편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명론적 입장을 취했다.
- 같은 맥락에서 고전 1차 양화 논리를 제외한 다른 논리 체계들을 배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차 논리를 두고 "양의 탈을 쓴 집합론"이라고 부른 것이 유명한 사례.
4. 기타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독서 파트에서 논리실증주의자, 칼 포퍼와 함께 나와서 '''매우 반가움'''을 선사하였다. 2020년도 PSAT 언어논리 제시문으로도 나와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프로그래밍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자기 자신의 소스 코드를 출력하는 프로그램을 '''콰인'''이라고 한다. 이 프로그램을 지칭하는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 탓에 프로그래밍 관련 문서에 걸려 있는 링크가 이 문서로 리다이렉트된다. 초보 프로그래머에게는 상당히 난이도가 있는 프로그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