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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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8전비 홈페이지에서 올려놓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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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시절.
1922년 7월 14일 출생 ~ 2007년 6월 14일 사망
'''Robin Olds'''[2] 는 미합중국 공군의 '''트리플 에이스'''이자, 미사일 만능주의라는 늪에 빠져 허덕이던 미군에게 도그파이트의 가치를 일깨운 '''명장'''. 평생을 현장에 머무르고자 노력한 타고난 투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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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미합중국 육군의 초기 항공부대가 꿈틀거릴 적 전략폭격과 항공력의 중요성을 일깨웠던 '''빌리 미첼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활동하며 훗날 육군항공 소장까지 지내는 로버트 올즈(Robert Olds)였다. 어릴 적부터 미 육군 항공대의 주요 장교단과 어울리던 가족 덕에 인맥의 퀄리티가 ㅎㄷㄷ한데, 어릴적 옆집 아저씨 중에는 훗날 '''초대 미 공군참모총장을 지내는 칼 스패츠 소령'''이 있었고, 미첼 장군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강제 예편당하는 장면을 아버지를 따라 직접 법정에서 목격했다고 한다. 아버지도 자주 복엽기로 로빈을 태우고 비행하며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이래저래 어릴 적부터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꾸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어린 로빈은 미식축구에도 환장해 있었다. 그것도 그냥 좋아하는게 아니라 올 아메리칸급으로 잘해서 프로리그 스카우터들이 군침을 흘렸을 정도.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따라 군대에 입대하기로 결심, 미국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풋볼과 비행기 조종을 병행하기로 결심한다. 버지니아군사대학과 다트머스 대학교의 미식축구 장학금을 쌩깠다고 하니 대단한 각오를 했던 듯. 하지만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전투기 조종사로서 일찍 활동하고 싶었던 로빈은 캐나다 공군에 입대한다고 땡깡을 부리기도 했다. 아버지한테 혼나고 얌전히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가긴 했다만.
로빈은 웨스트포인트에서 풋볼로 특히 절륜한 활약을 펼쳤는데[3] , 온갖 풋볼 명문은 죄다 박살내고 미국해군사관학교를 진주만 공습 8일 후에 짓밟는 만행을 저질러 악명을 높였다. 전국의 풋볼 스카우트들이 군대 가지 말고 풋볼이나 하자고 계속 꼬시기도 했다고. 다만 '''몰래 술을 홀짝거리다가'''[4] 대위생도(Cadet Captain)에서 이등병생도(Cadet Private)로 쫙 강등되는 흑역사도 있긴 했다. 어쨌든 이 시절의 아찔한 흑역사는 훗날 미국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이 되었을 때도 훈육에 있어 좋은 경험이 되었다.
이후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미군이 사관생도들을 1년 일찍 임관시킬 때 올즈는 예정대로 항공장교를 지원했다. 이 시절 육사는 상황이 워낙 급했던지라 지상군 지원하는 생도들과 항공 지원하는 생도들을 아예 따로 교육시켰다고. 올즈는 1943년 5월 30일 조종교육을 수료하며 햅 아놀드 장군에게 배지를 받은 뒤 소위로 임관했다.
P-38 조종사로 유럽전선에 배치. 1944년 8월 14일 독일군의 Fw190을 격추하며 첫 격추 기록을 세웠다. 1944년 9월에는 P-51 머스탱으로 기종을 교체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12기의 적기를 격추하고 11.5기 지상격파 전과를 올려 에이스 파일럿의 반열에 올랐다.
1947년에는 인기 여배우 엘라 레인스(Ella Raines)와 결혼했다. 한국전쟁 때는 참전을 지원했으나 부인인 엘라 레인스가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참전을 막고 NATO 지역 근무로 발령받게 했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못한 것을 평생 천추의 한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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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 공군에서 F-101을 조종하다가 기지 개방 행사 때 위험한 곡예비행을 하여 징계를 받은 적이 있고[5] , F-4로 기종전환 후 베트남에 주둔한 제8전투비행단의 단장으로 부임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다.
본인도 이 전쟁에서 MiG-21 2기, MiG-17 2기를 격추해 총 4기의 격추 스코어를 올렸다. 1기만 더 격추하면 스티브 리치 대위보다 먼저 베트남전에서 미 공군 최초의 에이스가 될수 있었는데, 동료 조종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에이스가 되면 나이도 많고 해서 본토로 전출될까봐 일부러 5기째의 격추를 피하고 윙맨에게 격추 기회를 양보해줬다고.
결국 그의 눈물나는 현역연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67년 9월에 본토로 전출되어 준장으로 진급하고 미국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으로 발령났다.
1972년에 베트남전 최후의 대규모 항공작전인 라인배커 작전이 발동되자, 자신의 계급을 대령으로 자진 강등하고서라도 일선으로 돌아가고자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973년에 퇴역했다.
2007년 7월 14일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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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8전비 홈페이지에서 올려놓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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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시절.
1922년 7월 14일 출생 ~ 2007년 6월 14일 사망
'''Robin Olds'''[2] 는 미합중국 공군의 '''트리플 에이스'''이자, 미사일 만능주의라는 늪에 빠져 허덕이던 미군에게 도그파이트의 가치를 일깨운 '''명장'''. 평생을 현장에 머무르고자 노력한 타고난 투사이기도 하다.
[clearfix]
1. 어릴 적
아버지는 미합중국 육군의 초기 항공부대가 꿈틀거릴 적 전략폭격과 항공력의 중요성을 일깨웠던 '''빌리 미첼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활동하며 훗날 육군항공 소장까지 지내는 로버트 올즈(Robert Olds)였다. 어릴 적부터 미 육군 항공대의 주요 장교단과 어울리던 가족 덕에 인맥의 퀄리티가 ㅎㄷㄷ한데, 어릴적 옆집 아저씨 중에는 훗날 '''초대 미 공군참모총장을 지내는 칼 스패츠 소령'''이 있었고, 미첼 장군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강제 예편당하는 장면을 아버지를 따라 직접 법정에서 목격했다고 한다. 아버지도 자주 복엽기로 로빈을 태우고 비행하며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이래저래 어릴 적부터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꾸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어린 로빈은 미식축구에도 환장해 있었다. 그것도 그냥 좋아하는게 아니라 올 아메리칸급으로 잘해서 프로리그 스카우터들이 군침을 흘렸을 정도.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따라 군대에 입대하기로 결심, 미국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풋볼과 비행기 조종을 병행하기로 결심한다. 버지니아군사대학과 다트머스 대학교의 미식축구 장학금을 쌩깠다고 하니 대단한 각오를 했던 듯. 하지만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전투기 조종사로서 일찍 활동하고 싶었던 로빈은 캐나다 공군에 입대한다고 땡깡을 부리기도 했다. 아버지한테 혼나고 얌전히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가긴 했다만.
로빈은 웨스트포인트에서 풋볼로 특히 절륜한 활약을 펼쳤는데[3] , 온갖 풋볼 명문은 죄다 박살내고 미국해군사관학교를 진주만 공습 8일 후에 짓밟는 만행을 저질러 악명을 높였다. 전국의 풋볼 스카우트들이 군대 가지 말고 풋볼이나 하자고 계속 꼬시기도 했다고. 다만 '''몰래 술을 홀짝거리다가'''[4] 대위생도(Cadet Captain)에서 이등병생도(Cadet Private)로 쫙 강등되는 흑역사도 있긴 했다. 어쨌든 이 시절의 아찔한 흑역사는 훗날 미국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이 되었을 때도 훈육에 있어 좋은 경험이 되었다.
이후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미군이 사관생도들을 1년 일찍 임관시킬 때 올즈는 예정대로 항공장교를 지원했다. 이 시절 육사는 상황이 워낙 급했던지라 지상군 지원하는 생도들과 항공 지원하는 생도들을 아예 따로 교육시켰다고. 올즈는 1943년 5월 30일 조종교육을 수료하며 햅 아놀드 장군에게 배지를 받은 뒤 소위로 임관했다.
2. 제2차 세계대전 : 최후의 라이트닝 에이스
P-38 조종사로 유럽전선에 배치. 1944년 8월 14일 독일군의 Fw190을 격추하며 첫 격추 기록을 세웠다. 1944년 9월에는 P-51 머스탱으로 기종을 교체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12기의 적기를 격추하고 11.5기 지상격파 전과를 올려 에이스 파일럿의 반열에 올랐다.
1947년에는 인기 여배우 엘라 레인스(Ella Raines)와 결혼했다. 한국전쟁 때는 참전을 지원했으나 부인인 엘라 레인스가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참전을 막고 NATO 지역 근무로 발령받게 했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못한 것을 평생 천추의 한으로 생각했다.
3.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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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 공군에서 F-101을 조종하다가 기지 개방 행사 때 위험한 곡예비행을 하여 징계를 받은 적이 있고[5] , F-4로 기종전환 후 베트남에 주둔한 제8전투비행단의 단장으로 부임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다.
허접하다고 얕봤던 북베트남군의 MiG-17, MiG-21이 의외로 뛰어난 고기동성을 이용해 크고 빠른 대신 둔중하고 미사일 만능주의에 빠져 기관포도 없던 미군의 F-4를 농락하자 북베트남군의 약점은 소련식의 경직된 지상관제 체제임을 간파하여 빅엿을 먹여주니 그게 바로 볼로 작전이다. 해당 항목 참조바람.올즈가 들어오던 첫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죠. "난 이번에 새로 왔다. 지금부터 너희들을 가르칠텐데, '''난 여기있는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며 우리를 하나씩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훈련내용은 개선됐고, 비로소 진짜 '전투비행단'이 됐죠.
-히스토리 채널, <실전최강 전투기대전> 볼로작전 中.
본인도 이 전쟁에서 MiG-21 2기, MiG-17 2기를 격추해 총 4기의 격추 스코어를 올렸다. 1기만 더 격추하면 스티브 리치 대위보다 먼저 베트남전에서 미 공군 최초의 에이스가 될수 있었는데, 동료 조종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에이스가 되면 나이도 많고 해서 본토로 전출될까봐 일부러 5기째의 격추를 피하고 윙맨에게 격추 기회를 양보해줬다고.
결국 그의 눈물나는 현역연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67년 9월에 본토로 전출되어 준장으로 진급하고 미국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으로 발령났다.
1972년에 베트남전 최후의 대규모 항공작전인 라인배커 작전이 발동되자, 자신의 계급을 대령으로 자진 강등하고서라도 일선으로 돌아가고자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973년에 퇴역했다.
2007년 7월 14일 향년 84세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