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조(고려)

 


'''고려조 추존 국왕'''
'''懿祖 | 의조'''
'''묘호'''
'''의조(懿祖)'''
'''시호'''
경강대왕(景康大王)
'''이름'''
작제건(作帝建)
'''아내'''
원창왕후(元昌王后)
'''자식'''
용건(龍建), 왕평달(王平達)[1], 아들, 아들, 딸
'''태조와의 관계: 할아버지'''
1. 개요
2. 고려사의 기록
2.1. 태조실록
2.2. 편년통록
2.2.1. 당숙종(또는 당선종)이 진의와 사랑에 빠지다
2.3. 편년강목
2.3.1. 아버지를 찾으러 배를 타다
2.3.2. 용왕을 위해 여우를 잡다
2.3.3. 저민의와 결혼하다
2.4. 왕대종족기
2.5. 성원록
2.6. 평가
3. 출신에 관한 논란
3.1. 고려 사람
4. 둘러보기(계보)


1. 개요


고려 왕조의 추존 군주.
묘호는 의조(懿祖), 시호는 경강대왕(景康大王). 태조 신성대왕이 등극한 뒤 추존한 세 임금 중 한 명이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 편년강목 기록상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다.
이름은 작제건(作帝建), 성씨는 없다.[2]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
고려사의 편년강목 기록 기준으로 서해 용왕의 딸 저민의와 결혼해 아들이 넷, 딸이 하나 있었다. 아들 중 용건, 왕평달의 이름은 기록되있으나 다른 둘은 기록이 없다. 딸은 어머니를 따라 용궁으로 사라졌다.

2. 고려사의 기록



2.1. 태조실록


'''의조(懿祖)는 경강대왕(景康大王)으로, 비(妣)는 원창왕후(元昌王后)로 하였다.'''

고려사 고려세계 태조실록 중.

고려왕조의 정사라 할 수 있는 고려왕조실록의 태조실록은 아주 짧게 의조와 원창왕후에 대해 설명했다.

2.2. 편년통록




2.2.1. 당숙종(또는 당선종)이 진의와 사랑에 빠지다


작제건을 신성시하기 위한 작제건 설화가 내려져온다.

당(唐) 선종(宣宗)의 나이 13세 때는 당 목종(穆宗)의 재위 때인데 장난 삼아 황제의 용상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절(揖)하는 자세를 지었다.

목종(穆宗)의 아들 무종(武宗)은 마음으로 그를 꺼려하더니 무종(武宗)이 즉위하매 선종(宣宗)이 궁중에서 해(害)를 만나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여 몰래 빠져 나와 멀리 도망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고루 세상의 험난함을 맛보았다.

염관(鹽官)의 안선사(安禪師)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대우가 특히 각별하였으므로 염관(鹽官)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의 속군(屬郡)이요 염관(鹽官)은 항주(抗州)의 속현(屬縣)이니 다 동해에 접하여 있어 상선이 왕래하는 지방이었으므로 화를 무서워하여 항상 깊이 숨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산수를 유람하는 것으로 명목 삼아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넜다.

선종이 신라 송악 마가갑(摩訶岬) 양자동(養子洞)에 이르러 보육(寶育)의 집에 머무를 때 두 딸을 보고 기뻐하며 옷이 따진 곳을 꿰매 주기를 청하였다.

보육(寶育)은 중국에서 온 귀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마음 속에 "과연 술사(術士)의 말과 부합된다."고 생각하고 곧 큰딸로 하여금 명에 응하게 하였더니 문턱을 넘다가 코에 피가 흘러나오므로 진의(辰義)를 대신으로 드디어 천침(薦枕)하게 되었다.

기월(期月) 동안 머무르다가 임신하였음을 깨닫고 작별할 때 말하기를, "나는 당(唐)의 귀성(貴姓)이라." 하고 활과 화살을 주며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라."고 하였다.

'''곧 아들이 태어나니 작제건(作帝建)이다.'''

고려사 고려세계 편년통록 중.

편년통록과 편년강목은 같은 설화를 기록했는데 여기서 의조의 아버지는 당숙종 또는 당선종이다.
당 황제가 진의에게 활과 살을 맏긴 뒤 아들이 태어나니 바로 작제건이다. 작제건은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단지 당나라의 사람이라고 했다.
작제건이 이 것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은 고구려의 유리명왕 전설과 은근히 비슷하다. 작제건은 활을 들고 배를 타 당나라로 떠난다.

2.3. 편년강목



2.3.1. 아버지를 찾으러 배를 타다


작제건은 성인이 되자, 아버지를 찾으려고 당나라로 가는 신라 사신단의 호위무사가 되어 배에 오르는데, 이후의 내용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명궁 거타지 설화와 똑같다.
조금 상세히 서술하자면, 당나라 태자가 육지에 상륙을 하려고 했는데, 해변이 너무 펄밭이라 엽전을 깔아서 길을 만들게 하여 그것을 밟고 육지로 향했으니, 이 해변을 후에 '자전포'라고 일컫는다.
태자가 한 집에 머무르기를 청했는데 집 안에 아리따운 여식이 있으므로 집 주인에게 간청하여 그 여식을 얻었다. 동침을 하고 여인이 임신했으나 아이를 낳기도 전에 본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 아이가 자라면 당나라로 날 찾아오도록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당으로 돌아간다.
아이가 태어나 작제건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어린 나이에 벌써 궁술에 통달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일찍이 말을 깨우쳐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를 여쭙곤 했다고 한다.
성장한 후에 상술한 대로 어머니께 하직인사를 올리고 아버지를 찾으러 배에 올랐다. 그런데 뱃길에 안개가 너무 자욱해 더이상 항해가 불가능 할 지경이 되어 뱃사람이 점을 쳤는데 작제건을 버려야 살 수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2.3.2. 용왕을 위해 여우를 잡다


결국 작제건은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밑에 외딴 섬이 있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배가 떠나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서해의 용왕인데 내가 그대를 만나고자 붙잡았다. 근래에 늙은 요호(妖狐)가 부처의 모습으로 나타나 경을 외우는데 그때마다 내 두통이 극심하다. 그대의 궁술이 출중하다 들었으니 그대의 활로 그 요호를 잡아주기 바란다."하니, 작제건이 승낙해 요호를 잡으러 갔다.
과연 하늘을 날아오는 불상의 모습이 보이니 작제건은 눈을 감고 활을 쏘아 맞추었는데 맞아 떨어진 것은 과연 늙은 여우였다. '''이 대목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명궁 거타지 설화와 거의 90% 일치한다.'''
용왕은 감사를 표하며 작제건을 당으로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생각하니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고 아버지는 황제가 되어 자식을 많이 얻었을 테니 가봤자 날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나는 동방의 왕이 되길 원하니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러자 용왕은 "왕이 되려면 '건'자가 붙은 이름으로 3대를 거쳐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3]
본인은 끝까지 왕이 되지 못했으나 훗날 손자 왕건이 옥좌에 앉아 아버지 용건, 할아버지인 작제건을 왕으로 추증했으니 반은 이루어진 말이다.

2.3.3. 저민의와 결혼하다


그때 웬 노파가 "왜 사위로 받아달라 하지 않느냐" 하고 귀띔을 하니 작제건이 딸을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용왕이 그를 용궁으로 데려가 딸 저민의를 처로 주고 칠보를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저민의가 작제건에게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를 달라고 청하라"고 귀띔을 하니 작제건이 그대로 청했다. 그러자 용왕이 고심을 하다가 내주고 둘을 보내었다.
그런데 집에 돼지를 들여보내려 했는데 돼지가 말을 듣질 않았다. 그러자 저민의가 '영험한 돼지이니 따라가 보라' 라고 해서 결국 돼지가 가는대로 먼 길을 따라가다 돼지가 갑자기 자리를 잡고 드러누우니 작제건 부부는 거기에 새로 집을 지었다. 저민의가 집 앞에 우물을 팠는데 그 우물은 용궁으로 가는 통로였으니, 저민의가 수시로 친정에 들러 보물들을 들고 왔다고 한다.
그런데 작제건에게 충고하기를 "내가 집에 가는 모습을 봐서는 안된다. 보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경고하므로 작제건은 그리했다. 세월이 흘러 용건을 비롯한 4형제를 낳은 뒤, 막내딸이 태어난 후에는 딸을 데리고 용궁으로 가는데 어느날 호기심을 견디지 못한 작제건이 몰래 뒤를 따라가 아내를 엿보니 아내와 딸이 황룡으로 변해 우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을 눈치 챈 저민의는 용궁에서 돌아와 추궁하며 분노하기를, "용궁의 일족은 이 땅에서 1천년의 영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당신이 부부의 약속을 저버렸으므로 5백년 밖에 누릴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 후 딸과 함께 용으로 변해서 우물을 통해 용궁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4]
보면 알겠지만 이건 '''선녀와 나무꾼 복붙'''이다. 참고로 선녀와 나무꾼은 우리나라에서는 전래동화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몽골족만주족의 시조 신화이다.

2.4. 왕대종족기


고려사가 인용한 이제현의 논평엔 당숙종이 작제건의 할아버지, 국조가 작제건의 아버지라고 서술했다. 그리고 이제현이 증거로서 인용한 '왕대종족기'엔 국조의 성씨가 왕(王) 씨였다고 기록했다.
그럼 아들인 의조 작제건 또한 왕(王) 씨라는건데 세조 왕륭이 초명 용건에 성씨가 없었던 걸 보면 작제건이 왕 씨였다는 건 가능성이 작다.

2.5. 성원록


고려사엔 이제현이 인용한 성원록이 두 줄 남아있다.

'''흔강대왕(昕康大王), 즉 의조(懿祖)의 처(妻)인 용녀(龍女)란 자는 평주 사람(平州人) 두은점(豆恩坫) 각간(角干)의 딸이다.'''

고려사 고려세계 성원록 중.

성원록엔 의조의 시호가 ''''흔'''강대왕('''昕'''康大王)'이라 적혀있는 듯 하다. 아마 ''''경'''강대왕('''景'''康大王)'을 헷갈린듯?
또한 원창왕후 용녀는 신라 평주 사람으로 두은점이란 자의 딸이다. 편년통록보단 현실적인 셈. 근데 두은점이란 자의 관등이 무려 '''각간(角干)'''이고 딸의 이름은 그대로 용녀다. 비현실적인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는 셈.

2.6. 평가


작제건 설화는 상당히 작위적인 설화다. 실제로 고려 충선왕 대에 원나라 한림학사가 "당숙종은 젊었을 때는 궁을 벗어난 적이 없고 황제의 지위에 올랐을 때는 안사의 난을 수습하느라 바빴는데 언제 고려까지 갔다는 거임?"이라고 충선왕에게 설화의 내용이 사실인지 물어봤으나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편년강목의 저자인 민지가 당숙종이 아니라 당선종이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이에 대해 원나라 한림학사는 "당선종 이분은 외방에서 산전수전 다 하셨으니 그러셨을수도 있겠음." 하고 수긍하였다.
이러한 작제선의 설화는 당시 고려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팔관회는 '''천령과 오악, 명산대천, 용신'''에게 고려의 안위를 바라는 행사였다. 여기서도 '''용신'''을 언급하며 고려 왕족들이 스스로 용의 후손임을 선전하였다. 사실이 어쨌든 작제건 설화를 토대로 '고려 군주는 당 황실의 후계자다', '고려 군주는 용의 후계자다'라는 프로파간다가 나온 것이다.
또한 민간의 전설인 '우왕이 자신은 용의 후손이라며 겨드랑이에 용비늘을 보여주었다'는 전설, '우왕이 용의 후손이라 죽이지 못해 이성계가 전어도로 죽였다'는 전설을 보면 민간에도 고려 왕실은 용의 후손이란 전설이 꽤 알려져 있었던 걸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인데, 그 고구려는 신라와 연합했던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상태였다. 어떤 의미에서 작제건 설화는 한미했던 왕실의 선조를 숭조 사업을 하면서 도가 지나칠 정도로 높이면서 의도치 않게 국가 정체성을 블랙 코메디급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있다.

3. 출신에 관한 논란


국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국조는 태조 왕건의 외고조부인지 증조부인지 헷갈리는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증조부로 여겨지며''' 왕대종족기에서는 고려 태조의 가문이 증조부 때부터 왕씨 성을 쓰고 있었다고 나온다. 그래서 개성 왕씨의 시조로 여겨지긴 하지만 실제 왕씨 성을 쓰기 시작한 건 빨라도 세조 왕륭, 늦으면 태조 왕건 대부터로 추정된다.
게다가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 편년통록, 태조실록, 왕대종족기와 성원록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 책들의 내용을 인용한 내용이 있는 책을 참고할 수 밖에 없다.
고려사에는 이에 대한 내용을 모두 적고 있는데, 고려 말의 유학자 이제현이 이에 대해 말한 부분이 있다. 그가 말하길, 성원록(姓源錄)에 '흔강대왕(의조)의 처인 용녀(龍女)는 평주(平州) 사람인 두은점 각간의 딸이다.'라고 나온다.
여기서 평주는 중국의 평주가 아닌 황해북도 평산군의 고려 초기 지명이다. 중국의 평주는 위진남북조 시기, 수나라, 당나라 시기에도 존재했으나[5] '두은점 각간'은 두은점이라는 인물이 신라의 1등위 관등인 각간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므로 그가 중국 평주 사람이 아닌 걸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 황해도 평산군이 평주로 불렸고, 고려가 여기에 도호부를 설치했기 때문에 성원록에 나오는 평주는 황해도 평산군임이 분명하다.
이는 의조 작제건의 아내 용녀를 용왕의 딸이라고 한 편년통록의 기술과 다르다. 10세기에 편찬된 태조실록과 달리 왕대종족기의 편찬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편년통록의 저자가 12세기 고려 의종 때의 사람이고, 13세기의 유학자 이제현이 태조실록과 왕대종족기를 근거로, 국조와 보육이 동일인물이고 당숙종이 작제건의 아버지라는 편년통록의 작제건 설화의 내용 일부가 사실이 아님을 논파했기 때문에 왕대종족기는 편년통록보다 이전에 작성된 문헌인 건 분명하다.
작제건 설화가 최초로 고려 문헌에 수록된 건 고려 의종 시기의 편년통록이 최초이다. 상당히 작위적인 설화인 만큼 '''작제건 개인에 대한 내용도 많이 가공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편년통록, 편년강목의 저자인 김관의, 민지 등은 고려 의종, 충숙왕 때의 문신으로 역사가가 아니라 무기나 보물 관리를 담당하던 하급 관리였다.
다만 작제건이란 인물 자체가 가상인물이라고 보긴 어렵다. 증조부부터 왕씨 성을 썼다는 기록이 이미 있는 상황에서 태조의 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가상인물을 지어내서 만들어낸 것이라면 기왕 지어낼 김에 태조의 조부가 성씨를 가진 귀족이라고 설정하는 게 더 나은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설화는 거타지의 것을 복붙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차용의 형태였다면 굳이 이름만 다르게 지을 이유가 없다.

3.1. 고려 사람


고려사 고려세계가 인용한 편년통록, 편년강목은 특이하게 작제건'''만''' '고려 사람(高麗人)'으로 따로 부르고 있다. 원문을 보면:

(전략)...그리하여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상선(商船)에 (몸을) 맡겨 바다를 지나던 중, 구름과 안개가 앞을 가리고 배(舟)가 사흘 동안 나아가질 않았다. 배의 사람들이 점을 쳐 말하니 '''"마땅히 고려 사람을 치워야 한다(宜去高麗人)."'''고 했다.

민지(閔漬)의 편년(編年)[6]

이 혹 이르길: 신라 김양정[7]이 사신으로서 당에 가려 하니 (작제건이) 그 배에 (몸을) 맡겼다. 양정이 꿈을 꿨는데 백두옹(白頭翁)이 말하길 '''"고려 사람을 남기면 순풍을 탈 수 있다(留高麗人, 可得順風)."'''고 했다.

고려사 고려세계 중.

당시엔 고(구)려가 없었으며 송악은 신라의 영토였다. 또한 호경은 성골장군, 강충은 상사찬, 보육은 신라술사의 말을 전해 듣는 등 작제건 일가는 신라의 문화를 따르고 있었다.
두 기록 중 첫번째 기록을 보면 '배의 사람들'이 어디 출신인지 알 수 없다. 즉 그들은 당인, 중국인일 수도 있다. 배는 상선이라고 하니 신라로 무역을 하러 온 당인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작제건 설화가 고려 건립 후 만들어졌다고 가정하면 그들이 신라사람 작제건을 우리나라의 별칭 중 하나인 '고려'로 불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배에서 유일한 신라인이여야만 한다는 추가 조건이 붙지만. 당시 고(구)려를 멸망시킨 그 신라가 고려란 별칭으로 불렸다는 가능성은 차치하고 후대 고려 사람들의 전설이다 보니 자국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두 기록 중 두 번째 기록은 ''''신라'''' 사신 김양정과 ''''고려'''' 사람 작제건을 완전히 분리하고 있다. 당시 송악을 포함한 패서 일대는 여전히 고(구)려 사람이란 의식이 강했다. 고구려계로 보이는 호경 일가는 송악이 신라의 영역이 됐으니 신라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나 후손 왕건 대까지 고구려계 정체성을 가졌다.[8] 그래서 사람들이 작제건을 '고구려계 신라인'이란 이유로 고려 사람이라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고려' 군주인 왕건이 자신의 조상을 신성화할 때 일부러 왕건의 '고려'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할아버지 작제건 대부터 '고려' 사람이란 설정을 추가한 것일 수도 있다. 왕건은 궁예의 국가를 찬탈해서 자신의 국가를 세웠다. 그러다보니 더욱더 자신이 옛 선조 대부터 예언된 국가의 주인이라는 걸 강조해야 했다. 마침 자신이 고구려계고 국명도 고려이니 작제건이 특별히 고려 사람이란 추가 설정이 붙었을 지도 모른다.

4. 둘러보기(계보)




[1] 왕식렴의 아버지.[2] 고려사 고려세계 편년통록, 편년강목 기준. 고려사에서 이제현은 작제건이 왕씨(王氏)라고 주장했다.[3] 아들 왕륭의 초명이 '용건(龍建)'이다. 손자 왕건도 이름이 '건'이니 3대가 건 자 이름을 가진 것.[4] 그래서 그런지 고려왕조가 500년이 채 안돼서 멸망하였다.[5] 링크.[6] 편년통록과 편년강목 중 민지가 쓴 편년강목을 말한다.[7] 진성여왕의 막내 아들.[8] 자칭 미륵불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 고(구)려의 원한을 갚겠다고 천명하고 국명을 고려라 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패서 일대는 고구려의 부활을 원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