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애전
1. 개요
銀愛傳(은애전)
이덕무(李德懋)에 의해 저술된 조선 후기 한문 소설로, 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에 실려있다. 실제 살인 사건의 전말과 그 법적 처리 결과를 다루어 일종의 르포르타주로 볼 수 있다.
1790년(정조 14) 정조가 옥안(獄案)을 심리하다가 김은애(金銀愛)와 신여척(申汝倜)을 살리게 하고, 사건의 전말을 알리기 위해 이덕무로 하여금 전을 짓게 하여 내각의 《일력(日曆)》에 싣게 하였다고 한다.
2. 김은애 사건
김은애는 전라도 강진현에 살고 있는 몰락한 양반집의 딸인데[1] , 이웃집에 사는 퇴기[2] 노파 안 씨는 험악하고 말을 함부로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안 씨는 평소 은애네 집에서 많은 도움을 얻고 살고 있었는데, 은애네 집에서 자주 도와주다 보니 이를 권리로 알고 흡족하게 도움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앙심을 품었다. 그것도 모자라 은애의 어머니에게 한 소리 듣자 열받아, 남편에게 은애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라고 한다.
그러나 입 가볍기로 유명하던 안 노파의 남편조차도 아내의 이런 계략에 기막혀 화를 내면서 "규중 처녀의 정절을 모함하지 말라"고 하자[3] 아예 자신이 직접 혼인 적령기 처녀였던 은애의 정절을 모함하였다.[4] 이 과정에서 안 노파는 자신의 친척 남자아이인 정련까지 이용했으니, 상당한 악질이었다. 정련은 시누이의 손자로 15세 정도였고 평소부터 은애를 맘에 들어했다. 안노파는 이를 알고 정련을 꾀어 중매를 서줄것이니 대신 은애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떠들라 사주했다. 게다가 안노파는 평소 피부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 일이 성사되면 피부병 치료약값을 대달라고 거래를 했다. [5] 이 악소문에 은애는 혼삿길이 막힐 지경이 되었으나, 다행히 마을의 마음씨 고운 김양준이라는 청년이 은애의 결백을 알아주고, 은애와 결혼한다.
은애가 간신히 시집간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안 노파는 무려 2년 동안이나 나쁜 소문을 내고 다니며 은애를 못살게 굴고, 그 도가 지나쳐 은애의 남편의 명예까지 실추되었다. 격분한 은애는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어, 결국 부엌칼을 들고 안 노파의 집으로 쳐들어가 노파를 마구 찔러 살해한다(一刺卽一罵 凡十有八刺 : 한 번 찌르고 한 번 꾸짖기를 '''18번'''이나 하였다). 이 부분의 묘사가 상당히 살벌한데, 저항하는 것을 뿌리치며 어디를 어떻게 찔렀는지를 자세히 적고 있다. 나중에 관아에서 검시를 할 때도 옷이 피로 물들어 원래 색깔을 알아볼 수 없었다고 나온다.
놀랍게도 조사 과정에서 안 노파는 상당히 건장한 체구라고 언급되며, 가냘픈 18세 새댁인 은애가 어떻게 안 노파를 살해했는지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단 안 노파는 막 잠을 자려던 차였고, 은애의 갸날픈 체구를 보고 기세등등해 찌를테면 찌르라고 도발했다. 안노파 입장에서는 체격 차이도 났고 어디까지나 은애가 협박용으로 칼을 들고 왔다고 방심했던 것이 죽음을 부른 셈. 게다가 은애가 그 말을 듣고 칼로 먼저 찌르자 안노파가 거세게 저항했다고 한다. 은애는 안 노파가 자신을 모함하는 일에 가담했던 정련까지 살해할 생각으로 그의 집으로 달려가다가, 그런 그녀를 발견한 정련의 어머니가 눈물로 애원하며 말리자 그만둔다. 당시 은애의 나이는 고작 낭랑 18세.
은애는 관가에 끌려가서 문초를 받을 때 두려운 빛도 없이 규중 처녀로서 모함을 받은 자기의 원통함을 이야기했으며, 자신이 모함당할 때 관가에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음을 호소했다. 이어 "사람을 죽인 죄는 달게 받겠으니, 정련도 사람을 모함한 죄로 때려 죽여달라"고 요구한다.
관청에서는 이 사건을 자세하게 조사하여, 은애를 옥에 가두고 칼(枷)과 나무수갑(拲)과 족쇄까지 단단히 채워서 가두고[6] 사건을 상부에 올리어 심의하게 했다. 채제공(蔡濟恭)은 "원통한 정황을 이해하더라도 살인을 용서할 수는 없다"고 했으나, 국왕 정조는 은애의 행동을 고전에 나오는 열녀들의 행동에 비유하며 정련을 해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사형을 면할 것을 판결한다.[7]
이후 은애는 무죄방면되었고, 정조는 이덕무로 하여금 은애의 이야기를 집필해서 <은애전>으로 만들어 만인이 알게 한다.
3. 신여척 사건
신여척의 마을에 김순창과 김순남이라는 형제가 살았는데, 어느 날 형 순창이 동생 순남을(게다가 환자였다) 밀도둑으로 의심해 실랑이를 벌이다가 급기야 절구로 무지막지하게 팼다. 주변에 전후담이라는 이가 말렸으나 순창은 되려 전후담을 모욕주고 쫒아냈다. 전후담은 이 일을 신여척에게 얘기했고, 분기탱천해 달려가 이 일을 따졌다. 순창이 적반하장으로 대들고 둘이 드잡이를 벌이다가 신여척의 발길질에 순창이 쓰러져 다음 날 사망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 일을 고발하지 않았으나 한달 여를 있다가 발각됐다. 그러나 김은애와 같은 이유로 정조에 의해 방면된다.
4. 설명
사건의 처리 결과를 통해 여성의 정절을 중시하던 당시 시대상, 명문화된 법 이상으로 예교(禮敎)를 앞세워 백성을 통치하고자 했던 당대 지배층의 유교적 통치 철학 등을 엿볼 수 있다.
실제 사건에서는 왕명으로 김은애를 석방한 후 며칠 뒤에 정조가 "내가 은애 너를 석방한 것은 내 백성이 원통하게 죽기를 바라지 않아서였는데, 네가 정련을 다시 죽이면 그 역시 내 백성이 원통하게 죽은 일이기 때문에 내가 너를 석방한 뜻에 어긋난다. 정련이 놈은 내가 제대로 처벌하라고 명을 내릴 것이니, 네가 사사로이 복수하지는 말도록 해라" 라고 은애의 사적 복수를 제지하는 하교를 내린다. 하지만 이후 정련이 어떻게 처벌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천인 신분들이었던 노파 안씨와 정련이 아무리 몰락했다고는 해도 상위계급인 양반 집안의 규수와 그 남편의 명예를 해꼬지 했고 그 탓에 살인 사건으로 발생한 만큼 살해된 안씨가족과 정련의 식솔들은 지역사회에서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경향사족을 제외한 지방 양반들은 점차 몰락해가는 추세였으나 천민이 양반을 대놓고 해꼬지 하고 무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반대의 의견도 있는데, 천민중의 천민으로 취급받았던 퇴기가 몰락했다고는 하나 엄연한 양반댁의 규수를 모함했는데도 몇 년 동안이나 전혀 제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이미 쇠락해가는 양반 사족(士族)들의 위상을 보여준다. 은애가 끝내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친정인 양반 집안은 왜 손을 놓고 있었으며,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그런 모함을 받아 자신의 명예까지 실추되는데 대처하지 못한 것인가? 이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면 양반가문에서 사형(私刑)을 치뤄도 딱히 관아에선 제재를 가하지 않을 일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이렇게 천민인 퇴기가 양반댁의 규수를 모함한다는 것 자체가 양란[8] 이전이나 직후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조 대에 버젓히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지방 양반층의 쇠락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1] 족보에는 여성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여성들도 엄연히 자기 이름을 갖고 있었다.[2] 은퇴한 전직 기생.[3] 여성의 정절을 중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처녀성 여부는 여성의 사회적 가치와 직결되는 문제다. 이런 사회에서 미혼 여성이 문란하며 처녀가 아니라는 것은 여성으로써 가치 절하이며 혼삿길을 막고,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살인이다. 남편은 그런 의미에서 경고한 것이다.[4] 쉽게 말해,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라고 악질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다. 현대 대한민국이라도 이런 소문 나면 좋은 시선 받기 어려운데, 하물며 유교가 도리였던 조선 후기시대에는 치명타였을 것이 당연지사.[5] 참고로 현대에도 이상해, 서세원과 양원경이 이런 수법으로 기자들한테 누구와 잤고, 그런 사이다라고 소문내서 상대와 반강제로 결혼했다.[6] 몇몇 서적에서 춘향전의 고증오류를 지적하며 "여죄수에게는 칼을 씌우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조선 시대 형사처벌 관습상 여죄수에게도 칼을 씌웠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7] 석방되었다는 표현으로 보아 아예 '''무죄'''로 사면한 것이다.[8]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 양란 이후로 본격적인 양반 기득권층의 권위가 실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