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병
學兵.
1943년 이후에 일본 육군에 의해 징집, 또는 자원한 조선인 일본군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학도병이 올바른 표현이지만, 6.25 전쟁의 영향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학도병은 한국전에 참전한 소년병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고정된 편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학도병'이 아닌 '학병'이라는 단어를 쓰면 상대는 알아듣지 못한다. 해당 제도의 세부내용은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확인할 것.
1938년부터 일본군은 인원이 부족하자 지원병제를 도입했다. 조선지원병은 당시 불경기라든가 공직 진출 등의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1944년까지 17,664명을 뽑았다. 1944년부터 징병제를 적용했는데 그 전인 1943년에 전문학교 등 고학력자들을 대상으로 학병을 뽑았다.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 유학생을 강제로 뽑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학병은 강제입대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는데 육군 장교 자원으로 뽑아갔고 주로 소모품 소대장으로 쓰려고 했다. 훈련 중에 낙마한 이는 강제로 육군 병으로 복무시켰다.
이처럼 '''모집과정에서의 강제성''' 때문에 '''입대에 대한 회피와 저항'''이 있었다.
구체적인 저항도 있었는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하준식(河俊植)이 학병 지원을 거부, 덕유산 은신골로 피신해 징용·징병 기피자 73명을 규합, 광명당(光明黨)을 조직해 '''후방 교란 게릴라전을 기도'''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저항적인 거부운동은 전국 주요 산악지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지리산·운문산·포천군 산악지대, 금강산 등은 이런 학병 거부자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학병에 강제지원하기 싫다고 산에 들어간 사람들 얘기가 바로 여기서 유례한 것이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이들은 귀환하게 되는데 규모는 약 6천 명 수준이었다.
건군기에 장교 자원이었던 이들 약 90명이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조선경비대의 장교로 임관했다. 이들은 후에 한국군의 주축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학병출신들이 수적으로도 많았지만, 만주군,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나 중국군, 광복군 출신들이 각각 약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먼저, 학병출신들은 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 출신들과 달리 강제로 군 경력을 쌓았다는 명분이 있어 친일 문제로부터 자유로워 전면으로 나설수 있었다. [1] 한편, 중국군, 광복군 출신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고, 미군이 중국군, 광복군 출신들의 교육 경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미군과 자주 충돌하여 미군의 절대적 영향을 받은 초기 한국군의 주력으로 성장하기가 힘들었다.[2]
즉, 학병 출신들은 만주군, 일본군 지원병 출신들과 달리 친일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우며, 나이가 어려 미군 고문관들과 잘 지냈기 때문에, 한국군내의 가장 주류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들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어 끌려간 불행한 이들로 친일과 거리가 먼 희생양으로 생각하고 지원병 출신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경우(사실 지원병들도 대다수는 일제의 강요로 억지로 지원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지원병 문서를 참고)가 많은데 일제강점기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
학병은 전문학교, 대학 재학 이상의 고학력자들 위주였고 지원병은 기껏해야 소학교 졸업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자녀에게 그런 고등교육을 시킬수 있는 집안이 과연 가난한 집이었을까? 학병들은 다는 아니지만 대다수가 먹고 살만한 집안이었고 반대로 지원병은 8~9할이 소작농 자제였다. 그럼 다시 학병집안의 부는 어디서 나왔을까? 학병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그들의 선대들이 빈농을 착취해서 모은 부(富)를 바탕으로 고등교육을 받았다. 반대로 지원병들의 선대들은 착취당하던 사람들이었다.(김윤식,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
이들 '학병 세대'가 자신의 체험과 생각을 담아서 쓴 글들은 광복 이후 오랫동안 하나의 문학 장르가 될 정도로 널리 퍼졌다.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고뇌, 선택받은 최고 엘리트 특권층이란 위치에서 비롯하는 자괴감, 그리고 해방 이전과 이후의 격동하는 현대사를 직접 맞닥뜨린 경험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작가 이병주, 영문학자 이가형이 이런 학병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 개요
1943년 이후에 일본 육군에 의해 징집, 또는 자원한 조선인 일본군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학도병이 올바른 표현이지만, 6.25 전쟁의 영향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학도병은 한국전에 참전한 소년병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고정된 편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학도병'이 아닌 '학병'이라는 단어를 쓰면 상대는 알아듣지 못한다. 해당 제도의 세부내용은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확인할 것.
1938년부터 일본군은 인원이 부족하자 지원병제를 도입했다. 조선지원병은 당시 불경기라든가 공직 진출 등의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1944년까지 17,664명을 뽑았다. 1944년부터 징병제를 적용했는데 그 전인 1943년에 전문학교 등 고학력자들을 대상으로 학병을 뽑았다.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 유학생을 강제로 뽑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학병은 강제입대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는데 육군 장교 자원으로 뽑아갔고 주로 소모품 소대장으로 쓰려고 했다. 훈련 중에 낙마한 이는 강제로 육군 병으로 복무시켰다.
이처럼 '''모집과정에서의 강제성''' 때문에 '''입대에 대한 회피와 저항'''이 있었다.
구체적인 저항도 있었는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하준식(河俊植)이 학병 지원을 거부, 덕유산 은신골로 피신해 징용·징병 기피자 73명을 규합, 광명당(光明黨)을 조직해 '''후방 교란 게릴라전을 기도'''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저항적인 거부운동은 전국 주요 산악지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지리산·운문산·포천군 산악지대, 금강산 등은 이런 학병 거부자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학병에 강제지원하기 싫다고 산에 들어간 사람들 얘기가 바로 여기서 유례한 것이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이들은 귀환하게 되는데 규모는 약 6천 명 수준이었다.
건군기에 장교 자원이었던 이들 약 90명이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조선경비대의 장교로 임관했다. 이들은 후에 한국군의 주축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학병출신들이 수적으로도 많았지만, 만주군,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나 중국군, 광복군 출신들이 각각 약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먼저, 학병출신들은 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 출신들과 달리 강제로 군 경력을 쌓았다는 명분이 있어 친일 문제로부터 자유로워 전면으로 나설수 있었다. [1] 한편, 중국군, 광복군 출신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고, 미군이 중국군, 광복군 출신들의 교육 경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미군과 자주 충돌하여 미군의 절대적 영향을 받은 초기 한국군의 주력으로 성장하기가 힘들었다.[2]
즉, 학병 출신들은 만주군, 일본군 지원병 출신들과 달리 친일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우며, 나이가 어려 미군 고문관들과 잘 지냈기 때문에, 한국군내의 가장 주류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들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어 끌려간 불행한 이들로 친일과 거리가 먼 희생양으로 생각하고 지원병 출신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경우(사실 지원병들도 대다수는 일제의 강요로 억지로 지원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지원병 문서를 참고)가 많은데 일제강점기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
학병은 전문학교, 대학 재학 이상의 고학력자들 위주였고 지원병은 기껏해야 소학교 졸업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자녀에게 그런 고등교육을 시킬수 있는 집안이 과연 가난한 집이었을까? 학병들은 다는 아니지만 대다수가 먹고 살만한 집안이었고 반대로 지원병은 8~9할이 소작농 자제였다. 그럼 다시 학병집안의 부는 어디서 나왔을까? 학병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그들의 선대들이 빈농을 착취해서 모은 부(富)를 바탕으로 고등교육을 받았다. 반대로 지원병들의 선대들은 착취당하던 사람들이었다.(김윤식,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
이들 '학병 세대'가 자신의 체험과 생각을 담아서 쓴 글들은 광복 이후 오랫동안 하나의 문학 장르가 될 정도로 널리 퍼졌다.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고뇌, 선택받은 최고 엘리트 특권층이란 위치에서 비롯하는 자괴감, 그리고 해방 이전과 이후의 격동하는 현대사를 직접 맞닥뜨린 경험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작가 이병주, 영문학자 이가형이 이런 학병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2. 출신 인물
- 김계원
- 김수환: 조치대학 재학 중에 강제 징집당해 육군사관후보생으로 교육받다가 육군 병사로 끌려갔다.
- 김용배
- 김익렬
- 김인(1924)
- 김종갑
- 김종오
-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관련 회고록으로 『장정』이 있다.
- 김형일
- 류병현
- 민기식
- 박경원(1923)
- 박병권
- 박병배
- 박원근 : 제2작전사령관
- 백석주 : 제 2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 백선진 : 기획재정부 장관
- 서종철
- 선우휘: 작가 및 언론인.
- 이가형: 영문학자. 자전적 소설로 『분노의 강』(1993)이 있다.
- 이기백: 역사학자.
- 신상초: 관련 회고록으로 『탈출』(1966)이 있다.
- 장도영
- 장준하: 언론인 및 정치인. 관련 회고록으로 『돌베개』가 있다.
- 장철부
- 최석(군인) : 군단장, 1군 부사령관
- 최영희
- 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