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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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日善
1896년 10월 5일 ~ 1987년 6월 22일
프로필
1. 개요
2. 약력


1. 개요


한국인 최초의 병리학자의 한 사람이며#, 한국 최초의 정식 교육을 받은 해부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또한 독일 루돌프 피르호의 제자인 후지나미 교수에게 사사하였다. 본관해평 윤씨이고, 일본 도쿄 출신. 아호는 동호(東湖). 종교는 원래는 천주교였으나, 후에 개신교개종하여서 개신교이다.

2. 약력


윤영렬의 10남 4녀 중 장남인 윤치오의 장남이다. 아버지 윤치오가 일본 유학생 감독관으로 부임했을 때 임지인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 이숙경을 잃고 아버지 윤치오는 김윤정[1]의 딸 김고려와 재혼했다가 현송자하고 재혼하였다.
제2대 서울시장이자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은 사촌 동생인데, 둘째 삼촌 윤치소의 아들이다. 구한 말 육군 기병 중장까지 올라간 윤치성,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내무부장관, 주불대사, 제13대 서울시장 등을 지낸 윤치영은 그의 삼촌, 개화운동가 윤치호는 5촌 아저씨가 된다.
도쿄 출신이지만 그의 본가는 아산시 둔포면 신항1리 새말마을에 있었다.
1914년 조선으로 귀국해서 일본인 학교인 일출소학교[2]경성중학교를 다녔으며, 다시 일본으로 유학해서 오카야마에 위치한 제6고등학교를 거쳐 1919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1923년 교토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윤일선은 그 대학 병리학교실의 부수로 있으면서 후지나미 아키라(藤浪鑑)에게 직접 사사했다. 후지나미는 독일의 저명 병리학루돌프 피르호의 직계 제자였다. 이 루돌프 피르호진화론을 부정하며 자바원인 화석과 네안데르탈인 화석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3]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병리학교실 주임교수로서 병리학 과목을 가르쳤고, 조선의사협회를 조직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조선의보》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교토제국대학 의과대학원 재학 중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에서 교수 제의를 받았지만 사양하고 계속 박사과정으로 진학했다. 그런데 심한 설사로 입원했다가 잘 치료되지 않아 대학원을 중퇴하고 1925년 9월 귀국하여 아산 둔포에서 1년간 요양생활을 했다. 1926년 윤일선이 회복되자 후지나미 교수의 주선으로 경성제국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후지나미 교수가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 학장인 시가(志賀潔)에게 추천장을 써준 것.
1926년 윤일선은 경성제대 의학과 병리학교실 부수가 되었다. 이로서 한국인 최초로 병리학, 해부학자로 활동하게 된다. 그해 병리학교실 조수가 되었다가 1928년 3월 경성제대 의학과 조교수 발령을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의 제국대학의 교수가 됐다.
1928년부터 30년까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병리학교실 조교수로 있다가 1930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병리학 교수로 갔다. 1935년부터는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있으면서 경성제대 의학부에도 출강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41년 12월 20일, 친일 잡지사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대표 박희도가 주최한 미영타도대좌담회(米英打倒大座談會)에 참석한 바 있는데[4]#, 친일인명사전 등에 등재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지 않는 것으로 보면 일제 협력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경성제대경성대학으로 개편하는데 참여하고 경성대학 의학부 교수, 의과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1946년 정식으로 경성대학이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되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되고, 46년부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원장도 겸직했다.
1954년 서울대학교 제5대 부총장을 거쳐 1956년에는 최초로 학생, 교수들이 대학 총장을 선출할 때 총장으로 선출되어 서울대학교 6대 총장에 당선됐다. 1961년 정년퇴직하고 물러났다가 1962년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로 추대되어 1987년까지 있었다.
한국 학술원의 회원이기도 했고, 한국연구원의 3대 이사장도 지냈다.[5] 일찍 결혼해서 살아생전 4대 후손(손자의 손자)이 태어나는 것도 봤다.[6]
[1]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김구를 재판한 인천항재판소 경무관 김윤정이 이 사람이다.[2] 서울 중구 필동에 소재했으며 1946년 서울 일신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도심공동동화로 인해 1973년에 폐교되었다. 덕혜옹주가 다녔던 학교로도 알려져있다.[3] 피르호의 권위는 대단하여, 그가 병석에 누워있을 무렵인 1906년 무렵부터 네안데르탈인, 자바원인 화석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4] 당시 이 좌담회에는 주최자 박희도를 비롯하여 백낙준·장덕수·신흥우·이용설·정춘수·윤치영·최순주·이훈구 등이 참석했다.[5]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