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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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세대 경영학자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명예교수이다. 외교부장관 강경화의 시아버지이기도 하다. 청해 이씨로 조선 개국공신 이지란의 22대손이다.
2. 생애
이기을(李氣乙)은 1923년 10월 4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하천리(현 신포시 중흥리)에서 아버지 이신우(李信遇)와 어머니 김옥륵(金玉肋)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신우는 경성고등공업학교[3] 출신의 건축기술자로 흥남의 조선질소비료 공장, 장진강 수력발전소, 조선화학공업회사 등에서 근무했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학병으로 지원[4] 하여 규슈 가고시마에서 복무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1945년 9월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1947년 졸업하였고, 1952년 연희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연희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근무했다.[5]
1955년 연희대학교 경영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1958년 미국 국제협력처(ICA)의 기술원조 일환으로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 경영대학원에 1년간 파견되어 미국의 경영학 이론을 도입했다. 1971년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 정년 퇴임하였다.
2020년 10월 13일 사망했다. 향년 97세.# 아들 이일병은 요트 여행을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인 상황이라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3. 가족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이일병(李一昺)[6] 은 연세대학교를 나와 매사추세츠 대학교 대학원에서 전산학 박사 학위를 받고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컴퓨터과학과 교수로 있다가 2014년 8월 퇴임하여 명예교수로 있는데, 이일병의 배우자가 바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다.
4. 독립유공자 포상
중앙고보 5학년 재학 중이던 1941년 8월 소위 '중앙고보 5인 독서회사건'으로 함흥경찰서에 연행되어 고문 등 혹독한 조사를 받고 함흥형무소에 수감됐었다. 5인 독서회는 중앙고보 학생 5명이 민족정기 고취, 독립 쟁취를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로, 일제가 금서로 지정한 책을 몰래 읽으면서 토론하는 모임이었는데 여름방학에 한 학생의 연락 편지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지도교사 최복현과 다른 회원도 같이 검거되었는데, 최복현 선생은 '내 강의를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나는 어떠한 처형도 감수하겠으니 학생들만은 석방해 주기 바란다'고 요청하여 이기을은 노국환(盧國煥)·황종갑(黃鍾甲)·유영하(柳永夏)·조성훈(趙成勳) 등 다른 4명의 학생과 함께 검거된지 100일 만에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90년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했었지만 2018년까지 유공자 포상 선정 기준인 '옥고 3개월'을 충족하지 못해서 탈락했었다. 2018년부터 심사 기준이 완화됨에 따라 2020년 4월 재신청을 하여 심사에 착수하였고, 2020년 11월 관련 안건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어 독립유공자로 등록, 포상을 받게 되었다.#
5. 저술
- 1960년 '미국의 기업금융'(번역)
- 1962년 '기업금융론', '기업재무론'
- 1963년 '경영학 서론'
- 1964년 '재무관리론'
- 1965년 '경영·경제·상학 연습', '경영학 원론'
- 1968년 '은행경영론'(번역)
- 1970년 '경제개발과 경영합리화'
- 1973년 '경영관리론'
- 1977년 '기업금융론'
- 1981년 '경영학 원론'
- 1983년 회갑기념논문집, '경영통계와 사례연구'
- 1988년 '민족문화와 한국적 경영학'
[1] 23세 '''기(氣)''' 용(容) 항렬. 아버지 이신우(李信遇)는 22세 '''우(遇)''' 재(材) 식(植) 래(來) 만(萬) 항렬.[2] 청해 이씨 집성촌이다.[3] 이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통합되었다.[4] 학병 기피로 인해 함흥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함흥경찰서에 감금되는 등 압박으로 학병에 지원하였다고 한다. 이 점과 후일 외교부장관이 되는 강경화의 시아버지란 점 때문에 '일제 학도병 출신인 강경화의 시아버지가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란 기사로 후술된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쓰레기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5] 당시는 대학원생은 대부분 직업을 갖고 있었다.[6] 청해 이씨 24세 '''병(昺)''' 균(均) 항렬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