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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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교육자, 정치인이다.
2. 생애
1902년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면(현 영동읍) 계산리에서 태어났다. 중동학교, 연희전문학교 상학과, 미국 뉴욕 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25년 백남훈·백관수 등과 함께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결성하여 민족주의운동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 이후엔 김도연 등과 연희전문학교 상학과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흥업구락부 사건 연루로 인해 교수직을 사임하였으나, 직후 회계과장에 임명되었다. 1942년 9월 당시에는 이인과 함께 조선흥업주식회사(朝鮮興業株式會社) 감사를 겸하기도 했다.#
한편,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된 바 있으며[1]#, 같은 해 12월 '연희전문학교 적화(赤化) 사건'에 연루[2] , 체포되었다가 불기소처분을 받아 풀려났다.#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나, 다만 1941년 12월 20일, 친일 잡지사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대표 박희도가 주최한 미영타도대좌담회(米英打倒大座談會)에 참석하여 미국의 경제 사상을 비판하고 대동아공영권의 이점을 들어 일제의 승리를 점치는 강연을 한 바 있다.[3]# 함께 참석한 장덕수·신흥우·정춘수·윤치영은 최순주와 함께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었던 자들인데,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표적 인사들이다. 이로 미뤄 보아, 최순주도 이들과 함께 흥업구락부 사건을 기점으로 실질적으로 친일 전향을 한 것은 사실이나, 그 밖에 참석한 윤일선·이훈구처럼 친일인명사전 등에 등재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지 않는 것으로 보면 일제 협력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8.15 광복 후, 1948년 10월부터 1950년 4월까지 한국은행의 전신 조선은행 총재를, 1950년 4월부터 1951년 3월까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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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충청북도 영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어서 제3대 국회 전반기 여당 몫의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한국무역협회 회장으로도 선출되었다. 그런데 국회부의장 선출 후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켜서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는 단상에서 무소속 이철승 국회의원에게 멱살을 잡혔다. 국회의원 임기 도중인 지병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치료를 받다 별세하였다.
3. 매체에서
무풍지대에서는 김해권이, 야인시대에서는 윤순홍이 연기하였다. 처음에는 힘없는 목소리로 부결을 선포하다가 이익흥 경기도지사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 최윤식 교수의 곡학아세를 동원하자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는 것으로 묘사된다.
[1] 당시 신흥우·유억겸·윤치영·안재홍·이갑성·오화영·정춘수·최두선·김준연·최현배·허정·윤치호·김양수·이기붕·서민호·신석구·장덕수·이강래 등 55명이 검거되었으며, 불기소처분을 받은 백남칠(白南七)을 제외한 54명은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2400원의 국방헌금을 지불하고서야 기소유예로 석방될 수 있었다. 위 사람들 중 신흥우·유억겸·윤치영·정춘수·장덕수 등은 이후 실질적으로 변절한다.[2] 당시 연희전문학교 회계과장으로 있었다.[3] 당시 이 좌담회에는 주최자 박희도를 비롯하여 백낙준·장덕수·신흥우·이용설·정춘수·윤치영·윤일선·이훈구 등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