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지 하츠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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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3일, 취임 기자회견장에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No.85
츠지 하츠히코 (辻発彦)
'''생년월일'''
1958년 10월 24일
'''국적'''
일본
'''출신지'''
사가현 오기 시
'''학력'''
사가 현립 사가 동부 고등학교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드래프트 2순위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 (1984~1995)'''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6~1999)
'''지도자'''
야쿠르트 스왈로즈 2군 주루수비코치 (2000~2001)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1군 주루수비코치 (2002~2003)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군 타격코치 (2004)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내야수비주루코치[1] (2006)
주니치 드래곤즈 2군 감독 (2007~2009)
주니치 드래곤즈 1군 종합코치 (2010~2011)
주니치 드래곤즈 1군 3루코치 (2011)[2]
주니치 드래곤즈 1군 내야수비주루코치 (2014)
주니치 드래곤즈 1군 야수종합코치 (2015)
주니치 드래곤즈 2군 야수종합코치 (2016)
주니치 드래곤즈 1군 내야수비작전코치 (2016)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2017~)
<color=#373a3c> '''1993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1992년
사사키 마코토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322

'''츠지 하츠히코'''
'''(세이부 라이온즈)'''
'''.319'''

1994년
이치로
(오릭스 블루웨이브)
.385
<color=#373a3c> '''1993년 퍼시픽리그 최고 출루율'''
1992년
키요하라 카즈히로
(세이부 라이온즈)
.401

'''츠지 하츠히코'''
'''(세이부 라이온즈)'''
'''.395'''[3]

1994년
이치로
(오릭스 블루웨이브)
.445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감독'''
타나베 노리오
(2014.6~2016)

'''츠지 하츠히코'''
'''(2017~)'''

현임 감독
1. 개요
2. 프로 입단 이전
3. 프로선수 시절
4. 은퇴 이후
5. 지도자 시절
6. 여담


1. 개요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전 프로야구 선수, 해설자, 평론가, 코치. 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세이부 황금기에 공헌했던 명 2루수로, 1993년 수위타자와 최고출루율을 수상했으며, 골든글러브 8회와 베스트나인 5회 수상이력을 지니고 있다. 2루수 골든글러브 8회는 해당 포지션에서는 역대 최다 기록이며, 88년부터 94년까지 7회 연속으로 수상했다. 포스트시즌 타이틀로는 1990년과 1994년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2. 프로 입단 이전


중학교 땐 161cm 정도의 그저그런 작은 키였지만, 고등학교 때 폭풍성장하면서 졸업 당시엔 당시 일본 기준으로는 상당한 장신인 '''182cm'''로 성장했다. 그 뒤 일본통운 우라와에 입사해 사회인야구에 뛰어들어 4번타자와 3루수로 활약했다. 그 후 1983년 드래프트 2위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한다.

3. 프로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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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부 시절.
입단 후, 그의 2루수로써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스카우터와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 등에 의해, 1985년부터 본격적으로 2루수로 전환하여 유격수 이시게 히로미치와 키스톤 콤비를 구성해 주력선수로 활약했으며, 특히 파리그 골든글러브를 8차례 차지하는 등 수비에서 맹활약했다. 또한 공격에서도 빠른 발과 정교한 타격을 앞세워 주로 1번타자를 맡아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지휘하는 팀의 9차례의 퍼시픽리그 우승과 6차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다만 장신의 당당한 체구에도 장타력은 부족하여 두 자릿 수 홈런을 친 시즌은 1번도 없었고, 또 부상치레가 꽤 많아서 1987년 시즌에는 매우 부진했다.
이렇게 세이부의 주력선수로 활약해왔지만 점점 기량이 하락해갔고, 결국 1995년 '''73안타 2홈런 20타점 7도루 타율 .238''' 이란 처참한 성적을 찍으면서 전력외 통보를 받는다.[4] 구단 측에서 코치 전임을 제안했지만 현역 생활을 계속하고 싶었던 츠지는 이를 거절. 자유계약으로 방출. 시즌 오프 때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하게 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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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르트 시절.
입단 첫해인 1996년 츠지는 부진에서 벗어나겠다는 듯이 '''133안타 2홈런 41타점 9도루 타율 .333''' 의 호성적을 기록하며 재기의 희망을 보였지만, 이후 체력 문제와 기량 하락으로 성적이 하락하며 주전에서 벗어났고, 결국 199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통산성적은 '''1562시합 5956타석 1462안타 56홈런 510타점 242도루 타율 .282'''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 야쿠르트, 요코하마, 주니치 등에서 수비주루 코치를 맡았고 평론가, 해설가 등으로도 활동했다.

5. 지도자 시절


2016년 시즌 오프에 함께 키스톤을 맡았던 타나베 노리오의 후임으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으로 취임했다. 황금시대 키스톤 단짝이 말아먹어 놓은 팀을 맡아서 시즌 초부터 견실하게 상위권을 유지했으며 올스타전 이후로는 팀의 암흑기를 열어젖혔던 2년전의 끔찍한 사태와 정확히 반대되는 '''13연승'''을 구가하면서 상위권을 맹추격하고 있다. 1위를 달리는 팀은 버거운 상황이지만 2위는 노려볼 위치까지 추격해 왔다. 전임 감독이 가지고 있던 전력에서 특별한 보강없이 도리어 로테이션의 한 축이던 키시 타카유키마저 FA로 라쿠텐에게 뺏긴 상황에서 오히려 그 시절보다 더 잘나가고 있으니 전임 감독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더욱 두드러진다.
다만 황금시대 동료였던 이토 쓰토무, 와타나베 히사노부 등도 초짜감독이라는 우려를 씻고 부임 첫해에 일본 시리즈 우승까지 거머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도리어 감독 커리어가 쌓일수록 퇴보하는 모습을 보인 전례가 있어 이 사람이 과연 명감독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듯.
2017년 143전 79승 61패 3무를 기록하며 퍼시픽리그 2위를 찍는 등 감독 데뷔 첫 해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3위 라쿠텐에게 업셋을 당했다.
그리고 2018년, 팀을 10년만의 퍼시픽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2년 전의 팀 상태를 생각하면 지도력을 평가해야 하겠으나 2018년 시즌에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소프트뱅크에게 또 업셋을 당하며 10년만의 일본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면서 단기결전에서의 대응책 마련이 요구된다는 숙제를 남겼다.
2019년은 작년 시즌의 10승+선발 3명[6]이 한꺼번에 사라지면서 B클래스와 A클래스 사이를 전전하는 등 영 좋지 못한 전반기를 보냈다. 그러나 여름부터 타격의 힘을 믿고 선두 소뱅을 맹추격, 9월 11일 현재 치열한 선두싸움을 하는 위치까지 팀을 끌어올리고 우승까지하는데 성공했다. 이쯤 되면 확실히 전임 감독들보다 우수한 역량을 보이고 있다고 해도 될 듯. 하지만 2019년 클라이맥스 파이널에서도 또또 업셋을 당해 탈락해버렸다. 작년과는 달리 어드밴티지 빼면 1승도 못 얻으면서 단기결전에서의 약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래도 취임 전의 부실한 팀을 리그 2연패를 할 정도의 강팀으로 탈바꿈한 것이 대단한 업적이라는 것에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구단은 츠지 감독과 계약 연장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2020년은 사상 최강을 논하던 타격이 완전히 사망(...) 하면서 5위까지 추락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불펜을 견실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여차저차 A클래스 3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또한 2년 재계약에 합의했다.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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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일본시리즈 제패에 단 1개의 아웃카운트를 남겨놓은 9회초 세이부의 수비 때 그동안의 설움[7]이 터져버린 키요하라 카즈히로를 급히 가서 위로해준 2루수가 츠지였다. [8]
포수 라이벌이자 감독 라이벌이었던 모리 마사아키노무라 카츠야 두 명 모두를 감독으로 모셨던 선수 2명 중의 한 명이다. 다른 한 명은 와타나베 히사노부. 1990년대 중반 세이부 황금시대 멤버들을 대거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둘은 FA를 통해 제비네에 합류했다.
[1] 3루 베이스 코치[2] 토마시노 세이지의 대행.[3] 참고로 1985년부터 양대리그 모두 최고출루율 시상을 시작한 이래론 역대 최저 최고출루율 기록이다.[4] 2억엔이나 되는 그의 고연봉도 한 몫 했다.[5] 당시 감독은 노무라 카츠야로 기량이 쇠퇴하던 노장 선수들을 조련하는 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노무라 재생공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6] 키쿠치 유세이, 타와타 신사부로, 에노키다 다이키[7] 오매불망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만을 꿈꿔왔으나 요미우리와 고교 동기생 쿠와타 마스미에게 배신당했던 경험[8] 당시 투수였던 쿠도 키미야스는 게임종료 후 어떤 세레머니를 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울고 있는 키요하라를 보고 1루쪽으로 공이 가게 하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쿠도의 바람대로 마지막 타구는 외야 플라이가 되었고, 중견수인 아키야마 코지가 타구를 잡으면서 일본제패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