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반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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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uyễn Văn Cốc (1943~)'''
1. 소개
2. 혁명가족 출신
3. 조종 유학
4. 첫 격추
5. 베트남전 탑건
6. 북베트남의 에이스들


1. 소개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 상공은 가히 미군 항공력의 독무대였다. 월맹 상공에서 영웅적인 공중전을 치뤄낸 미 공군의 로빈 올즈 대령이나 스티브 리치, 해군의 랜디 커닝햄 같은 에이스의 활약도 눈부셨지만, 그렇다고 북베트남 공군이 조국의 하늘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미군기들에게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사실, 과거 한국 전쟁에서도 UN군 사령부는 F-86의 일방적인 승리만 보도했던 것처럼 베트남 전쟁에서도 적군이었던 월맹군의 성공적인 활약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닫고 있었다.
베트남 상공을 누비고 다니던 미군기를 9대나 격추한 '''응우옌반꼭'''은 이 전쟁을 통틀어 가장 많은 격추 스코어를 올린 에이스이며, 북베트남 공군에는 그 말고도 여러 명의 에이스를 배출했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베트남 공군(Không quân Nhân dân Việt Nam)이 배출한 최고 에이스는 호찌민이 직접 만나 훈장을 달아주며 크게 치하한 응우옌반꼭 대위였다.

2. 혁명가족 출신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조종사는 최고의 엘리트이며, 그중에서도 전투조종사가 되려면 실력도 뛰어나야 하지만 출신 성분 또한 매우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하노이 북서쪽 지방인 박장성(Bắc Giang)의 베트옌(Việt Yên)에서 1943년 12월에 태어난 응우옌반꼭의 집안은 타고난 애국자이자 혁명 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 응우옌반바이는 프랑스 항전 당시 고장의 지방 유격대를 이끌던 대장이었으나,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어 우물 속에 던져져 죽고 말았다. 아버지와 함께 반군 활동을 하던 삼촌 또한 프랑스인들에게 사살되었다. 아버지와 삼촌을 침략자들에게 잃고 고향을 떠나 이사까지 가게 된 응우옌반꼭은 프랑스에, 아니 서양의 압제자들에게 격렬한 증오심을 품고 자라났다.
그런 피비린내 나는 배경에서 성장한 꼭은 고등학교를 졸업[2]하자마자 1961년공군에 자원 입대하게 된다. 그가 이사왔던 집은 바로 추 공군기지 부근이어서 어린 꼭은 활주로에서 뜨고 내리는 군용기들을 보면서 비행을 동경해왔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3. 조종 유학


엄격한 시험을 거쳐 하이퐁 부근의 캇비 공군기지[3]에 있는 비행학교에 입교한 그는 졸업한 후 120명의 동기들과 함께 소련에 조종 유학생으로 파견되어 크라스노다르 현지에서 과거 독소전을 치르고 한반도에도 파견되었던 소련 공군의 베테랑 조종사들에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되고 힘든 훈련을 받았다. 베트남에서도 고르고 골라 선발하여 보낸 120명의 조종 훈련생 중에서 겨우 23명만이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혹독한 코스를 통과하고 교육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그 중에는 응우옌반꼭도 끼어 있었다.
돌아온 그는 공군의 정예부대인 붉은 별 사단(Đoàn không quân Sao Đỏ)에 배속되어 MiG-17을 몰며 탁월한 조종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정예 파일럿으로 선정된 그는 최신예 요격기인 MiG-21의 기종 전환 훈련을 받으러 다시 소련으로 보내졌다. 꼭의 두 번째 유학 생활은 1년이나 되었고, 이번에도 무사히 모든 과정을 수료한 그는 6명의 유학생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1965년 12월부터 실전 부대인 제921전투기연대(Trung đoàn 921)에서 조종사이자 교관을 겸한 생활을 하던 그는 마침내 세계최강이라는 미 공군에 대항하여 요격 작전을 수행해내야하는 어려운 숙제를 안게 된다. 그가 세운 첫 전과는 편대장의 윙맨으로 비행하던 1967년 4월 30일에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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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첫 격추


이날 그는 소련군의 방공 교리에 따라 월맹군 지상 레이더의 통제를 받고 미 공군의 편대에서 낙오된 F-105 전폭기 한 대를 추적해 후방에서 아톨 공대공 미사일을 사격하여 격추시켰다. 이 전과는 그 해에 격추되었던 미군기 6대 중에서 첫 번째였고, 응우옌 반 콕에게도 최초의 격추였다.
놀랍게도, 그의 공식 격추 기록 9대 중에서 3대는 단 하루 만에 격추한 전과이며 전체 전과는 불과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세운 것인데, 공중전을 기피한 북베트남 공군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전적이다. 현재까지 베트남 인민공군이 공식 인정한 그의 전과는 2기의 F-4D, 1기의 F-4B, 2기의 F-105F, 1기의 F-105D, 1기의 F-102, 그리고 2기의 파이어비 무인 정찰기이다. 말하자면 무인기를 뺀 전과는 7대인데, 미 공군은 1967년 11월과 12월에 격추했다는 F-105와 2대의 F-4를 제외하고는 그의 격추를 인정했다. 1대만 포함된 미 해군의 F-4B를 제외하면 전부 미 공군기였다. 이 무렵 꼭은 고작 27세의 나이에 대위 계급에 공군 교관이라는 직위를 가진 거물이 되어 있었는데, 자신의 전과 외에도 다른 조종사 9명이 격추를 직접적으로 엄호하거나 도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5. 베트남전 탑건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에이스가 되어 있었다. 이런 눈부신 전공을 바탕으로 921전투기 연대장과 제371항공사단장을 거쳐 고속으로 승진하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응우옌반꼭은 1988년 5월에는 공군 부사령관, 그리고 1990년 8월에는 결국 중장 계급장을 달고 1996년 6월까지 공군 총사령관을 역임하였다.
이 전쟁 영웅은 2002년에 퇴역했는데, 최근인 2004년에는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해 척추에 부상을 입어 다리가 불편해져 휠체어를 타고 있다.

6. 북베트남의 에이스들


베트남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 중에 미군기를 5대 이상 격추한 북베트남 공군의 에이스는 MiG-17로 7대나 격추시킨 '''응우옌반바이'''(Nguyễn Văn Bảy : 1936~), 꼭과 같은 921연대 소속으로 6대를 격추시킨 '''응우옌득소앗'''(Nguyễn Đức Soát : 1946~)을 포함하여 무려 16명이나 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비밀리에 참전한 소련 조종사 1명이 미군기 5대를 격추해서 에이스가 되었고, 북한 조종사 또한 격추 기록을 세우고 돌아간 파견 요원이 있다고 한다. 퇴역한 베트남군 장성의 서한에 따르면 북한은 1967년부터 1969년 초 사이 87명의 조종사를 북베트남에 파병해 미국 전투기 26대를 격추했고, 그 댓가로 14명의 북한 조종사가 전사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편 전쟁 당시 미군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무덤 대령이라는 격추수 13기의 슈퍼 에이스가 북베트남군에 있다는 도시전설이 돌았다.
한국 전쟁에서는 그토록 압도적인 공중우세를 달성했던 미 공군이었지만, 베트남전에서는 단지 2대1의 우위만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은 미 육군항공대 시절부터 따져도 가장 저조했던 항공전 성과였다.
[1] 오른쪽의 인물. 왼쪽의 인물은 호치민.[2] 당시 베트남 교과 과정으로는 8학년[3] 이곳은 현재 캇비 국제공항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