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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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에 활약했던 장군이자 조선의 개국공신. 태조 이성계의 심복 중 심복이였으며, 조선 개국공신들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하사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청해 이씨의 시조. 이름은 이지란으로, 여진족 시절의 성은 퉁(佟), 이름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3] 로서 보통 '퉁두란'으로 불렸다. 이름은 그대로 두고 성만 이씨 성을 붙여서 '이두란'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지란과 이두란이라는 이름이 섞여서 기록되어 있다.
청해 이씨 족보에 따르면, 남송의 명장 악비(1103~1142)가 간신 진회의 참소로 죽게 되자 악비의 5남 악정(岳霆)이 화를 피해 북쪽으로 올라가 여진족 행세를 하게 되었으며, 이지란은 악비의 7대손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한중 수교 이후 청해 이씨 문중은 중국에 있는 악왕묘에 참배하러 가는 등 정기적으로 중국 쪽 악씨 문중과 교류 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한 국가의 지배층이 적국에 귀화하는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옛날 사람들은 온갖 가문을 주장하고 다닌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신뢰성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고려는 태조 왕건이 당 숙종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2. 생애
원래 북청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진족 족장이자 몽골의 금패천호인 아라부카(阿羅不花)의 아들로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千戶)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고려에 귀화한 시기는 공민왕 20년(1371년)으로 휘하의 1백 호를 거느리고 고려 조정에 귀순하여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성계와 의형제가 된 뒤[4] 이성계의 성인 이씨 성을 따랐다.
이성계를 처음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성계가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였다고 한다. 이에 이지란은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이성계의 의형제가 될 것을 자처하였다. 이성계의 의형제답게 무력이 강대한 용장으로 용비어천가에 따르면 이성계가 이지란을 가리켜 "이두란의 말 달리고 사냥하는 재주야 그만한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싸움에 임해 적군을 무찌르는 데는 이두란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평가한 대목이 있을 정도.
활 솜씨는 확실히 이성계 못지 않아서 황산 대첩에서 고려군을 괴롭힌 왜구 대장 아기바투의 숨통을 끊은 것도 바로 이지란이다. 이성계가 아기바투의 투구 끈을 맞춰서 아기바투의 투구를 벗기자 곧바로 화살을 쏴서 아기바투의 얼굴에 명중시켰다고 한다. 황산 대첩에서는 이지란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왜군을 이성계가 미처 보지 못하자 2번이나 위험하다고 부르짖은 다음 바로 활을 쏘아 거꾸려뜨렸다는 기록이 있다.[5] 이후 호바투(胡拔都)와 일진일퇴의 싸움을 벌였으며 함흥으로 처들어온 왜구를 격파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신중하고 사려가 있는 성품이었던지 이지란의 비문인 이지란 신도비에 따르면 고려 우왕이 서쪽으로 사냥을 나왔을 때 이성계가 나서서 활을 쏘아 한 발에 과녁을 맞히자 우왕이 기뻐하였으나 이지란은 "재주의 아름다움을 어찌하여 남에게 많이 보이십니까."라며 넌지시 꼬집었고 이성계가 반성하면서 이지란의 지혜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인임을 비롯해 중앙 정계의 경계를 받았던 이성계인만큼 굳이 재주를 과시해 꼬투리를 잡힐 일은 하지 않는게 좋겠다는 의미였던 듯 하다.
이성계를 따라 전쟁터에 동행하면서 전공을 세워 공양왕 시절 '지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의 벼슬을 받았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1등 개국공신에 책록되고,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6]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 이방원을 도왔다.[7] (정종 3권, 2년(1400년 경진/명 건문(建文) 2년) 1월 28일(갑오) 3번째 기사) 그래서 정사공신과 좌명공신에 이지란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이후 이성계가 양위하고 함흥으로 갈 때 함께 함경도로 갔으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말년에는 살생을 많이 한 것을 참회하는 의미로 불교에 귀의하고 승려가 되어 은둔했다고 전한다. 태조의 심장에 대못을 박은 태종의 편에서 싸운 것 때문에 태조에게 매우 미안해했다고 한다.
태종 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시신을 여진의 풍습에 따라 화장해서 고향인 북청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여 현재 이지란의 묘는 함경남도 북청군에 있다.[8] 이후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3. 이성계와의 관계
이성계의 의동생으로 알려져 있는게 일반적이나 실제로는 이지란이 이성계보다 연상이라 정확히는 의형이라고 봐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적어도 지위가 높거나 인품이 뛰어난 사람이 의형이 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이성계가 이지란의 의형이라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9]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를 많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까지도 왕들이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었다. 이방원과도 친했는데 태종이 이지란의 이름을 팔아먹는 바람에 이성계가 말년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이를 집안의 형들과 이지란에게 알렸는데 당시 이성계는 딱히 정몽주를 죽일 생각은 없었고 이지란 역시 "어르신(이성계)께서 반대하시는 일을 할 수 없다"면서 이방원이 끈질기게 설득했어도 끝내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성계의 심복이라고 부를만한 인물.
4. 가족관계
부인이 두 명 있었는데, 1번째 부인 혜안택주 함안 윤씨(1346 ~ ?)는 판서 김세덕의 미망인으로 한동안 과부로 살다가 서의라는 사람과 다시 결혼했는데 며칠 만에 윤씨가 의(義)를 더럽혀 쫓겨나왔고 탄핵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윤씨가 이인임에게 뇌물을 주어 곤궁에서 벗어났는데 이 일을 가라앉히고자 이지란에게 공이 있다고 해서 윤씨를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강씨와 결혼하여 이지란의 후손인 네 아들들은 모두 강씨 소생이었다는 걸 보면 윤씨와 그리 잘 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두번째 부인 곡산 강씨(1349 ~ ?)는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딸이다. 따라서 신덕왕후의 조카 사위가 되는 셈. 그런데 정작 이지란은 신덕왕후의 정적인 이방원 편에 가담했다는게 아이러니. 사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시점에서 신덕왕후 강씨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자식은 모두 두번째 부인 곡산 강씨 소생이다.
- 아들 이화상(李和尙) : 공조판서.
- 아들 이화영(李和英) (? ~ 1424) : 여진 이름은 역리불화(亦里不花). 판우군부사(判右軍府使).
- 아들 이화미 (? ~ 1414) :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
- 아들 이화수 : 예조참판(禮曹參判).
5. 외모
뛰어난 무장이었던데다, 여진족 출신이라는 점 때문인지 사극에서는 한 덩치 하는 털보 아저씨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기록에는 이지란의 모습이 '''여자처럼 단정하고 예쁜 용모'''로 묘사되어 있다. 실록에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있는 전형적인 보스 체형으로 묘사되는 이성계와 묘한 대비를 이룬다.(...)
초상화를 보면 통통하고 얼굴이 동글동글한데, 당시 최고 미인으로 여겨졌을 원나라 황후들의 초상을 보면 이지란과 비슷하게 통통하고 얼굴이 동글동글 한 것을 알 수 있다. 거기다 이 초상화는 어디까지나 노년의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청년시절의 외모를 노년까지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11] 아무튼 과거 드라마에 나온 이지란은 전형적인 호걸상으로 삼국지의 장비 같은 이미지였다면,[12] 근래에 묘사되는(특히 SBS 계열) 이지란은 굉장히 샤프하고 미중년으로 나오곤 한다.[13]
6. 사극에서
1983년작 KBS 대하드라마 개국에서는 중견배우 강민호[14] (1942~1994)가 이지란을 연기했다.
같은 해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추동궁 마마'에서는 제1공화국의 김일성 역으로 유명한 원로배우 국정환(1943~2012)이 이지란 역을 맡았다.#
1996년작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후에 태조 왕건에서 유금필 역을 맡는 강인덕이 배역을 맡아 용맹하고 우직한 이성계의 심복 장수로 등장한다. 위화도 회군 직전 이성계가 있는 막사로 달려 들어 와 "'''채비를 마쳤습니다. 이제 고려의 관복을 벗어던질 때입니다!'''"라는 첫 대사로 회군의 시작을 알렸다. 왕자의 난 와중에 부자간의, 형제들간의 분란을 막으려[15] 동분서주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2차 왕자의 난 이후 벼슬을 버리고 불가에 귀의하여 말년을 보내는 것으로 나온다. 떠나기 전 이성계에게 하직하는 편지로 "이제 그만 방원이를 용서해 주시라"는 말을 남기고, 이성계는 "나를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이런 못돼먹은 사람 같으니..." 라며 씁쓸해한다. 이성계와는 젊은 시절부터 함께한 우애 돈독한 의형제이자 동지로 이성계보다 나이가 많으나 이성계를 형님으로 모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인지 극중에선 이성계도 이지란에게 '아우님' 이라고 반존칭을 쓰고, 사적으로 있을때는 이지란이 '형님 전하' 라는 정체불명의 표현을 쓴다.[16] 에피소드 91화에서 함흥에 있으며 이방원을 타도하기 위해 벼르던 이성계에게 이지란이 산의 암저에 머물다가 좌선상태로 죽어서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이성계는 이지란 같은 명장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 있냐면서 비통해하고, 이방원만 아니었으면 자기 곁을 떠나 그렇게 산속에서 혼자 쓸쓸하게 죽었을 리 없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더욱 증오심을 품는다. 6년이 지나 이성계도 세상을 떠나기 전 꾼 꿈에 나타나 반갑게 맞이하자 이성계가 놀라고 반가워하며 '오오, 아우님 아니시오!?'라고 말한다. 이후 우왕이라던가 공양왕 등 이성계에게 살해된 인물들이 나와 악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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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작 동 방송사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용의 눈물에서 이숙번 역을 맡았던 선동혁[17] 이 배역을 맡아 용맹하고 우직한 이성계의 심복 장수이자 의형제로 등장한다.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을 연기했던 유동근은 이 드라마에서 이성계로 출연하면서 용의 눈물에 이은 배우 개그가 탄생하기도. (이지란이 이숙번을 보고 "어디서 본것 같은데..." 드립을 친다) 정도전에서는 경계인이라는 설정을 강조해서 함경도 출신인 성님 이성계처럼 이지란이 여진족 출신이라는 캐릭터성을 강조하기 위해 동북 방언을 구사한다.[18] 여기서는 용의 눈물 때 처럼 용맹하고 우직한 면은 그대로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깐족대고 익살스러운 면이 있는 개그 캐릭터로 나온다. 이성계와 같이 있으면 둘이서 아예 한 편의 시트콤까지 찍는 등(...) 약방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자세한 건 이지란(정도전) 항목 참조.
2012년작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는 김구택이 맡았다.
2015년에 방영한 같은 방송사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앞에 언급된 예쁘장한 외모의 소유자란 사료의 기록이 어느 정도 반영된 듯, 종래의 경우(강인덕, 선동혁)와는 다르게 상당히 샤프한 외모의 배우인 박해수[19] 가 이지란 역으로 분하고 있다. 그런데 극중 이미지는 누가봐도 천생 장수이다...... 대사가 사투리인데도 긴 방영 기간동안 잘 소화해냈다.
7. 여담
- 이지란의 여진족 [20] 의 후손이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라고 한다. 정확히는 이지란은 여진족 중에서도 건주 여진 출신인데 종형제 중 하나가 같은 부족의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그의 6대손이 누르하치이다.
- 조선이 멸망한 뒤인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의 군가인 용진가의 가사에서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한 인물로 언급된다.[21] 본인이 여진족 출신인 것은 함정. 물론 여말선초의 여진족은 부족별로 분열된 상태고 이성계 밑에서 다른 여진족과 동북면에서 싸운 적이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훗날 여진족을 재통일한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조차도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신기오로 씨족에 적대적인 다른 여진족들을 죽이거나 살려서 굴복시키는 과정을 통해 여진족을 통일했으니...
초산(楚山) 우는 호(虎)와 패택(沛澤)에 잠긴 용(龍)이
토운생풍(吐雲生風)하여 기세(氣勢)도 장(壯)할시고
진(秦)나라 외로운 사슴은 갈 곳 몰라 하노라
- 조선 후기 《화원악보》(花源樂譜)란 시집에 이지란이 남긴 것으로 전해진 시조가 기록되어있다.
- 조선 중기의 문인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旬五志)에는 일화, 일명 야사가 실려있다. 길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자를 이성계가 철환으로 구멍을 뚫었으나, 이지란이 바로 조그만 진흙을 뭉치게 한 뒤 던져 물이 흘러나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 역시 순오지에 따르면, 은근히 이성계를 해하고 싶었던 이지란이 밤에 뒷간에 있는 이성계에게 활을 세 발 쏘았고, 이성계가 죽었을 것으로 예측했다. 허나, 이성계는 할 거 다하고 나온 뒤 화살을 돌려주었고, 이후 한 번도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야사이니, 판단은 알아서...
8. 둘러보기
[1] 그는 여진족이다.[2] 청해의 백작[3] 투란은 여진어로 쌍둥이, 티무르는 중세 몽골어로 철을 뜻하는 말인 테무르의 다른 말이다.[4] 이성계와 이지란의 관계가 몽골식 의형제인 '안다(Анда)' 관계라는 설도 있으나 근거나 전승은 명확하지 않은 편이다. 이지란의 신도비에는 형제의 의를 맺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5] 이때 이지란이 이성계에게 '뒤를 보시오! 뒤를 보시오!'라고 2번이나 다급히 외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사실 기록이 한문으로 돼서 그렇지, 급한 상황에 긴 문장을 말했을지도 미지수다.[6] 청해는 이지란의 출신지인 북청의 별칭이며 백은 백작 작위를 뜻한다. 이렇게 지역의 작위를 수여하는 것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미세하게 남아있던 봉건제적인 흔적이고, 나중에 중앙집권을 강화하던 태종이 오등작을 폐지하면서 작위 명칭이 청해군(靑海君)으로 바뀐다.[7] 1차 왕자의 난의 경우 정황상 이름을 도용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른 케이스지만, 한 것 없는 조준과 김사형도 1등 공신이니.[8] 태종 3권, 2년(1402년 임오/명 건문(建文) 4년) 4월 9일(신유) 3번째 기사 청해군 이지란의 졸기[9] 당장 유비와 관우를 보라.[10] 현 용인 경기도박물관 소장. 이지란을 모시던 포천의 청해사(靑海祠)에 있던 초상화로 당대의 그림인지는 미상이다.[11] 당장 폼페이우스를 보더라도 노년의 흉상을 보면 후줄근한 아저씨같지만, 젊은 시절에는 미남으로 유명했다.[12] 용의 눈물의 강인덕, 정도전의 선동혁이 그 대표적인 예.[13] 대풍수의 김구택과 육룡이 나르샤의 박해수가 그 대표적인 예.[14] 개국과 같은 해인 1983년에 방영했던 전우에서 주인공을 연기했다. [15]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다는 것을 알고 분노한 이성계가 이지란을 시켜 이방원을 죽이라고 하는데 몰래 사람을 보내 이방원에게 피신하도록 일러주었다.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이 죽고 방과에게 양위한 뒤 문안하러 편전에 정종과 중전, 이방원 부부가 함께 찾아오자 방원을 보고 "황천에서 온 죽은 귀신" 취급하면서 "그 백정놈 내외(=이방원 부부)가 따라붙었어!" 라며 아예 4명 모두 만나지 않으려는 이성계를 극구 말리면서 방원을 편전으로 들이기도 한다. 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방간이 잡혀간 뒤 방원을 향해 "자네들은 그래도 형제다. 이것만큼은 꼭 내가 말해야겠다"며 우애를 강조하며 물러난다.[16] 같은 작가가 시나리오를 담당한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의 심복이자 의형제 설정인 신숭겸이 '형님 폐하'라는 표현을 써서 오마쥬 됐다.[17] 이쪽도 현대 미인상과는 거리가 있으나 초상화와 은근 싱크로가 높다.[18] 실제로는 지금의 동북 방언은 조선시대에 하삼도 백성들을 대규모로 사민시킨 이후에 생겨난 것이기에 이지란, 이성계가 이런 악센트를 썼을 가능성은 없다.[19] MBC 드라마 무신에서 김윤후를 맡은 배우이며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주연 급으로 올라섰다.[20] 사촌(육촌을 넘어가는 종형제라는 설도 있다.[21] 이성계를 가사에 넣기에는 건국 시조의 이름을 함부로 올리기 뭐해서 개국공신 이지란을 가사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