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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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範敎
1888년 7월 27일 ~ 1951년 12월 29일
대한민국의 보건의료인,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명은 이상백(李相伯)이다.
1888년 경상도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에서 이종하(李淙夏)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영천군(현 경상북도 영천시 과전동)#으로 이주하였다.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동산병원 의학부강습소 4년을 수료하였다.
졸업 후 대구에서 동산병원을 개업하여 의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시위에 참가하고 일경의 지명수배를 피하여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교통부의 교통위원에 임명되어 정보의 수집 및 검토, 교환, 연락과 기밀문서의 교환 등 통신 업무에 주력하면서 독립운동 자금 수집 및 독립운동에 주력할 인재를 발굴·양성하는 임무도 겸하였다.
그해 11월에는 임시정부 경상북도 특파원에 임명되어 비밀리에 귀국,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항일 선전·군자금 모집·임시정부 연락 임무 등 국내 활동을 수행하던 중, 체포 위기를 여러 번 모면하고 다시 중국 펑톈으로 건너가 국내 출입 안내역 및 연락책으로 활동하였으며, 12월에는 러시아 니콜리스크에 배영학교(培英學校)와 병원을 설립하고 3년간 교장을 맡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계몽사상을 교육시켰다.#
1921년에는 자유시 참변으로 연해주 이만(Iman: 현 달네레첸스크, Dal’nerechensk) 시를 탈출한 이범석을 배영학교의 훈련부장으로 채용하여 약 6개월간 재직하면서 교육사업 및 독립운동 방안 강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1922년 6월 학교 관련 업무로 귀국, 업무를 끝마치고 니콜리스크로 돌아가려 했으나, 일제 경찰의 강압에 의해 귀환하지 못하고 고향 영천면 과전동에 의원을 개원하여 의료업에 종사하였다. 1941년 4월에는 영천군 청통면 원촌리로 이주하여 동광의원을 개원하여 의사로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8.15 광복 후 미군정 때인 1945년 11월 군정청 영천군수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여 청도군 지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경상북도 영천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그후 1951년 12월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사후 1969년 12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제헌국회의원 재직 시의 공적으로 국민훈장 무궁화훈장에 추서되었으며 1983년에는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이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룡동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李範敎
1888년 7월 27일 ~ 1951년 12월 29일
1. 개요
대한민국의 보건의료인,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명은 이상백(李相伯)이다.
2. 생애
1888년 경상도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에서 이종하(李淙夏)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영천군(현 경상북도 영천시 과전동)#으로 이주하였다.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동산병원 의학부강습소 4년을 수료하였다.
졸업 후 대구에서 동산병원을 개업하여 의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시위에 참가하고 일경의 지명수배를 피하여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교통부의 교통위원에 임명되어 정보의 수집 및 검토, 교환, 연락과 기밀문서의 교환 등 통신 업무에 주력하면서 독립운동 자금 수집 및 독립운동에 주력할 인재를 발굴·양성하는 임무도 겸하였다.
그해 11월에는 임시정부 경상북도 특파원에 임명되어 비밀리에 귀국,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항일 선전·군자금 모집·임시정부 연락 임무 등 국내 활동을 수행하던 중, 체포 위기를 여러 번 모면하고 다시 중국 펑톈으로 건너가 국내 출입 안내역 및 연락책으로 활동하였으며, 12월에는 러시아 니콜리스크에 배영학교(培英學校)와 병원을 설립하고 3년간 교장을 맡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계몽사상을 교육시켰다.#
1921년에는 자유시 참변으로 연해주 이만(Iman: 현 달네레첸스크, Dal’nerechensk) 시를 탈출한 이범석을 배영학교의 훈련부장으로 채용하여 약 6개월간 재직하면서 교육사업 및 독립운동 방안 강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1922년 6월 학교 관련 업무로 귀국, 업무를 끝마치고 니콜리스크로 돌아가려 했으나, 일제 경찰의 강압에 의해 귀환하지 못하고 고향 영천면 과전동에 의원을 개원하여 의료업에 종사하였다. 1941년 4월에는 영천군 청통면 원촌리로 이주하여 동광의원을 개원하여 의사로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8.15 광복 후 미군정 때인 1945년 11월 군정청 영천군수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여 청도군 지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경상북도 영천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그후 1951년 12월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사후 1969년 12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제헌국회의원 재직 시의 공적으로 국민훈장 무궁화훈장에 추서되었으며 1983년에는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이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룡동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