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평 윤씨
[clearfix]
1. 개요
관향은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10] 이다. 시조는 고려 고종~원종 시기의 무신이었던 윤군정(尹君正)이며, 그 손자인 윤석(尹碩)이 충숙왕 때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져 본관이 해평이 되었다고 한다.
인구는 2015년 기준 불과 32,091명으로, 전체 본관별 인구수에서 202위, 윤씨 중에서는 파평 윤씨, 칠원 윤씨, 해남 윤씨에 이은 4위이며, 70만 명이 넘는 파평 윤씨에 비하면 희성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한미한 가문은 아니었고 조선시대 내내 꾸준히 정승, 판서, 부마 등을 배출하긴 했으나, 기본 인구가 워낙 적은 편이라 그나마 알려진 조선시대의 유명인은 윤두수, 윤근수 형제와 윤두수의 고손녀이자 김만중의 어머니인 윤씨 정도.
윤군정의 증손 대에서 소수인 문영공파(文英公派)와 다수인 충간공파(忠簡公派)로 나뉘었고, 문영공파는 8세에서 4개 분파로 나뉘고 충간공파는 13세에서 16개 분파로 나뉘어 총 20개 분파가 현존한다. 특히 이 중 충간공파에 속하는 5개 분파는 선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오음공(梧陰公) 윤두수(12세)의 후손으로 번성하여 따로 오음공파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오음공파에 속하는 치천공파(稺川公派)[11] 와 도제공파(都制公派)[12] 에서 아래에서 설명하는 구한말부터의 유력 가문이 탄생했다.
경상도가 관향이지만 의외로 경상도에는 드물고, 충청도 쪽에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충청북도에 더 많이 산다.[13] 파평 윤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으나 파평 윤씨와는 무관하고 분파는 더더욱 아니다.[14][15]
2. 가문 번성
이처럼 비교적 인구도 적고 평범한 양반 가문이었으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갑자기 유력 가문이 되었다. 여기엔 크게 두 갈래가 있다.
2.1. 윤철구 파
문충공 윤용선(尹容善)은 윤두수의 장남인 치천공(稺川公) 윤방의 8대손이자 내각총리대신 및 의정대신(영의정에 해당)을 여러 차례 역임한 정계의 원로였다. 그런데 윤용선에게는 친아들이 없었고, 이에 윤위선(尹爲善)의 아들인 윤철구(尹徹求)가 그의 양자로 입적하게 되었다. 윤철구는 진사시에만 합격하였을 뿐 변변한 관직을 가진 적도 없는 사람이었으나 엄청난 양부를 모신 것이 신의 한수가 되어 윤철구의 차남[16]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순종)의 계비로 책봉되었고, 훗날 순정효황후가 되면서 국구(황제의 장인)가 된 윤택영은 해풍부원군에, 그 아버지인 윤철구는 영돈녕부사에 봉해졌다. 이에 윤철구의 두 아들 윤덕영·윤택영 형제는 황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윤철구의 장남 윤덕영은 한일합방조약 당시 황제를 겁박하여 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어전회의를 엿들은 조카딸 순정효황후가 치마폭에 감추고 내어주지 않는 옥새를 강제로 빼앗아 합방조약문에 찍게하는 등 합방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경술국적 타이틀을 얻었다. 이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윤덕영 자신은 자작 작위를, 동생 윤택영은 순정효황후의 아버지로서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이 되어 열심히 친일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윤덕영은 1940년 중추원 부의장에 오름으로써 친일의 정점을 찍었다.[17]
그러나 현재까지도 번창한 아래 윤취동 파와 달리, 황실의 외척으로서 나라를 팔아 받은 조선귀족 작위와 은사금으로 떵떵거렸던 윤덕영·윤택영 형제는 그냥 몰락했다. 심지어 윤택영은 낭비벽이 너무 심해 그 많은 은사금을 다 날리고 파산 선고를 받고 후작 작위를 잃어버리기까지 하였고,[18] 빚쟁이에게 쫓겨 베이징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객사했다.
다만 윤택영의 장남인 윤홍섭은 참의원직을 주겠다는 일제의 회유도 물리치고 빈곤하게 살면서도 아버지의 후작 작위 승계를 거부하였으며, 누이인 순정효황후로부터 10만 원을 얻어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는 등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이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는 등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으며 독립운동가가 되어 집안의 체면을 살렸다. 광복 이후에는 아래에 언급된 먼 친척들인 윤치영, 윤보선 등과 함께 한민당을 창당했고, 숙명학원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2.2. 윤취동 파
한편 이들과는 촌수거리가 좀 먼, 윤두수의 차남 도제공(都制公) 윤흔의 6대손인 윤취동(1798. 7. 18. ~ 1863. 12. 21.)이란 인물이 있었다. 말이 양반 가문이지 그의 아버지 윤득실 대에는 가세가 많이 기울어 직접 나뭇짐을 지고 농삿일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품이 후하고 성실했던 윤취동은 고향인 천안에서 아산으로 온 뒤 열심히 농토를 개간해 결국 아산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가세를 다시 일으켰다. 이후 관직에 진출하여 본인은 중추부지사가 되었을 뿐더러, 모은 재산으로 교육시킨 두 아들 윤웅렬과 윤영렬은 각각 대한제국 군부대신(지금의 국방장관)과 자헌대부로 출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윤웅렬과 윤영렬은 자식을 매우 많이 두었고, 윤취동이 모은 재산과 남다른 교육열로 이들과 이들의 후손들 또한 대부분 유력인사가 되었다. 이들 중 나무위키에 개별 문서가 있는 인물들만 해도 윤치호, 윤치성, 윤치영, 윤보선 등이 있다.
윤취동의 주요 자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장남 웅렬(1840. 5. 18. ~ 1911. 9. 22.): 해당 문서 참고. 대한제국 군부대신.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으로 남작 작위를 받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고 1년 만에 죽었다(…). 여러 여자와의 사이에 총 5남 2녀를 두었는데, 윤치호는 두 번째 부인 전주 이씨 소생이고 윤치왕·윤치창은 측실 김정순 소생이라 나이차이가 꽤 크다.
- 장남 치호(1865. 1. 23. ~ 1945. 12. 9.): 해당 문서 참고. 자손들은 정치가, 예술가, 기업가, 학자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다. 3남 윤광선이 남궁억의 딸과 결혼하여 그와 사돈 관계가 된다. 증손녀 윤순명은 방응모의 증손자[19] 인 방상훈 현 조선일보 대표와 결혼했다.
- 3남[20] 치왕(1895. 2. 17. ~ 1982. 12. 21.):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를 졸업하여 의사가 된 뒤 군의관으로 소장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대한민국재향군인회를 창설했다. 의사이자 의학자로서 대한민국 의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세브란스 병원 2대 원장을 맡기도 했다. 자손들은 대부분 학자, 기업가, 정치가가 되었다.
- 4남 치창(1899. 3. 5. ~ 1973. 10. 1.): 시카고 대학교에서 유학한 뒤 기업가, 외교관 등으로 활동했으며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 이사를 맡기도 했다. 손원일 제독의 매형이다. 탤런트 남궁원, 전 외무부 장관 김동조와도 사돈관계가 된다.
- 차남 영렬(1854. 4. 15. ~ 1939. 11. 4.): 대한제국 자헌대부. 형과는 달리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 만년에는 가난해졌지만 차남 윤치소의 재산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조카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치소가 아니었다면 삼촌은 진작에 굶어 죽었을 것"(…)이라는 패드립을 날렸으며, 학식이 없다고 까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리분별력과 수완은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한 명의 본처(한진숙)와 두 첩과의 사이에서 총 9남 5녀를 두었으며, 아래의 아들들은 모두 본처 소생이다.
- 장남 치오(1869. 9. 10. ~ 1950. 12. 22.)[21] : 계몽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자손이 굉장히 많은데, 장남인 윤일선은 의사로 서울대학교 총장 등을 지냈으며 나머지 자손들도 대부분 의사나 예술가가 되었다.
- 차남 치소(1871. 8. 25. ~ 1944. 2. 20.): 정치가, 기업가. 이병도의 겹사돈이다. 일찍부터 이재(理財)에 밝아 윤영렬이 집안 재산 관리를 그에게 맡겼으며,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 100칸이 넘는 안국동의 윤보선 자택도 그가 지은 것이다. 이 사람도 자손이 많다. 장남이 대한민국의 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며, 차남 윤완선의 외증손자가 음악인 남궁연이고, 삼남 윤원선은 흥선 대원군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5남 윤택선은 자식이 없었던 윤치병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그의 아들 윤창구는 KIST 교수를 지냈다. 나머지 자손들도 대부분 정치가, 학자, 목사 등이 되었다.
- 3남 치성(1875. 4. 7. ~ 1936. 8. 11.): 해당 문서 참고. 이 사람도 자손이 많으며 대부분 언론인, 기업가, 학자 등이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차남 윤달선은 (대부분 개신교였던 이 집안에서) 조계종 승려가 되었다. 윤치성 문서 참고.
- 4남 치병(1880. 7. 10. ~ 1940. 1. 24.): 관료였으나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관직을 사퇴하며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
- 5남 치명(1885. 10. 27. ~ 1944. 4. 21.): 윤치병과 함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아산시에서 교육자로 살았다. 아들 윤유선은 세브란스 병원 원장, 국립보건원 원장 등을 지냈다.
- 6남 치영(1898. 2. 10. ~ 1996. 2. 9.): 해당 문서 참고. 자손들은 주로 교수가 되었으며, KBS의 윤인구 아나운서가 손자다. 인촌 김성수의 사돈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살짝 야사 삘나는 뒷이야기가 있다. 윤취동의 아버지 윤득실은 없는 살림에도 거지들을 구제하고 어려운 이를 보살폈는데, 시주받으러 다니다가 굶고 쓰러진 승려를 데려다가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승려는 이에 보답하고자 이순신 장군의 묘 아래를 가리키며 그곳에 조상을 모시면 후손이 잘될 거라고 일러주었고, 후에 윤취동은 아버지 득실을 그곳에 몰래 암장했다.[22] 심지어 그 승려는 만약 들키면 몰랐다고 잡아떼라고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는 가세가 다시 서고 자손이 번성하고 출세했다는 것이다.
[image]
다소 씁쓸하게도, 저 격랑의 시대에 저런 유력 가문이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저 가계도의 적지 않은 인물들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물론 끝끝내 친일을 거부한 윤보선이나 독립운동가들도 많다. 아버지(윤택영)는 친일파, 아들(윤홍섭)은 독립운동가인 등, 가까운 친척 간에도 한쪽에서는 조선귀족 작위를 받아 떵떵거리고 한쪽에서는 일제에 협조를 거부하고 조용히 살기도 했다. 절묘하게도 윤치호 삼형제는 각각 일본/ 영국/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각각 친일, 친영, 친미파가 되었다. 가공할 분산투자인 셈이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다른 네임드(?) 친일파 가문인 여흥 민씨(그래도 일부는 독립운동을 했음 대표적으로 민필호,민영익 일부), 전주 이씨(왕공족 등 일부) 등은 조선귀족 작위와 일제 은사금으로 아무 생각없이 놀고 먹다가 일제의 패망과 함께 사이좋게 망한 사람이 많은 반면에, 윤취동의 후손들은 기본적인 경제관념과 교육열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가 기업가, 학자, 의사 등으로 출세하여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위세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후일 더 까이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는 애초에 가세의 근원이 은사금 등이 아니라 대부분 윤취동 개인이 축적한 부(富)와 교육열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윤치왕의 경우 1910년대에 사비로 영국 유학을 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일 뿐더러 유학 시절 1년에 5천원 정도를 썼는데, 이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2억 5천만 원'''이 넘는 액수다. (참고로 당시 조선총독부 국장급의 월급이 80원 정도였다.) 이렇게 집안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일제에 협력을 거부한 윤치명·윤치병 같은 인물들도 생활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3.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4. 나무위키에 문서가 존재하는 실존 인물
4.1. 12세손
4.2. 20세손[24]
4.3. 21세손[25]
4.4. 22세손[26]
4.5. 23세손[27]
- 윤인구: KBS 아나운서
4.6. 24세손[28]
- 해풍부원군 윤택영: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장인, 관료
- 윤덕영: 대한제국 관료, 경술국적, 일제강점기 중추원 부의장
- 윤극영: 동요작곡가, 아동문학가
- 윤세영: 태영그룹 회장, SBS 설립자
- 윤주영: 전 무임소 · 문화공보부 장관, 전 국회의원, 사진작가
4.7. 25세손[29]
4.8. 26세손[31]
4.9. 27세손[32]
4.10. 28세손[33]
[1] 'O렬(烈)' 항렬.[2] '치(致)O' 항렬.[3] 'O선(善)' 항렬.[4] 'O구(求)' 항렬.[5] 'O영(榮)' 항렬.[6] 'O섭(燮)' 항렬.[7] 'O로·노(老)' 항렬.[8] 'O진(鎭)' 항렬.[9] '홍(洪)O' 항렬.[10] 길(吉)씨와 같다.[11] 윤두수의 장남 치천공 윤방의 후손[12] 윤두수의 차남 도제공 윤흔의 후손[13] 다만 유명한 집성촌은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에 있으며 윤보선의 고향도 이곳이다. 이곳이 바로 윤취동이 재력과 토지를 구축한 곳, 즉 그의 본진이였기 때문.[14] 실제로 윤씨의 4분의 3 가량이 파평 윤씨 또는 그 분파(남원 윤씨, 함안 윤씨 등)에 속하나, 해평 윤씨는 파평 윤씨와 상관이 없다. 더구나 이들의 관향인 파평은 경기도 파주, 해평은 경상도 구미에 있는 지명으로 서로 '평(平)' 자만 우연히 겹칠 뿐이다.[15] 조선시대 당파로 보아도 파평 윤씨는 소론의 대표적 가문이지만 해평 윤씨는 노론이다.[16] 정확히는 삼남이나 작은 형이 일찍 죽어 사실상 차남의 역할을 하였다.[17] 중추원 의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총독 다음 서열)이 겸임하므로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은 부의장이다.[18] 나중에 작위를 회복하기는 하였다. 그 작위는 아래와 같이 장남 윤홍섭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까닭에 차남 윤의섭이 이어받았으며, 윤의섭은 아버지처럼 열심히 친일을 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수록되었다.[19] 단 양자인 조카의 손자이므로 친증손자는 아니다.[20] 불확실하지만 윤치왕의 장교자력표에 생모(김정순)의 차남이라 되어있어 요절한 형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21] 제대로 보면 눈치채겠지만 아버지 윤영렬하고 나이차이가 고작 15년이다. 중3 나이에 득남을 한 셈. 아버지하고 큰아버지 윤웅렬이 14년 조금 안되는데(...).[22] 후에 윤득실 묘는 근처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23] 오음공파의 파조(派祖)이다.[24] 'O렬(烈)' 항렬.[25] '치(致)O' 항렬.[26] 'O선(善)' 항렬.[27] 'O구(求)' 항렬.[28] 'O영(榮)' 항렬.[29] 'O섭(燮)' 항렬.[30] 대한제국의 황후가 대한민국 대통령의 증손녀 뻘이다(...).[31] 'O로·노(老)' 항렬.[32] 'O진(鎭)' 항렬.[33] '홍(洪)O'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