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다쓰노리

 



'''하라 다쓰노리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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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신인'''
1980년
오카다 아키노부
(한신 타이거스)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2년
츠다 츠네미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3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선수(MVP)'''
1982년
나카오 타카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4년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2~1983년 센트럴리그 최다 승리타점[25]'''
1981년
사노 노리요시
(한신 타이거스)
15승리타점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14승리타점(1982년)
20승리타점(1983년)'''

1984년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자이언츠)
14승리타점

'''1983년 센트럴리그 최다 타점'''
1982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95타점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103타점'''

1984년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102타점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
(1993~2001)

'''하라 다쓰노리'''
'''(2002~2003)'''

호리우치 츠네오
(2004~2005)
호리우치 츠네오
(2004~2005)

'''하라 다쓰노리'''
'''(2006~2015)'''

타카하시 요시노부
(2016~2018)
타카하시 요시노부
(2016~2018)

'''하라 다쓰노리'''
'''(201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오 사다하루
(2006)

'''하라 다쓰노리'''
(2009)

야마모토 코지
(2013)

[image]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2012 아시아 시리즈에서의 하라 다쓰노리(2기 감독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 No.83
하라 다쓰노리 (原辰德)
'''생년월일'''
1958년 7월 22일
'''국적'''
일본
'''출신지'''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1]
'''학력'''
도카이대학 부속 사가미 고등학교
도카이대학
'''포지션'''
'''3루수''', 2루수, 1루수, 좌익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0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1~1995)'''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야수종합코치 (1999)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00~2001)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002~2003''', '''2006~2015''', 2019~)
1. 소개
2. 선수 시절
3. 은퇴 이후
3.1. 요미우리 감독 1기
3.2. 요미우리 감독 2기
3.3. 요미우리 감독 퇴임 이후
3.4. 요미우리 감독 3기
4. 감독 성적


1. 소개


일본프로야구요미우리 자이언츠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자 현재 감독. [2]
[3]

2. 선수 시절


[image]
후쿠오카 현 오무타 시에서 아마추어 야구계의 명지도자였던 하라 미츠구의 아들로 태어난 다쓰노리는 아버지가 도카이 대학과 대학 부속 고등학교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초등학교 2학년 때 가나가와현으로 이주하여 아츠기시, 사가미하라시에서 자랐으며 아버지가 감독을 맡았던 사가미하라 고등학교와 도카이 대학에 입학하여 고등학교 땐 1학년 때부터 주전 3루수에 자리잡아 야구부의 하계 고시엔 '''3년 연속 진출(!)'''[4]과 춘계 고시엔 1회 진출을 이끌었고, 대학교 땐 3번의 MVP, 7번의 베스트나인 수상과 더불어 2차례나 타격 삼관왕을 달성하는 등의 화려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 뒤, 1980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1순위로 지명을 받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5] 프로 데뷔 시즌이었던 1981년에 22홈런 67타점을 기록하여 신인왕을 수상했고, 1982년~1983년에는 2년 연속 최다 승리 타점을 기록, 1983년에는 103타점을 기록하여 타점왕에 오른 것과 동시에 센트럴 리그 MVP를 석권했다. 같은 4번 타자 3루수고 잘생긴 외모 덕분에 제2의 나가시마 시게오라 불릴 정도로 요미우리에서 인기가 많았던 선수.[6]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감독으로 부임한 뒤에도 티셔츠 등 굿즈 판매량은 꾸준히 많았다고 한다.
1986년 9월 2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 도중 타석에서 상대 투수였던 츠다 츠네미가 던진 공을 타격하던 와중에 왼쪽 손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하면서 팀 전력에서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7]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개인 최저인 113경기 출장에 그쳤다. 그래도 그 후 부활에 성공하여 1987년과 1988년에 2년 연속 타율 3할과 30홈런을 기록하여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등 나카하타 키요시, 워렌 크로마티 등과 함께 요미우리의 중심타자로 굳건히 섰다. 1989년~1992년에는 일본프로야구 선수회 회장을 지냈다.
1995년 10월 8일에 도쿄 돔에서 열린 은퇴 경기(대 히로시마 27차전)에 출장, 타석에서 좌중간을 가르는 개인 통산 382호 홈런을 기록하며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8] 하지만 이날 팀은 마키하라 히로미가 혼자서 3점을 내주면서 3-1로 졌다.
통산 성적은 1697경기 출장, 타율 2할 7푼 9리, 1675안타, 382홈런, 1093타점. 비록 카와카미 테츠하루,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 팀의 기라성 같은 레전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요미우리에서는 준 레전드 대접을 받고 있으며, 구단 측은 그의 등번호인 8번을 "준 영구결번"으로 제정했다.[9]
현역시절 말쑥한 샐러리맨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배트 플립을 찰지게 하는걸로 유명했다. 아마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면 통산 200개 몸에 맞는 볼을 기록했을듯(...)
그 외에도 89년 한신 타이거즈 전에서 열받은 한신 팬이 자신이 친 홈런볼을 그라운드로 던져버리자[10] 베이스를 도는 와중에 그걸 집어서 다시 관중석으로 던지기도 했다(...)https://youtu.be/t5sbuhhMgMg?t=1560

3. 은퇴 이후


NHK 야구해설위원 등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고, 1999년~2001년에는 친정팀인 요미우리로 복귀하여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지휘하에 타격 코치를 지내며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3.1. 요미우리 감독 1기


2002년에 나가시마 감독의 후임으로 차기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부임 첫 해인 2002년에 86승 2무 52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세이부 라이온스와 대결한 일본시리즈에서도 4전 전승으로 세이부를 제압하고 일본프로야구 정상에 오른다. 시즌 종료 뒤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동시 우승을 이끈 공로로 일본 야구계 최고 권위의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다음 해인 2003년에는 구단 수뇌부와의 갈등으로 2년만에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2005년 시즌 말미에 호리우치 츠네오가 팀 성적 부진으로 감독직을 사임하여 다시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11]

3.2. 요미우리 감독 2기


2003시즌에 사임하면서 하라와 함께 물러난 코치진들을 그대로 데리고 재취임하였다. 시즌전 FA로 주니치의 노구치 시게키,세이부의 도요다 키요시, 외국인선수로 지바롯데에서 이승엽, 오릭스에서 제레미 파웰, 마이너리그 트리플A에서뛰었던 조 딜론과 게리 글로버를 영입하였고 트레이드로 이승엽과 함께 지바롯데에서 뛰었던 고사카 마코토를 데려왔다.
그러나 복귀첫해인 2006년에는 커리어 하이를 찍은 이승엽 정도를 빼면 주전 선수들의 성적 부진과 줄부상으로 악재가 겹치면서 65승 2무 79패라는 성적을 기록, 4위로 추락하여 팀이 2년 연속 B클래스(하위권을 지칭하는 일본 언론의 표현)로 기록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2007년에는 2위팀이었던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의 주니치 드래곤스와 반경기차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주니치에게 완패를 당해 일본시리즈 진출 티켓을 따내는 데는 실패했다,
2008년에는 한때 10경기 넘게 경기차가 나던 한신 타이거즈를 기록적인 막판 스퍼트 끝에 따라잡아 역전 우승을 이룬다. 이 우승은 1994년 거인의 역전우승을 일컫는 '메이크드라마'에 비견되어 '메이크레전드'라고도 칭해졌다.[12]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한신을 잡고 올라온 3위 팀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으며 일본시리즈 진출에도 성공했지만,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 맞대결에서 3승 4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일본 제일은 실패.
2008년 10월 28일에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차기 감독으로 부임하여 "사무라이 재팬(侍JAPAN, サムライジャパン)"이라는 팀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2009년 3월 24일, 결승전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연장 10회의 접전 끝에 스즈키 이치로임창용에게 적시 2루타를 때려내며 5대 3으로 승리, 팀을 2회 연속 우승을 이끄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극적 우승 때문인지 이후에도 이 슬로건은 일본 야구 국대를 상징하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된다. 같은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맡은 팀을 모두 우승시키는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사실 감독이 된 것 자체가 '''요미우리의 철저한 성골주의 때문이지''', 그나마 젊은 덕장 외엔 감독으로서 특징같은 것은 없다는 게 당시의 평가였다. 그냥 일본 야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그대로 답습하는 작전 구상에 상황판단력도 그냥 그래서 은근히 호구라고 많이 까이는 감독. 게다가 말투가 좀 질질 끄는 경향이 있어 2ch 등에서는 멍청해 보인다고 자주 까인다(...). 어찌보면 오치아이 히로미츠와는 스타일 상 정반대에 서있는 감독이다.[13]
대신에 야구 외적인 인간관리 부분에 있어서는 호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 자잘한 작전 구사나 기술적인 면보다는 선수단 관리능력과 거시적 운영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일본 내의 평가이다. 또 립 서비스가 좋아 인터뷰 등에서 자기 팀 선수뿐만 아니라 상대 팀 선수들에 대해서도 칭찬을 자주 하는데 이런 점 때문에 신사감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14]
2008년까지만 해도 이승엽에 대해 상당한 신뢰를 보였으며 이승엽을 많이 변호해주고 주전으로 썼는데, 이건 선수생활 시절에 하라가 이승엽과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였기 때문에 그의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라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2008년에 베이징 올림픽 야구 4강전에서 벌어질 일을 '''예언'''한 것은 그야말로 신화. 당시 한국이 일을 낸다면 '''승짱'''이 일낸다고 예언했는데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같은해 정규리그에서 극도의 부진을 보인 이승엽을 어떻게든 기용해보려 했으며, 2008년 일본시리즈에서는 7경기동안 삼진만 12개를 먹으며 .111이라는 극악의 부진을 보였는데도 이승엽을 쓰지 말라는 언론과 요미우리 OB의 압박을 물리치면서 마지막 7차전까지 끝까지 믿고 선발 라인업에 기용했다. '''그리고 팀은 졌다.''' [15]
물론 2009년에 이승엽을 내친것은[16]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말할것도 없이 이승엽 본인이 슬럼프에서 벗어날 기미가 안보이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기가 발굴한 신인 기용에 맛들려서 이승엽이 아오안이 되어버린것(...). 실제로 하라가 발굴한 가메이 요시유키, 마쓰모토 데쓰야, 야마구치 데쓰야 등이 A급 활약을 해왔고, 그러다보니 성적 안나오는 용병을 밀래야 밀수가 없었던것.(...)[17]
'''그런데''' 2012년. 불륜 추문 및 협박 사건이 매스컴에 폭로되면서 하라 보살이라던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다.# 일단 20일 사죄문을 발표했지만 야쿠자에게 협박당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미지를 중시하는 요미우리 측에서 이후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이후 유야무야 됐는지 조용한 상태다. 사실 OB측에서 이 사람을 당장 자른다고 해도 문제인 게, 당장 감독직을 수행할 사람이 없다. 타카하시 요시노부마쓰이 히데키가 유력한 감독 후보지만 다카하시는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팬들이 별로 지지하지 않았고 마쓰이는 막 은퇴한 후 코치로 발을 들이기 시작했지만 하라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벤치코치 등으로 최소 3년 이상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2012년에는 3년만의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했고, 2013년에는 리그 2연패를 달성한다. 일본시리즈에서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의 조력자가 되고 말았지만 결코 실패한 시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2014년 들어와서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하는데, 그 계기는 2014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2014년까지 우승하면서 리그 3연패까지 성공했으나 8월 한 때 2위 한신과의 경기 차가 반 게임까지 줄어들은 적도 있었고, 스가노 도모유키 등 주축 선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최상의 전력이 아닌 가운데 숙적 한신 타이거스를 맞게 되었다. 그래도 워낙 전력이 전력인지라 설마 어드밴티지 1승까지 먹고도 지겠냐는 분위기가 대세였으나, 상대팀의 용병 맷 머튼마우로 고메즈 등에게 두들겨 맞고[18] 마무리 오승환[19]의 역투에 눌리면서 힘한번 못 써보고 허무하게 4연패로 어드밴티지 1승이 무색한 참패를, 그것도 홈인 도쿄 돔에서 당하고 말았다. 클라이막스 시리즈 사상 최초이자 2020 시즌까지 유일한 '''어드밴티지 1승을 끼고도 4연패'''라는 예상도 못했던 참패로 그동안 하라 감독에 우호적이었던 구단의 분위기가 돌변하여 부정적으로 바뀌면서 지도력에 관한 말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계약 만료를 맞는 2015년 시즌은 하라 감독의 연임 여부를 결정하는 시험대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본인에게는 감독인생의 커다란 고비가 될 2015년 시즌에 하필이면 타선이 집단으로 물빠따화 하면서 투수력으로 근근히 버티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교류전에서 11위를 하는 참패에 이어 '''리그에 소속된 모든 팀이 승률 5할을 밑도는 막장 상황'''[20]이 연출되는 가운데 구단은 시즌이 끝나가도록 재계약에 대해서 함구한 채로 있었다. 이는 구단이 하라 감독의 재계약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9월이 다 되어가도록 1위와는 닿을듯 말듯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2~3위를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시즌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후임 감독 후보에 관한 설왕설래가 언론에 보도되는 등 하라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9월 들어와서 바짝 기세를 올린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당해내지 못하고 1973년 이후의 리그 4연패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후반전 내내 안정되게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리그 2위로 정규시즌을 마감하여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는 성공했다.
다만 이 팀은 언제나 그래왔지만 목표가 '우승으로 리그 4연패 달성'이었기 때문에 CS 진출 정도에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감독 재임기간이 10년을 넘어가면서 장기집권에 의한 피로감이 서서히 드러나는 가운데 구단 내외부로부터 현재의 성적과 물빠따로 전락한 팀 전력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21] 리그 우승은 이미 실패했고 이제 가능성이라고는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의 역전으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여 우승하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일본시리즈 우승을 놓치면 경질될 것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는 가운데 항상 자이언츠 사랑을 강조해온 하라 감독과 구단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그런 상황에서 한신 타이거스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를 2승 1패로 통과하면서 작년의 수모를 되갚아줬다. 그리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예상을 뒤엎고 1차전을 잡아내며 1승1패로 동률을 이뤘으나 이변도 거기까지. 2차전부터 내리 3연패로 파이널 스테이지 4차전에서 패배하여 탈락했다. 25이닝 연속 무득점을 이뤄낸 물타선의 활약이 압권. 결국 파이널 스테이지 탈락 직후에 구단에 사퇴 의사를 밝히고 10년에 걸친 감독 생활을 마무리했다.# 후임 감독은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맡게 되었다.
감독 자리에 있을 때는 멍청하다, 선수 덕이다, 사람만 좋다 등등 여러가지로 비판을 받았지만, 막상 감독자리에서 사퇴하고 나자 감독으로서의 업적이 새삼 재평가를 받는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감독 재임 12년동안 센트럴리그 우승 7번, 일본시리즈 우승 3번[22]'''에 4위 이하는 단 1번. 통산 승률은 5할7푼2리로 구단에서 엄청난 버프를 줬던 나가시마 시게오보다도 높으며 V9 시대 이후 재임감독 중 일본시리즈 우승, 리그 우승 경력이 가장 많다. 아무리 선수가 좋은 팀을 지휘했다고 해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휘를 하면서 이정도 성적을 내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구단 측에서 후임 감독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탓에 감독 선임까지 상당한 혼란이 예상이 되고, 호리우치 츠네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준비도 없이 갑자기 감독이 된 사람이 팀을 제대로 꾸려나가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지라 자칫하면 그 분 시절을 방불케하는 암흑기의 도래도 각오를 해야 될 상황. 누가 후임 감독이 됐든 웬만큼 수완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에는 팀 분위기가 수습이 되고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분위기가 형성이 되면서 점점 평가가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퇴임후 OB 키요하라 카즈히로마약 스캔들, 요미우리 투수들이 연루된 불법 도박 사건 등 구단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터져나오는 상황이라 만약 재계약에 성공해서 감독자리에 계속 있었으면 각종 문제들에 대한 선수단 관리의 책임을 독박 쓸 상황이었는데 여러모로 험한 꼴 안보고 물러난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 어쩌면 이미 팀 분위기 돌아가는 꼴을 내부에서 미리 보고서 재계약에 크게 미련을 안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하라 감독 재임 시절의 곪은 문제가 지금 터져나온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현재는 구단도 본인에게 선수단 관리의 책임을 묻고 있지는 않는 상황이며 본인도 문제의 사건들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3.3. 요미우리 감독 퇴임 이후


첫번째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구단 특별고문 겸 니혼TV 해설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도쿄방송(TBS)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라디오를 진행하였다
두번째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뒤 구단의 고문 겸 해설위원으로 지내는 중인데,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끝으로 고쿠보 히로키가 계약 만료를 이유로 사임 의사를 밝혀 공석이 된 대표팀 감독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신임 감독의 임무는 아직까지 일본이 한 번도 달성하지 못한 올림픽 야구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과 2021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우승을 탈환하는 임무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팀 감독 자리에 취임하기 까지 아무런 지도자 경험이 없던 고쿠보와는 달리 풍부한 지도자 경험과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 감독이라는 실적이 있고 2018년에 만 60세로 나이도 '비교적' 많지는 않은 편이라 최적의 감독 후보로 여겨지고 있었으나 이나바 아츠노리가 일본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렇게 야인으로 지내다가 2018년 시즌을 끝으로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감독 사퇴를 발표한 바로 다음 날, 요미우리 측에서 정식으로 감독 오퍼를 넣었음이 밝혀졌다. 물론 기사가 난 당일 인터뷰에 응한 하라는 "시즌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말할 수 없다" 라는 말을 하였지만, 뒤집어 말하면 요미우리가 시즌을 다 소화하면 발표하겠다 라고 인증 한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이다. 애초에 메이저 언론사도 이미 물밑에서 교섭은 끝났고 하라 본인도 긍정적으로 검토중 이라고 보도하는 등 사실상 내년부터 감독 복귀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3.4. 요미우리 감독 3기


2018년 10월 23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감독 3기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후임 감독이자 전임 감독인 타카하시 요시노부는 특별고문으로 취임하며 서로 역할을 바꿨다. "등번호는 1기 감독시절에 사용했던 83번으로 결정했다" 11월 8일 홈구장 도쿄 돔에서 미일올스타전 개막 하루전에 열린 MLB 올스타와의 친선경기부터 감독직으로 공식복귀하였다. 만약 2021 시즌까지 감독을 맡게되면 자신의 롤모델이자 스승인 나가시마 시게오를 제치고 요미우리 역대 최장수 감독에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선수 SNS를 금지하겠다는 인터뷰를 해서 요미우리 팬들에게도 시대에 맞지 않는 구시대적 사고라며 비판받고 있다.[23] #
지난 두번의 임기동안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세번째 임기에 대한 요미우리 팬들의 반응은 이전 임기 때와 비교해서 매우 냉소적이다. 거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가장 큰 원인은 전임인 다카하시 요시노부에 대한 동정의 시선이다. 다카하시 본인의 팀 운영이 좋지는 않았지만 감독 취임 때부터 본인의 의사와는 거의 상관없이 강제로 은퇴를 당하고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앉혀졌다는 인상이 취임 때부터 강했다. 그런 상황에서 본인이 팀을 운영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한 보강 요청은 하나도 들어주지 않은 채 엉뚱한 데다가 돈을 써놓고는 "자, 이만큼 돈을 써줬으니 성적을 내야지?"라는 식으로 성적에 대한 압박이 여기저기서 들어오고 본인을 보필해야 할 코치진들은 전부 자기보다 선배급이라 이건 감독을 보필하는 코치인지 감독의 팀운영에 어깃장만 놓는 시어머니인지 모르는 상황이 임기 내내 계속되면서 본인의 뜻을 제대로 펴지도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었다. 결국 성적을 내지 못하자 자진 사퇴의 형식으로 물러나게 됐으며 그 자리를 다시 전임 감독인 하라가 꿰차면서 감독 취임부터 사임까지 본인의 의사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채로 구단의 사정에 따라 야구인으로서의 인생이 휘둘렸다는 인상이 강해 좋지 못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다시 감독으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자이언츠 팬들도 꽤 많이 있다.
게다가 다카하시가 취임하자마자 팀 내에서 도박사건이 터지는 등 이전부터 선수단 관리가 개판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렇게 선수단 관리를 개판으로 만든 장본인이 실로 절묘한 타이밍에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먹튀행각에 이런 저런 사건이 터지면서 팀 분위 안 좋을 때는 외부에서 나몰라라 하고 있다가 조금 분위기가 수습되고 오카모토 카즈마 등 팀의 주축이 될만한 프랜차이즈 스타 후보가 육성이 되니까 후배의 자리를 뺏는 형태로 복귀를 했다. 그리고 감독으로 복귀해서는 그동안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던 프런트들에게 칼을 휘두르고 덕장의 얼굴에 가려졌던 모습들이 드러나면서 하라 본인에 대한 요미우리 팬들의 시선도 매우 차가워졌다.
거기다가 원래부터 조금만 성적이 안 나오면 금방 외부영입에 의존해온 구단이니 만큼 마루 요시히로 등의 FA 영입 등은 이해할수 있다 쳐도 그 대가로 입단할 때부터 구단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고 팀에 10년 넘게 공헌해 오면서 요미우리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우츠미 테츠야초노 히사요시 등 두 베테랑을 FA 보상선수로 내주는가 하면 그렇다고 세대교체를 꾀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활약 여부가 의심스러운 나카지마 히로유키이와쿠마 히사시 등 선수로 뛸 날이 몇년 남지도 않은 퇴물들은 데려오는 등 일관성 없는 행보를 보여서 추구하는 야구가 뭐냐는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는 우츠미와 초노가 하라 재임시절 하라와 대립각을 세웠다가 보복을 당한 거 아니냐 혹은 장래 감독 후보가 될 수 있는 선수들의 싹을 미리부터 잘라놓는 거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도 있는 상황이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라 본인이 현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든 이전 3년간의 뒤엎을 성과를 내지 못하면 세번째 임기는 어쩌면 본인의 야구인생에 흑역사가 될 가능성도 꽤 있다. 게다가 이런 저런 상황이 참작이 된 다카하시와는 달리 감독생활 1, 2년 한 것도 아닌 이른바 경험많은 베테랑 감독에다가 그러한 경력을 앞세워서 후배의 자리를 뺏는 형태로 복귀를 했으니 2019년 시즌 초반부터 납득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엄청난 비난의 폭풍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KIA 타이거즈 류승현 선수의 타격지도를 직접 해주기도 했다. #
3월 29일 마쓰다 스타디움에서 열린 시즌 개막전이자 두번째 복귀전에서 완봉패를 당했다. 이때 경기 중간에 비쳐진 모습을 보면 히로시마가 언제 이렇게 강해졌지?라며 당황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경기에서 게레로의 활약으로 복귀전 첫승을 거뒀다. 이후 전반기동안 A클래스(각 리그 1~3위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는 팀)에서 순위 경쟁을 펼치다 2차 임기 당시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에서 강했던 모습을 되살려 최근 몇년간 센트럴리그의 무덤이 된 교류전에서도 전체 3위 성적을 올렸다. 이 덕분에 6월 18일 오릭스전에서 승리하며 리그 1위를 탈환했다.
교류전 종료 후 올스타전 직전까지 10승 1패를 기록하며 리그 2위와의 격차를 9.5게임차까지 벌렸다. 사실상 센트럴 리그 전반기는 요미우리의 독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오면서 갑작스레 위기를 맞게 되는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3연전에서 예상 밖의 스윕패를 당하면서 팀의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것. 이후 3연속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며 최대 10.5게임차까지 벌어졌던 2위 요코하마와의 간격이 5.5게임차까지 줄어버린다.
7월 30일 도쿄 돔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감독으로서 통산 1000승(일본야구 전체 13번째, 요미우리 내 3번째)을 달성하였고, 경기 후 특별 행사를 치렀다. 행사 도중 꽃 장식 기념품을 치켜들고 기뻐하다 실수로 땅에 떨어트리는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다.
3.5게임차까지 좁혀진 상황에서 요코하마와 치른 3연전마저 스윕패를 기록하며 0.5게임차까지 쫓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2년차 포수 기시다를 무리하게 기용했다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는 등 위기를 자초했다. 자칫 2008년 한신 타이거즈가 당했던 치욕적인 역전을 이번엔 요미우리가 당할 위기에 처한 것. 하지만 위기의 순간 최하위 야쿠르트를 만나 3연전을 스윕, 가까스로 위기를 탈출하고 다시 2위와의 게임차를 4게임차로 벌린다. 이후 라이벌 한신을 상대로 시리즈 스윕에 성공하는 등 위기를 완전히 벗어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매직 넘버를 점등시킨 후 9월 들어 갑자기 난조가 다시 찾아왔는데, 하위권으로 쳐진 한신과 주니치를 상대로 5연패에 빠지며 갑자기 승차가 2.5게임차까지 다시 좁혀진 것. 하지만 기어코 9월 21일, 요코하마와의 원정 경기에서 연장전 끝에 3-2 승리를 거두고 매직 넘버를 0으로 만들어 2014년 이후 5년만이자 37번째 '''센트럴리그 우승을 따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 어드밴티지 1승을 선취한 상태로 리그 1위 자격으로 진출해 6년만의 일본시리즈 진출까지 노려볼 수 있게 됐다.
결국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전통의 일전 라이벌인 한신 타이거스를 어드밴티지 1승을 포함한 4승 1패로 완벽하게 제압하고 10월 13일, 2013년 이후 6년만에 일본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상대는 퍼시픽 리그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리그 우승팀 세이부를 4승 1패로 업셋하고 올라온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미 다섯번의 일본시리즈 경험이 있는 하라 감독이지만 일본시리즈에서 소프트뱅크와 붙는 것은 2002년 감독직을 맡은 후 처음 있는 일이다. 주전 야수들의 타격부진과 치명적인 실책 등으로 4:0 으로 패했다.
2020년 7월 4일 경기에서 승리하며 감독 통산 1034승을 거둬 나가시마 시게오와 타이를 이뤘다. 요미우리 구단 내에서는 공동 2위인데, 1위인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1066승이라 큰 이변이 없는 한 2020 시즌 내 기록 경신이 유력하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도 1위로 질주중이다. 그리고 9월 11일 1067승을 기록하면서 역대 요미우리 감독 승수 1위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어김없이 소프트뱅크에게 0:4로 셧아웃당했다.
요미우리의 인재영입이 무리한 FA 영입보다 육성 및 트레이드 위주로 변화하면서 충격과 공포의 트레이드가 하라 감독 이후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드래프트 1픽으로 뽑아온 사와무라 히로카즈카츠키 카즈야와 바꿔서 치바 롯데 마린스로 트레이드했다. 게다가 코바야시 세이지마저 트레이드하려는 찌라시가 계속 돌고 있다(...).

4.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
승률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2002
'''요미우리 자이언츠'''
140
86
52
2
.623
'''리그 1위'''
'''JS 우승'''
2003
140
71
66
3
.518
'''리그 3위'''[24]
-
2006
146
65
79
2
.451
'''리그 4위'''
-
2007
144
80
63
2
.559
'''리그 1위'''
'''CS2 탈락'''
2008
144
84
57
3
.596
'''리그 1위'''
'''JS 패배'''
2009
144
89
46
9
.659
'''리그 1위'''
'''JS 우승'''
2010
144
79
64
1
.552
'''리그 3위'''
'''CS2 탈락'''
2011
144
71
62
11
.534
'''리그 3위'''
'''CS1 탈락'''
2012
144
86
43
15
.667
'''리그 1위'''
'''JS 우승'''
2013
144
84
53
7
.613
'''리그 1위'''
'''JS 패배'''
2014
144
82
61
1
.573
'''리그 1위'''
'''CS2 탈락'''
2015
143
75
67
1
.528
'''리그 2위'''
'''CS2 탈락'''
2019
143
77
64
2
.546
'''리그 1위'''
'''JS 패배'''
2020
120
67
45
8
.598
'''리그 1위'''
'''JS 패배'''
'''총계'''
'''1978'''
'''1091'''
'''821'''
'''66'''
'''.571'''
'''JS: 3승4패, CS2: 5승4패, CS1: 1승2패''' ­
[1] 태어난 곳은 후쿠오카현 오무타시[2] 믿음의 야구로 인해 생긴 별명. 현재 믿음의 야구 이미지는 육성 측면에서 선수 자율성을 중시하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쿠리야마 히데키에게도 붙어 있다. [3] 보케테 발 별명. '하라 타츠노리' = '腹立つのり'[4] 알 사람들은 알테지만, 고시엔 진출은 현 내의 수많은 상대 고등학교들을 무찌르고 현에서 단 1개 고교(도쿄나 홋카이도는 2개)만 출전할 수 있어서 엄청나게 빡세다. 그런 코시엔에 3년 연속으로 진출했다는 건..[5] 가장 대표적인 입단동기가 코마다 노리히로로 2순위 지명받았다. 하라보살 본인이 못해본 '''명구회 회원'''이자 '''1989년 일본시리즈 MVP'''다.[6] 드래프트 1순위 지명당시에 "처음부터 자이언츠를 꿈꿨고 당연히 이리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3루를 맡고 싶고, 나가시마 전 감독을 목표로 하겠다"라고 했을 정도로 대놓고 나가시마의 후계자는 자신이라고 얘기했다.[7] 츠다는 직구로만 승부하는 남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였는데, 하필 배트에 공이 정확히 맞지 않는 바람에 골절상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런 류의 부상은 생각 외로 많은데, LG 트윈스오지환도 공을 치다가 손등의 뼛조각이 떨어지는 부상을 당한 적이 있다. 물론 하라에 비한다면 경미한 수준인데, 하라의 경우 팔뼈가 세조각났다. 부상회복 후에 결국 주니치감독에서 모가지 짤리고 요미우리로 복귀한 야마우치 카즈히로 타격코치와 함께 타격폼까지 수정해야 했다.[8] 그리고 하라의 외조카 스가노 도모유키는 이를 보고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스가노는 2013년에 교진에 입단하며 외삼촌과 재회하게 된다.[9] 그런데 은퇴하자마라 바로 다음 해에 등번호 8번을 신인인 니시 도시히사에게 줬다. 게다가 니시에게 8번을 준 이유는 드래프트 1순위 지명의 유망주이기도 했지만 이름이 니(2)와 시(4)라서 2·4=8 이라는 이유에서(...) 니시가 요코하마로 이적한 이후에 교진의 등번호 8번은 타니 요시토모, 카타오카 야스유키, 마루 요시히로 등 기대를 받고 입단한 외부 영입 선수들에게 이어지는 중.[10] 그냥 던진것도 아니고, 패대기 치듯이 던져 불쾌감을 대놓고 드러냈다.[11] 그렇게 당하고도 감독 자리를 다시 맡냐는 말들에 대해, '''"자이언츠에 대한 제 사랑에 비하면 그런 문제는 사소한 것입니다."'''라는 대인배적인 발언을 남겼다. 오오 보살...[12] 그리고 이 기록적인 DTD를 겪은 한신은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을 경질한다. [13] 하지만 둘 다 연상녀와 결혼했다.(...)[14] 실제로 2009 WBC 결승전 직후 인터뷰에서 한국 팀에 대한 인상을 묻는 질문에 '''"그야말로 세계적인 수준의 팀"'''이라는 극찬에 가까운 표현을 했다. 물론 이겨서 기분 좋은 것도 있고 결승전까지 두번이나 패했으며 결승전에서도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접전을 펼친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개석상에서 상대 팀에게 긍정적인 발언을 하는 하라의 성향이 드러난 인터뷰라고 할 수 있다.[15] 괜히 우스갯소리로 '하라 보살' 내지는 '세계 6대 성인'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다.(참고로 세계 6대 성인은 스포츠팬들이 농반진반으로 만든 용어로 공자, 석가모니, 예수, 소크라테스에 하라와 가레스 사우스게이트를 추가해 6대 성인이라 일컫는다.)[16] 편집전엔 '매몰차게'라는 표현이 있었으나 삭제했다. 당시 플래툰으로 이승엽을 돌려 기용한 것을 가지고 국내 언론에서 잘하는 선수를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지바 롯데 마린즈 시절처럼 플래툰으로 망치고 있다는 식으로 언플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아예 라인업에도 못 들어갈 성적의 외국인 선수를 현지에서 하라 감독도 한국계 아니냐는 소리 들어가며 플래툰으로라도 기용해주고 있다는게 당시 많은 야구팬 및 관계자들의 의견이었다. (2009년에 이승엽은 35타석 연속 무안타, 이후 24타석 연속 무안타 등 극악의 부진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이승엽을 쓰려 했다!) 괜히 '하라 보살' 별명이 나오는게 아니다. 2011년에 터진 '이승엽, 하라에게 인사하기 싫었다.'기사 사건도 국내 가 반일감정을 이용해서 거의 소설을 쓴 것이라는게 밝혀졌을 때도 게시판 반응은 "그럼 그렇지. 하라 감독이랑 이승엽이 그럴리가..." 라는 반응이었으니...[17] 거기에 외야쪽에 특급신인 쵸노 히사요시까지 첫해 주전을 맡으며 맹활약한 탓에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1루로 내려오고 이승엽의 출전시간은 더더욱 줄수밖에 없었다.[18] 교진 용병들이 타점 합계가 겨우 1점이었던 것에 비해 한신은 고메즈 혼자 8타점, 머튼도 4차전 선제 3점포 등으로 자기 몫을 확실히 해냈다.[19] 해당 클라이막스 시리즈 전체 MVP.[20] 당해 교류전에서 세리그는 처참하게 박살났다. 5할승부 이상 해낸 팀이 10승 8패 한신과 9승 9패 히로시마가 전부였다.[21] 그러나 2015년의 물빠따 전락은 감독보다는 선수와 코칭스탭을 잘못 구성한 프런트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이다. [22] 나머지 리그우승 4번은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패배 2번, 일본시리즈에서 패배 2번[23] 호리에 타카후미도 이에 대해 '''머리 나쁜 거 아니냐'''라고 비판하였다.[24]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동률로 공동 3위이다.