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전한)

 



'''작위'''
중산왕(中山王)
'''시호'''
정(靖)
'''성씨'''
유(劉)
''''''
승(勝)
'''아버지'''
전한 경제
'''생몰기간'''
음력
? ~ 기원전 113년
'''재직기간'''
음력
기원전 154년 ~ 기원전 113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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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경제와 가부인의 둘째 아들이자, 전한제후국 중산국의 첫 왕[1]이다.

2. 생애


한무제 시절, 조조[2]의 정책에 따라 유비[3]가 반발하여 발생했던 오초7국의 난 이후 경제의 뒤를 이은 한무제는 제후왕의 죄를 들추어내어 탄압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한무제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제후왕들을 불러 연회를 열였다고 한다. 이때 중산정왕은 그 자리에서 울었고, 무제가 그 이유를 묻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제후왕에 대한 적극적인 탄압 정책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무제는 중산왕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후에 대한 예를 후하게 했고, 제후왕의 일을 상주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군현제로 가고 있었고, 무제는 왕의 세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들들에게도 봉국을 나누어주게 하는 추은령을 만들어서 제후왕을 약화하는 기조를 계속 이어나갔다.
43년 동안 중산왕의 지위에 있으면서 매우 놀기 좋아하고 여색을 밝혀서[4] 자손이 합쳐서 12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친형 조경숙왕 유팽조는 원래 관리들이 해야 할 일을 빼앗아 직접 자기 봉국을 다스리고 있어서 팽팽 노는 자신과는 양 극단에 있었는데, 그래서 서로 까고 다녔다. 그런데 둘 다 여색 밝히는 건 비슷해서 아들이 징그럽게 많다. 봉토를 받은 아들만 유팽조는 26명이고 유승은 21명이고, 추은령에도 불구하고 모든 왕자가 봉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5] 기록에 남지 않은 아들이 더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냥 한나라 시기의 평범한 황족으로 보이지만 '''촉한 소열제 유비의 조상이 바로 이 사람이라''' 삼국지 덕후들이라면 한 번 쯤 들어봤을 이름이기도 하다.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 유비'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다니는 덕에.... 다만 유비는 적자인 중산애왕 유창의 후손이 아니고 서자인 5남 육성정후 유정의 후손이었고, 유정은 종실 제후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무제가 황실 제사에 쓸 금을 적게 바쳤다는 핑계로 작위를 박탈해서 이후 호족으로 사는 등 그다지 밝은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 흠이다.

3. 기타


1968년 그의 무덤이 허베이성 만성현에서 발굴되었는데,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금루옥의'''(金縷玉衣)[6] 등 많은 부장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금루옥의를 사용하면 유해가 부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전해내려 왔으나 막상 발굴했을 때는 뼛조각 몇 개만 남아 있었다. 참고로 그의 무덤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참호공사를 하던 중 발견이 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시기가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온 중국 대륙에 휘몰아치던 시기인지라 홍위병에 의해 파손될 뻔 한 것을 저우언라이가 비밀리에 학자들을 초청해 발굴작업을 하였고, 그의 무덤은 전혀 도굴되지 않았기에 어마무시한 양의 유물들이 나와 모두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렇게 극적으로 보존된 그의 무덤과 부장품들은 한나라 시기 황족들의 무덤을 연구하는데 큰 자산이 되고 있다. 그리고 후손이 중국에서 유명한 한소열제 유비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의 무덤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유승 입장에서는 생전에 아버지를 잘 만나 일생을 편히 살았고 게다가 사후에도 후손을 잘둬 영광까지 얻었다.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 그런데 학자들이나 삼국지 덕후들이 더 놀라는데, 그 이유는 유승의 묘가 있는 지역은 후한~삼국 당시 기주 지역으로 당시 조조조비의 위나라가 지배하던 지역인데 도굴에 환장하는 조조위나라가 필생의 라이벌이자 그토록 증오하는 유비의 조상인 유승의 무덤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7]
[image]
유승의 금루옥의

4. 둘러보기


'''중산국의 역대 국왕'''
신규 책봉

'''1대 정왕 유승'''

2대 애왕 유창
[1] 중산국은 원래 조나라의 지군인 상산군의 일부였는데, 오초7국의 난 직전에 상산군을 조나라에서 회수하고, 난 직후에는 상산군을 분할해 새로 왕국으로 세우고 유승에게 준 것이다.[2] 삼국지조조와는 동명 이인이다.[3] 이 사람의 후손인 삼국지유비와는 동명이인이다. [4] 한무제는 강력한 경쟁자이며 제위 계승의 라이벌로 지목되던 이복형 중산정왕 유승을 계속 의심하였는데, 유승이 이 의심을 피하고자 일부러 주색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 한무제의 칼날을 피해갔다는 설도 있다. 다만 여색을 밝히기도 하였으나 전형적인 탐관오리는 아니고 상당히 머리가 좋았던 것 같다. 제후왕의 일화나 한무제가 다른 형들도 아닌 바로 위의 형인 유승을 견제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말이다.[5] 예를 들면, 하간혜왕 유량은 하간효왕 유원의 아들이나 왕이 되기 전에는 작위가 없이 상군고령이라는 작은 관직을 지내고 있었다.[6] 옥 조각을 금실을 이용해 엮어 만든 일종의 수의, 후한서 예의지의 기록에 따르면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실의 종류를 금-은-동으로 구분하였으며 금실은 오직 황족만이 쓸 수 있었다.[7] 다만 잘 몰랐을 수도 있다. 이미 죽은 지 수백년이 지났고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천여년 동안 도굴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면 존재가 잊혀졌기 때문이라 보는 게 옳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