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실증주의
한자: 論理實證主義
독일어: Logischer Positivismus
영어: Logical Positivism
1. 소개
1920년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 등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 사조. '''논리 경험주의(Logischer Empirismus)'''와 비슷한 말로 쓰이기도 한다.[1] 이후 분석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지만, 바로 그 사상적 적자에 의한 혹독한 비판 끝에 결국 철학사의 영역에 접어들게 되었다. 1920년대 독일어권의 여러 철학자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빈을 중심으로 한 '''빈 학파(Wiener Kreis)'''가 유명하다.
2. 구성원 및 형성 과정
빈 학파는[2]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빈'''을 중심으로 한 여러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로 구성되었으며, 흔히 그 시작은 루트비히 볼츠만과 에른스트 마흐의 뒤를 이어 빈 대학교의 귀납과학의 철학 교수 자리에 부임하게 된 모리츠 슐리크가 한스 한, 오토 노이라트, 필립 프랑크 등과 함께 토론 모임인 "에른스트 마흐 학회"를 결성한 시점으로 본다. 그리고 루돌프 카르납, 헤르베르트 파이글, 쿠르트 괴델 등이 합류함에 따라 이후 잘 알려진 '''"빈 학파(Wiener Kreis)"'''라는 이름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급변하는 오스트리아 지성계 가운데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칸트 이후 서양 철학사의 흐름 상당부분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초 당대 과학에 미루어볼 때 매우 뒤쳐져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철학은 현대 과학에 적극적으로 입각하는 방식에 따라 탐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고틀로프 프레게, 버트런드 러셀 등이 고안한 현대 논리학은 이런 연구 방식의 핵심적인 도구가 되었다.
빈 학파는 한스 라이헨바흐, 칼 구스타프 헴펠 등이 주도한 베를린 학파(Berliner Gruppe) 또한 빈 학파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며 활발한 교류를 펼쳤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철학 학술지 『에어켄트니스(Erkenntnis)』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어권 바깥에서도 논리학자 알프레트 타르스키로 유명한 르보프-바르샤바 학파(Szkoła lwowsko-warszawska), 영국의 알프레드 에이어나 프랭크 램지, 미국의 윌러드 밴 오먼 콰인 등 또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3. 주요 철학적 입장
논리 실증주의에 대한 철학사 연구가 진척이 될수록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다. 왜냐면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마다 구성원들 간에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가 산재했으며, 더욱이 시대에 따라 그 의견들 또한 변모했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기 때문이다.철학적 작업의 과제는 문제와 주장을 명료화 하는 것이지, 특별한 "철학적"인 이론을 내세우는 게 아니다. 그 명료화의 방법이란 바로 '''논리적 분석'''이다.[3]
--
「과학적 세계 이해: 빈 학파(Wissenschaftliche Weltauffassung: der Wiener Kreis)」 中
아래에 소개될 여러 입장 중 상당 부분은 그렇기 때문에 실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의견을 역사적으로 정확히 대변했다기보다는 이후 철학계에서 주목한 논리 실증주의의 특정한 면모에 해당할 수도 있다.
3.1. 칸트의 선험적 종합 거부
이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임의의 판단이 경험의 필요 여부에 따라 선험적이거나 후험적일 수 있고, 다른 한편 그 내용이 확장적인지 여부에 따라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일 수 있다고 봤다. 그중에서도 칸트의 핵심적인 주장은 '''선험적인 동시에 종합적인 판단이 있다'''는 것이었으며, 그 사례로 칸트는 수학을 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하지만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러한 선험적 종합판단이 있다는 것을 거부했다. 논리학이 분석적이라고 가정하는 한 수학은 현대 논리학으로 분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분석적이며,[4] 또한 자연법칙 일체는 오직 경험과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후험적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즉 논리 실증주의에 따르면 '선험적=분석적'인 동시에 '후험적=종합적'이므로 곧 '선험적 종합판단'은 모순이 된다.
3.2. 검증주의 의미관과 형이상학 배격
논리 실증주의의 대표적인 면모는 어떤 명제가 주어졌을 경우, 그게 '''유의미'''한지 아니면 무의미한 사이비 명제에 불과한 건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흔히 '''검증 원리'''라고 불린다. 검증 원리의 구체적 형태로는 다양한 안이 제기되었으나, 그 가운데 가장 단순한 형태는 거칠게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우리는 지성을 통하여 진척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분야에 매달린다고 형이상학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형이상학자가 만들어내는 문장의 경우, 문장이 문자적으로 유의미할 수 있는 조건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5]
--
알프레드 에이어, 『언어, 참, 그리고 논리 (Language, Truth and Logic)』, p. 15
- 명제 P는 유의미하다. iff#s-1
- 명제 P는 분석 명제다.
- 명제 P는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다.
'''형이상학적 명제'''야말로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여긴 무의미하다고 여긴 대표적인 예시였다. 이런 명제는 심오해보일지언정 수학처럼 엄밀하게 풀리는 것도, 경험적으로 관찰하여 참 여부를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루돌프 카르납은 다음 문장을 사이비 진술의 대표적인 사례로 봤다.[6]
카르납이 보기에 이런 문장은 겉으로 보면 멀쩡해보일지언정, 면밀히 논리적으로 살펴보면 그저 무의미한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형이상학적 문장은 미신이나 도시전설 같은 거짓 주장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애초에 거짓조차 아니기 때문이다.무는 스스로 무화한다(Das Nichts selbst nichtet)
--
마르틴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3.3. 경험주의적 환원주의
근대 철학사에서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지식 일체가 감각 혹은 지각 내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단초를 제공했다. 이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 독일권의 에른스트 마흐 및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 등을 거쳐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흔히 '''"현상주의(phenomenalism)"'''라고 불리며, 몇몇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당대에 발전하던 현대 논리학에 힘입어 현상주의 환원 모형을 구체화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현상주의적 환원 모형은 여러 결정적 문제점에 부딪힘에 따라 논리 실증주의자들 내부에서도 점차 설득력을 잃어갔으며, 많은 논리 경험주의자들은 보다 잘 알려진 '''물리주의''' 모형, 즉 모든 과학적 지식을 근본 물리학의 진술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모형을 탐구하게 되었다. 이처럼 여러 상이한 과학 분야를 하나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통일 과학(unified science)'''이라는 발상은 논리 실증주의 및 경험주의의 핵심적인 목표가 되었다.사물, 물체, 물질이란 색, 소리 등 이른바 특징이라는 것들이 뭉친 것일 뿐이다.[7]
-
에른스트 마흐, 『감각의 분석에 대한 기고(Beiträge zur Analyse der Empfindungen)』
4. 그 후의 역사
이론철학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도 진보적인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던 빈 학파는 나치즘이 본격적으로 발흥하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부터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였다. 위협을 느낀 논리 경험주의자들은 하나둘씩 외국으로 망명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빈 학파의 리더였던 모리츠 슐리크가 자신의 제자 요한 넬뵈크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결국 안슐루스 이후로 논리 실증주의는 오스트리아에서 자취를 감췄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살아남은 논리 경험주의 철학자들 다수가 새로이 자리를 잡은 곳은 미국이었다. 미국 전역의 여러 대학 철학과에서 교편을 잡은 독일어권 철학자들은 곧 미국 철학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했으며, 이들이 길러낸 제자는 이후 분석철학 전통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후예가 현대 철학의 핵심적인 조류를 이루게 된 것과는 별개로, 상기한 논리 실증주의 철학 '''자체'''는 바로 그 후예들의 공격 끝에 20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빈까지 직접 유학을 와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던 윌러드 콰인은 논리 실증주의 언어철학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을 제시하였고,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원대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국제 통일과학 백과사전』 가운데 한 권으로 기획되었던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얄궂게도 논리 실증주의 과학철학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작업이 되었다. '분석철학의 역사' 항목 참조
따라서 현대의 분석철학은 논리 실증주의의 이념은 계승했을지언정 더이상 그 핵심적인 주장들을 받아들이지는 않게 되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대표적인 논리 실증주의자 중 하나였던 알프레드 에이어가 말년에 남겼다고 알려진 인터뷰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논리 실증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요. 나는 『언어, 참, 그리고 논리』의 많은 부분은 옳다고 보지 않아요. 오히려 실수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썼던 당대엔 일종의 카타르시스적인 효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책이었다고 생각해요. 많은 헛소리를 일소했고, 여러 사람들을 흥분시킴으로써 어느 정도는 철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니까요. 하지만 자세한 내용을 보자면 결국 실수투성이였고, 저는 그 실수들을 고치거나 고치려고 애를 쓰는 데 지난 50년간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8]
5. 타 학파 및 철학자들과의 관계
5.1. 실증주의
비전공자들이 종종 범하기 쉬운 실수는 '논리 실증주의가 철학적으로 논파되었다고? 그럼 과학자들이 따르는 실증주의는 틀린건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실수의 첫 번째 오류는 '''철학 이론'''으로서의 실증주의와 '''느슨한 태도'''로서의 실증주의를 혼동하는 것이다. '느슨한 태도로서의 실증주의'란 과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명시적 혹은 은연 중에 받아들이는 일종의 모호한 믿음 혹은 태도이며, 이는 대충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이는 과학 및 기타 교양을 갖추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절대다수가 받아들이는 태도이며, 논리 실증주의를 논박한 철학자들도 당연히 취한 태도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모호한 '느슨한 태도'인 이상 충분히 엄밀하거나 정교하지 못하며, '철학적 이론으로서의 실증주의'는 이런 느슨한 태도를 보다 엄밀화/정교화하고자 한 시도이다.[9] 논리 실증주의 같은 '철학적 이론으로서의 실증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이 곧 '느슨한 태도로서의 실증주의' 또한 실패했음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엄밀한 이론이라면 그 참과 거짓을 분명히 따질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느슨한 태도'를 두고서 그게 참인지 거짓인지를 따질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기 때문이다.모든 과학적 탐구는 근본적으로 경험적 증거에 의존해야 한다.
위 실수의 두 번째 오류는 논리 실증주의가 '철학 이론으로서의 실증주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논리 실증주의가 아닌 다른 '철학 이론으로서의 실증주의'도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실증주의의 기원인 오귀스트 콩트의 입장은 논리 실증주의와 구분된다. 빈 학파의 유명한 팜플렛인 「과학적 세계 이해: 빈 학파」에서 '논리 실증주의에 영향을 준 학자들' 가운데 칼 마르크스 등과 더불어 콩트 또한 그 이름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콩트가 실제로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실증주의란 이름을 전해준걸 제외하고는) 희박했다고 여겨지고는 한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콩트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중 누구도 콩트를 중요하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콩트의 이론은 여러 면에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프로그램과는 반대였다.[10]
--
Johan Heilbron. "Auguste Comte and Modern Epistemology"[11]
그리고 논리 실증주의 이후 철학사에서도 '철학 이론으로서의 실증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논리 실증주의의 치명적 결점들을 보완한 여러 실증주의적 이론들이 제시되었으며, 그중 21세기 초 현재 유력한 형태로는 구성적 경험론(constructive empricism)이 있다. 과학적 실재론 항목 참조.콩트 이후 역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실증주의적인 과학적 해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트에게 특별히 경의를 표한 이는 없었다. 결국 그는 기껏해야 논리 실증주의를 예고한 사람으로서나 기억되었다. 그렇지만 논리 실증주의자 본인들은 콩트를 무시했고 그 대신 흄을 자신들의 뿌리로 여겼다.[12]
--
Robert Scharff. "Comte, Philosophy, and the Question of Its History"[13]
5.2. 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러셀은 논리 실증주의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논리 실증주의를 자신의 철학의 계승자로 여기기도 했다. 전간기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러셀의 ''Principia Mathematica''를 사는데 어려움을 느낀 카르납이 저자 할인 가격으로 책을 구할 수 있는지 러셀에게 편지를 보내 문의하자, 러셀이 손수 적은 35쪽 짜리 요약본을 카르납에게 보내준 것은 유명한 일화다.[14]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형이상학 연구에 꾸준히 매진했던 러셀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받아들인 급진적인 경험주의, 이를테면 검증 원리 등에는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절차는 사실 전통 철학보다는 과학의 절차에 더 가깝다. 그런 점에서 나 또한 전적으로 그들과 한 편이다. 나는 그들의 엄밀성, 정밀성, 상세사항에 대한 주의를 높게 평가하며, 보다 넓게 말하자면, 나는 이전 어떤 철학자들이 내놓은 결과보다도 [논리 실증주의자]가 취한 방법을 통해서 내놓은 결과에 대하여 훨씬 더 희망을 품고 있다.[15]
--
버트런드 러셀, 「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5.3.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빈학파의 비공식적인 회합에 종종 참여했으며, 특히 모리츠 슐리크나 프리드리히 바이즈만 등과는 상당히 친밀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는 논리 실증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16] 비트겐슈타인 본인 또한 1920년대 말 - 1930년대 초에는 논리 실증주의의 핵심적 논제인 검증주의 의미론을 받아들이기도 했다.[17]
하지만 어느 시점인가부터 『논고』에서 제시한 자신의 옛 철학적 입장을 의문시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논고』 독회 차 모인 어느 회합에서 뜬금없이 타고르의 시를 낭독했다는 것은 전설적인 일화다. 이후 비트겐슈타인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후기 철학을 전개하고, 논리 실증주의자들 또한 그 입장이 점차 변모해 나감에 따라 두 입장은 본격적으로 갈라지는 데 이르렀다.
5.4. 마르틴 하이데거
상술했다시피 하이데거는 루돌프 카르납 같은 논리 실증주의자가 어그로를 끈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하이데거 본인 또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등에서 현대 논리학에 입각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공격에 강경히 맞선바 있다.
그런데 20세기 전반 철학사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어감에 따라 이들 간의 관계가 훨씬 더 복잡미묘했다는 것이 점점 밝혀지고 있다. 한편으로 하이데거와 논리 실증주의자 상당수는 모두 신칸트주의 철학자들 밑에서 수학했다는 점에서 공통된 배경을 띠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이데거와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비단 철학적으로 대립할 뿐 아니라, 범게르만주의 같은 보수주의 대 마르크스주의 같은 진보주의라는 보다 넓은 사상적/정치적 대립 구도에서도 서로 극명하게 대립했다.
여전히 철학사적으로 연구가 활발한 주제이며, 고전적인 연구서로는 마이클 프리드먼의 ''A Parting of the Ways: Carnap, Cassirer, and Heidegger''을 참고하라.
5.5. 칼 포퍼
칼 포퍼는 빈 출신이었으므로 빈 학파의 여러 학자들과도 상당한 교류를 가졌고, 초기 저작인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은 빈 학파를 통하여 출판되기도 했다. 하지만 포퍼는 귀납추론 및 형이상학의 정당성 등을 두고 빈 학파의 주된 입장과 견해를 달리하였으며, 결정적으로 비트겐슈타인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감을 표시한 것으로 인해 빈 학파 여러 구성원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이후 포퍼는 자신이 바로 논리 실증주의를 "죽인" 장본인이라고 자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